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보는 세상] 내 친구 데이지
[작가가 보는 세상] 내 친구 데이지
  • 박기눙 소설가
  • 승인 2018.02.07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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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잠에서 깨어 쇠잔한 의식의 한 자락을 살핀다. 예전에 만나다가 연락이 뜸하거나 만나지 않는 이들에 닿은 의식의 흐름은 낮고 깊게 흐른다. 괜히 쓸쓸하고 울적한 마음. 마음의 흔적을 담으려 컴퓨터를 켠다. 이 메일함에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메일 제목도 “쌤, 데이지에요.”이다. 급하게 메일을 연다.


샘 잘 지내요?
선생님 버스 놓치고 우리랑 저녁 먹었던 게 벌써 5년도 더 됐나 봐요.
그때 일 끝나고 먹었던 떡볶이 맛있었는데…. 그리고 보니 선생님이랑 저랑 그때 우리 참 젊었던 듯요.
영국에 또 놀러 와요. 이번엔 울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요. 선생님 주무실 방 있어요.
일요일 오후라 여유 만땅 부리고 있었어요. 그 시간에 샘 생각도 났고. (여기도 애들 학원 쫓아 다니느라 평일 오후는 정신없답니다) 하지만 이 멜 안 보낸다고 쌤 생각 안 하는 건 아니어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라요.

데이지 드림


메일을 읽는 내내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 결혼하고 잠시 집 근처 직장을 다녔다. 그곳에서 데이지를 만났다. 나보다 열두 살이 어린, 소위 말하는 띠동갑의 그녀와 나는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퇴근하는 길, 데이지는 우리 동네까지 함께 걸어와서 버스를 타곤 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함께 걸어와 주는 데이지가 몹시 고마웠다. 컵 떡볶이를 사서 들고 먹으며 재잘대며 걷던 그 시절은 데이지도 나도 잊지 못하는 시간이다. 그 후 나는 입덧이 심해져서 직장을 그만두었고, 데이지는 영국으로 가면서 헤어졌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그 시절 유행이던 미니홈피에 올라온 데이지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달래곤 했었다. 그러다가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 말았다. 데이지는 낯선 곳에서 적응하느라, 나는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그랬다. 아이들과 떡볶이를 먹으면서 혹은 영국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데이지를 떠올렸지만, 그녀와 나의 시간은 더는 교차하지 않았다.


몇 년 전, 내가 유럽여행을 가기 몇 주 전이었다. 여행의 첫 출발지가 런던이었다. 불현듯 데이지 생각이 났다. 예전 수첩을 뒤져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그녀의 동생과 통화를 하고 데이지 번호를 얻었다. 영국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 얼마 전에 아이도 낳았다는 소식에 그녀와 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녀와 통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 데이지 친정 전화번호는 그동안 받는 이가 없어서 통화하기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데이지 동생(데이지 친정 식구 중에 유일하게 나와 데이지 간의 우정을 알던)이 우연히 그날, 그 시간에 친정에 잠깐 들른 사이에 내가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었다. 행운의 계시를 받은 양 우리는 신기하고 놀라워했다. 데이지가 부탁한 여러 가지 살림살이(아이에게 필요한 물건 따위)를 잘 여며 여행 가방 안에 챙겨 넣고 런던으로 향했다. 내가 머물 숙소에 미리 와서 기다린 데이지와 데이지의 남편을 만난 그 순간은 내 머릿속에 박제되었다.


다음날, 단체 여행의 일정표를 따라 데이지와 대영박물관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 혼자서 그 무거운 유모차를 이끌고 지하철을 타고 달려온 데이지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투어 일정을 잠시 뒤로 하고 그녀와 나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잠깐의 시간 차이로 투어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내친김에 데이지 남편과 합류, 런던 시내의 펍에서 푸짐하게 먹고, 켄싱턴 공원에서 자전거도 타고, 시내에서 쇼핑하고 지하철을 타고 그녀의 집까지 가게 되었다. 윔블던 역을 지난 곳, 아담하고 소박한 그녀의 집은 세 식구가 살기에 알맞아 보였다. 하룻밤 자고 가라는 그녀의 청을 물리치고 나는 어둠에 젖은 런던 시내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진하고 깊은 런던의 밤을 달리며 데이지와 나는 예전처럼 재잘대고 깔깔거렸다. 이후 열흘 동안 유럽 몇 개국을 돌고 집으로 돌아왔다. 찰나를 담은 여행 사진을 보며 데이지와 함께한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다짐했지만 이후 몇 번의 통화, 이메일, 메신저를 주고받다가 또다시 멀어졌다.


이번에 받은 데이지의 이메일은 단맛 깊은 빵처럼 달콤하기 그지없다. 첨부한 아이들 사진은 데이지가 얼마나 예쁘고 열심히 살았는지 증명하는 모양새다. 답장을 보내니 금세 데이지가 답장을 보낸다. 주고받은 새 전화번호처럼 그녀와 나의 인연은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울산이든 런던이든 그녀와 만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꿈꾼다. 물리적인 거리를 넘는 길은 한낱 마음에 있으니 이제는 머뭇거리지 말고 시간도 공간도 뛰어넘어 그녀, 내 친구 데이지에게 달려가리.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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