[해월 최시형 평전] 불행했던 어린 시절
[해월 최시형 평전] 불행했던 어린 시절
  • 성강현 부산 동천고 교사
  • 승인 2018.01.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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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의 탄생지에 건립한 천도교 경주교구의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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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찾은 천도교 경주교구>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위세를 떨치던 1827년(순조 27년) 3월 21일(음) 경북 경주시 원효로 119(구 황오동(皇吾洞) 229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종수(宗秀)이고 어머니는 월성배씨(月城裵氏)이다. 원래의 이름은 경상(慶翔)이었는데 1875년 ‘용시용활(用時用活)’의 법설과 함께 이름을 시형으로 바꾸었다. 해월은 외갓집이었던 황오리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여섯 살까지 지냈다. 현재 이곳은 천도교경주교구가 들어서 있다. ‘천도교경주교구 연혁’에는 이곳에 교당을 세우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포덕 51년 1월 (1910.1)
경주군 황오리 손승조 씨는 천도교중앙총부 정광조 씨로부터 전교(傳敎)를 수(受)한 후 동 리 229번지의 대지와 동 지상의 건물 미가(尾家) 정침(正寢) 1동 5간 행랑 2동 4칸과, 동 228번지의 대지와 지상 건물 미가 정침 1동 6칸과, 동 227번지 전(田) 252 평(제2세교조 최해월 신사 유허지)을 천도교중앙총부로부터 매수(買受)케 하고 전기(前記) 건물 229번지 상(上) 정침 1동 5칸에는 남(男)전교실로, 228번지 상(上) 정침 1동 6칸에는 여(女)전교실로 설립하다.


즉,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에서 경주교구를 설립할 때 해월의 탄생지를 매입해 교당을 세웠다. 1905년 천도교로 개칭해 비로소 조정의 탄압에서 벗어난 동학 교단은 이후 교세 확장과 지방 교구의 정비에 나섰는데 이때 경주에는 특별히 제3세교조 의암 손병희의 사위였던 정광조가 직접 내려와 스승 해월의 탄생지를 매입하여 교구를 설립해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 연혁에 의하면 해월의 출생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229번지가 아니라 227번지로 기록되어 있어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 검증이 필요하다 하겠다. 


해월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정을 느끼기도 전인 여섯 살 때 모친인 월성배씨가 돌아가셨다. 부친이 재혼을 하자 해월과 동생은 친척이 살던 포항시 북구 신광면 기일(基日, 터일)리로 이사했다. 열다섯 살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셔 그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부모가 없는 해월은 친척에 의탁해 어렵게 살아야 했다. 이러한 해월의 모습에 대해, “입에 풀칠할 형편이 못되어 동쪽에서 심부름해주고 서쪽에서 품을 팔았고, 아침에 절구로 찧어 저녁에 거두는 식으로 살았으며, 몸에는 온전한 의복을 입지 못하시며, 입에는 술 찌꺼기나 겨도 마다할 형편이 못되었다”(오상준의 <본교역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해월은 어린 시절의 불우했던 기억을 평생 잊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가족에게 했던 이야기 속에 스며있다. 그는 가족들에게 집을 찾아오는 도인을 잘 대접하라고 항상 이렇게 타일렀다. “도인(道人)이 오면 밥을 드셨는가 묻지 말고 밥상부터 차려주라. 그리고 옷을 지을 때엔 반드시 새 천으로 안감을 써라.” 또 해월은 하인(下人)을 부를 때 “머슴애, 머슴애”라고 부르지 말고 꼭 이름을 불러주라고 하였다. “배고픔이나 추위나 힘든 일은 참아낼 수 있었으나 머슴애라는 빈정대는 말은 죽기보다 싫었다”고 해월은 말했다. 이러한 해월의 이야기는 모두 어린 시절의 춥고 배고팠던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동학을 이끌면서 백성들에게 격의 없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민중들 대부분이 갖고 있었던 이러한 아픔을 해월이 잘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었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해월은 선천적으로 건강한 몸을 물려받았다. 자라면서 힘이 센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17세의 가을에 터일의 안쪽 오금당 마을에 있던 한지 공장인 제지소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필자는 2005년 터일을 방문해 이 동네에 사는 한덕수(당시 81세) 옹을 만나 한지 공장에 대해 물었더니 자신도 어릴 적 지통질(제지소에서 종이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하면서 터일 주변에서 질 좋은 닥나무가 많이 나서 이곳의 종이는 영남 일대에서 꽤나 유명했다고 하였다. 제지소에서의 지통질은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서너 명이면 충분한데, 닥나무를 두드리는 사람 한두 명과 종이를 뜨는 사람이 두 명이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한 옹에 의하면 터일에는 세 곳의 제지소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 곳은 한 옹이 어릴 적 생긴 것이라 하였다. 예전부터 있던 두 곳으로는 마을의 아래쪽 개울가와 마을 위쪽의 개울가에 각각 있었다고 하였다. 아래쪽 제지소는 물이 마을을 빠져나가는 굽은 개울의 가장자리에 지통이 있었고 그 옆에 종이를 말리는 집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위쪽 제지소는 마을의 꼭대기 두 개울물이 합치는 곳에 지통이 있었고 종이를 말리는 곳은 그 곳에서 10m쯤 아래의 언덕배기에 있었다고 하였다. 한 옹은 두 곳이 다 오래 되었지만 위쪽의 제지소가 먼저 만들어졌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해월이 일했던 제지소는 가장 오래된 마을 위쪽의 제지소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 보가 만들어지면서 개울물이 줄어들자 콘크리트로 다리를 놓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한 옹은 제지소는 1970년대 초까지는 운영이 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한지 소비가 줄어들면서 제지소도 문을 닫았고 지통질에 쓰이던 물건들도 어느 날 외지인이 와서 마을 밖으로 반출되어 지금은 하나도 남지 않아 마을 주민들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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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신광면 기일(터일)리 해월 최시형이 일했던 제지소가 있던 자리. 일제강점기 때 보가 만들어지면서 개울물이 줄어들자 콘크리트로 다리를 놓아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해월은 이곳 터일에서 소를 몰고, 꼴을 베고, 나무짐을 지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다 열일곱 살에 독립했다. 누이동생을 돌보며 닥나무를 두드리고 종이를 뜨는 지통질을 하며 세상을 접했고 종이를 만들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웠다. 열일곱 나이의 근육질 몸으로 힘껏 망치를 내리치며 뭉개지는 닥나무와 함께 낡은 세상이 무너지기를 해월은 염원했을 것이다. 수운(水雲)의 순도(殉道) 이후 교단을 수습하면서 행한 해월의 첫 가르침이 평등에 관한 내용이었다는 것은 해월이 겪은 세상의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이 컸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해월은 제지소에서 성실하게 일해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는 종이를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종이를 배달하는 일과 수금까지도 맡아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해월이 수운의 명에 의해 동학을 처음으로 포덕했던 곳이 영해, 영덕, 기계, 청하 등지였는데 이곳은 다름아닌 해월이 제지소 시절에 종이를 배달하러 다니던 곳이었다. 자신들과 거래하던 사람들은 동학에 입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청년 해월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성강현 부산 동천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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