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알프스기행] 영남알프스 도자기 가마터를 찾아서
[영남알프스기행] 영남알프스 도자기 가마터를 찾아서
  • 이병길 / 영남알프스 학교 교사, 시인
  • 승인 2018.01.1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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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의 모든 것들은 가벼워지는 시간이다. 인간은 추위에 자꾸 더 많이 입지만, 나무도 풀도 제 몸의 일부를 내려놓는다. 겨울은 산에 숨겨진 것들이 잠시 노출되는 시절이다. 무성한 나무와 풀에 감춰진 보물들이 잠시 드러나는 계절이다.


도자기의 발명은 인류문명의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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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천황산 가마터는 위쪽에서 중간 지점의 억새밭 일원이다.>



생명체에 의식주는 필수적이다. 그중에서 먹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신석기 농업혁명은 저장용기인 그릇, 토기가 없었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텅 빈 그릇은 암울했고, 가득 찬 그릇은 희망 그 자체였다. 그릇의 발명은 인류문명의 전환점이었다. 선사인들은 여유생산물의 보관 용기로 항아리를, 나아가 숨 쉬는 그릇인 옹기를 만들었다. 옹기는 술, 젓갈, 장과 같은 깊은 맛을 우려내는 발효음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가 흔히 도자기라고 하는 말은 토기, 옹기와 같은 도기와 백자, 청자와 같은 자기의 결합어이다. 이것은 그릇을 굽는 온도로 구분한다. 도기는 1000도, 자기는 1300도 정도의 열을 가해 만들어진다. 청동은 1000도, 철은 1100도에 녹으니, 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특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는 고려시대부터 만들었다. 그 이전에는 중국이 유일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은 한나라 말년인 3세기에 세계최초의 도자기인 청자를 구워냈다. 그리고 6세기 수나라 이후 백자를 만들었다. 당나라 시기에는 중국 도자기는 해외 수출품으로 중국의 부를 이끌었다. 이렇게 자기가 유명하게 된 것은 도기의 단점인 방수성이 보완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그릇, 접시, 찻잔 등 실제 생활에 널리 쓰였다. 또한 귀한 물건이기에 도자기의 사용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도자기는 실크로드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우리나라는 세계 두 번째로 도자기를 만든 나라다. 신라말 선종 스님과 고려 귀족들의 중국 차 문화 수용으로 찻사발의 수요가 급증했다. 그런데 중국 송나라가 세워지면서 청자를 만들던 오월국이 혼란해지는 틈을 타서 고려에서 오월요의 사기장을 후한 대접을 제시하고 데려왔다. 그때부터 우리나라도 도자기 생산국이 되었다. 고려의 비취색 청자는 전쟁의 산물이다. 거란의 침입으로 왕실이 전라도 나주로 피신하자, 사기장들도 강진, 고창, 부안으로 피난해 그릇을 구었는데, 그곳의 땅이 다른 곳과 달랐기 때문이다. 흙 속에 함유된 철의 분량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려청자가 유명하게 된 것이다.


도자기 전쟁으로 침체된 조선의 도자기와 흥한 일본 도자기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청자보다 백자를 더 많이 만들었다. 이는 고려의 권문세족과 원나라가 백자를 좋아해서 고려청자의 수요가 고려 말부터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백색으로 분칠한 청자인 분청사기를 만들었다. 그 후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이 유교적인 검소와 청렴의 상징인 하얀빛을 좋아해 본격적으로 백자를 생산하게 되었다. 조선에 백자를 만들 기틀을 마련한 것은 세종이다. 당시 전국의 도자기 생산지를 조사하였는데, 자기소가 139곳 도기소가 185곳이었다. 전국 가마터가 324곳이었다. 품질에 따라 상.중.하로 나누었고 왕실의 그릇은 백자를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백자는 조선왕실의 그릇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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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장흥’ ‘언양인수부’명 분청사기(청주박물관 소장) 언양의 가마터에서 출토된 명문 도편을 보면 조선 왕실에 납품된 도자기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사발' 하나는오사카성과도 바꾸지 않겠다.’던 일본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다. 일본은 도자기 전쟁을 통해 조선의 천여 명의 사기장을 데려갔다. 조선은 이후 가마가 파괴되어 왕실 제사에 쓰일 그릇까지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정조 이후의 당파싸움과 세도 정치로 나라가 혼란해지고 왕실의 지원이 끊어지게 되어 도자기의 질은 점차 낮아지게 되었다. 일본은 1616년 이삼평이 아리타에서 백자를 만든 이후 1653년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기 시작해 100여 년 동안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다. 오늘날 일본 국부의 기초를 마련했다.


중국의 도자기기 전해진 16세기부터 유럽의 식문화는 오늘날과 비슷하게 바뀌게 되었다. 도자기는 물기 있는 음식을 담을 수 있었다. 점차 음식에 적합한 식기도 다양해졌다. 나아가 단단한 도자기로 인해 다양한 칼과 포크가 등장하였다. 또한, 홍차문화를 발달시켰다. 도자기는 유렵의 식문화 혁명을 이끌었다. 19세기 영국이 본차이나를 개발하기 이전까지 유럽인에게 아시아의 도자기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댐에 잠겨버린 도자기 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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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잠리 가마터 전경>



영남알프스 주변 낮은 산 구릉지대에 많은 가마터가 있었다. 그런데 대암댐과 사연댐, 대곡댐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가마터는 가뭄, 겨울이 아니면 물속에 잠겨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존의 측면에서는 다행인 듯싶다. 도예공인 사기장이 되려는 사람은 보통 옛날 가마터를 찾아 나선다. 누군가에게는 단지 깨진 도자기 파편(사금파리, 도편)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도자기의 표본이자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편을 보고 흙의 재질을 따지고, 그릇이 구워진 온도를 확인한다. 그래서 가마터나 요지, 폐기장은 그냥 버려진 곳이 아닌 교육의 현장이다.


울산지역도 고려시대 이래로 청자, 분청사기, 백자를 생산했다. 고려청자 가마터로는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도로변에 천전리 진현 압골 유적이 있다. 공식 기록으로 영남알프스 지역에 두 곳의 가마터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언양현조에 따르면 “자기소(磁器所)가 하나, 도기소(陶器所)가 하나 있다. 모두 현의 남쪽 대토리(大吐里)에 있다. (하품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에 “도기소, 자기소가 현내 옹곡리(瓮谷里) 및 현의 남쪽 대토리(大吐里)에 있다. 도기의 품질은 하품이고, 자기의 품질은 중품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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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잠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도편들>



울주 하잠리(荷岑里) 분청사기 가마터는 울주군 삼동면 하잠리 대암호의 북쪽 기슭에 있다. 울산 KTX역에서 구수마을회관을 지나 호반펜션 인근에 있다. 길은 좁고 낯설고 때론 위태하다. 하잠리 가마터는 1969년 완공된 대암댐에 의해 일부가 수몰된 상태이지만 펜션 주변 가마터는 접근 가능하였다. 아직도 군데군데 도편들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청자를 비롯하여 분청사기, 백자 등 다양한 종류가 채집되었다. 분청사기가 주종인데, 그릇의 종류는 대접, 접시, 종지, 병, 항아리, 벼루 등 매우 다양하다. 그릇에는 나비, 국화 등의 문양을 상감, 귀얄 등 다양한 기법으로 장식하였다.


가마터에서는 ‘언양인수(彦陽仁壽)’, ‘장흥(長興)’, ‘수영(水營)’ 등이 새겨진 다양한 명문 자기가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던 병영인 ‘수영’에 납품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인수부(仁壽府, 1400~1556)는 세자부 관련 관청이었고, 장흥고(長興庫, 1419~1437)는 궁궐 내 물품 공급 관청이었다. 이로 본다면 하잠리의 그릇은 지방관청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에까지 납품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잠리는 <세종실록지리지>의 언양 대토리의 자기소 가마터로 추측된다.


옹태마을은 왕실에 납품한 도자기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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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태마을 가마터 주변에서 발견된 도편들>



울주 태기리(台機里) 분청사기 가마터는 사연댐으로 수몰된 옹태마을에 있다. 언양교차로를 지나 신흥삼거리로 들어서 신흥마을길을 지나 꼬불꼬불하고 좁은 산길을 넘어가면 태기리 마을이 나온다. 옹태(瓮台)마을은 말 그대로 옹기마을, 그릇마을이다. 마을회관 할매에게 물으니 사기점 위치를 알려주나 알아듣기 어렵다. 내비게이션이 요즘은 그런 측면에서 편하다.


사연댐을 따라가다 암갈색 바위 모퉁이를 지나면 바로 개울 다리가 나온다. 인근에 주차를 하고 댐 안쪽으로 들어간다. 겨울이라 물은 없지만 도깨비 바늘과 열매가 옷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길을 막는 마른 풀들을 헤치고 걸어간다. 이정표는 없지만 물이 빠진 경계지역에 도편들이 얼굴을 비쭉 내밀고 ‘어서 오세요’ 하는 듯하다.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기와, 청자, 백자 등이 출토되어 오랜 기간 도자기를 구웠음을 알 수 있다. 그릇 파편만이 아니라 가마에서 도기를 구울 때 도기를 놓는 받침인 도지미, 왕실 도자기를 굽기 위해 사용되었던 갑발이 많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그릇을 포개 구울 때 굽에 받치는 삼각형의 태토받침이 많이 보인다. 조선 초기 그릇이라 그릇 안쪽에는 태토받침 흔적이 거의 없거나 세 개 정도이다. 이곳에서도 하잠리와 같이 ‘언양인수’, ‘장흥’ 등의 명문 분청사기가 출토되었다. 경주장흥(慶州長興), 내섬(內贍), 사선(司膳) 등의 다른 관청 명 자기가 출토되기도 했다. 경주 자기소의 하청을 받아 생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이곳은 인수부와 장흥고에만 납품한 것이 아니었다. 내섬시(內贍寺, 1403~1800)는 궁궐에 바치는 토산물, 2품 이상에게 주는 술과 안주, 왜인(倭人)에게 주는 음식과 직조를 담당한 관청이다. 사선서(司膳署, 1392~1417)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임금의 식사와 궁궐 내의 음식을 담당한 관청이다. 옹태의 도자기는 기록보다 질 좋은 그릇을 만들어 왕실에 납품하고, 오랫동안 가마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옹태마을 가마터는 <경상도속찬지리지>의 옹곡리 가마터로 추정된다.


국가 사적지 가마터가 천황산에 있다
 
하잠리와 태기리 가마터는 그 당시 언양현(彦陽縣) 소속의 가마로 여러 중앙관청과 지방관청에 공납할 자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두 곳 모두 15세기 문헌 기록에 등장한 대규모의 가마터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두 곳은 울산시 지정문화재이지만,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 가마터가 따로 있다. 사적 제129호인 천황산 요지(窯址)가 그곳이다. 1964년 6월 10일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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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산 가마터는 억새밭 속에 숨은 듯 있기에 찾기 쉬운 곳은 아니다.>



천황산 요지(窯址)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143-1번지(배내주암길 108-114) 일원에 위치한다. 배내고개를 지나 주암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산속에농원펜션과 가깝다. 하지만 길 어디에도 안내판은 없다. 가마터가 산속에 있는 듯, 근처를 서성이다가 도편 하나만 길 위에서 발견했을 뿐이다. 실재 접근 가능한 가마터는 따로 있었다.


펜션에서 약 1.5km를 올라가면 배내고개에서 능동산을 지나 천황산으로 가는 길과 만난다. 그렇다면 천황산 요지는 도대체 어디일까. 사자평 억새밭에서 도편을 찾는 것은 마치 해변 모래밭에서 바늘 줍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샘물상회에 들어가 주인장에게 물었다. 주인장은 군청에서 와도 가르쳐주지 않는단다. 그러면서 나의 행색을 보고 안 가르쳐주는 듯하며 가르쳐준다. 그냥 펜션 주변에서 찾지 못하고, 생각 없이 천황산(1189m)에라도 가야지 하고 배낭도 물도 없이 산에 올랐기에 행색이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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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산 일대에서 찾은 도편들. 다소 투박하고 거친 느낌이 든다.>



천황산 요지는 샘물상회에서 30여 미터 아래쪽에 있다. 배내고개에서 6km 정도 지점이다. 천주교인들이 피난했다는 범굴과도 가깝다. 옛 알프스 목장을 가기 전이다. 작은 도랑이 있는 곳이다. 도랑은 말랐지만 도편은 얼굴을 드러낸다. 겨울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억새밭을 헤집고 다녔다. 가시들이 옷을 붙잡고 억새들은 발길을 막았다. 그래도 한두 줌의 도편들이 손에 쥐어졌다. 도편들은 두껍고 투박하고 굽이 좀 높았다. 왕실에 납품한 그릇과 질감과 무게가 달랐다.


천황산 가마들은 17세기쯤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마터는 이 고원지대에 5~6개소 정도가 있다. 해발 900m가 넘는 높고 험준한 곳에 있는 가마터로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런데 왜 이처럼 높은 곳에 가마터를 만들었을까?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흙이 중요하다, 그다음은 유약, 땔감이다. 태기리나 하잠리 주변에는 좋은 자기토가 있었다. 습지인 천황산 사자평 어딘가에 분명 질 좋은 흙이 있었을 것이다. 그릇을 구울 나무는 지천으로 있다. 지금도 영남알프스를 다니다 보면 군데군데 개울 근처에 숯 굽던 숯가마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고원지대에 가마터가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이곳이 언양, 밀양, 청도 등의 큰 시장에 내다 팔기 쉬운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억새밭에서 보물찾기


가마터를 찾아다니다 보면 은근 욕심이 생긴다. 혹시라도 조선 백자나 청자, 분청사기의 온전한 물건이 발견되지는 않을까. 마치 보물찾기 하는 심정이 되기도 한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생각하고 걸어가니 눈은 마치 도편 찾기에 빠져있다. 립스틱을 사려 하니 어떤 색이 좋은지 몰라 여자만 보면 입술 색만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관심도만큼이나 도편은 쉽게 보였다. 하지만 보물은 찾지 못했다.


영남알프스 일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가마터가 또 있다. 살티마을 아래 청수골 가는 길과 간월재 홍류폭포 근처 쉼터 일대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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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었던 범굴, 동굴 위쪽에서도 도편이 발견되었다.>



박물관에 가면 가장 많은 유물이 바로 그릇이다. 그릇은 흙과 불의 조화가 만들어낸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1300도의 열을 통해 만든 도자기는 우주선에도 사용되고 있다. 보잘것없는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인류의 삶을 풍족하게 만든 도자기는 여전히 우리의 삶과 함께하고 있다.


추운 산을 헤매다 내려와 더운 찻물을 끓이고 잔을 데우고 차를 마시니 마음도 훈훈해진다. 겨울 산 억새가 눈앞에 여전히 아른거리고 사금파리는 햇살에 반짝인다.


이병길 / 영남알프스 학교 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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