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과 촛불...백무산 시인에게 길을 묻다
87년과 촛불...백무산 시인에게 길을 묻다
  • 울산저널
  • 승인 2018.02.0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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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백무산 시인과 함께하는 인문학 콘서트가 중구 성남동 플러그인에서 열렸다. 이날 토크 콘서트는 울산민예총 문학위원회에서 매년 발간하는 <울산민족문학>지 15호 발간과 지난해 30주년을 맞은 1987년 민주화운동을 기념해 ‘백무산 특집’으로 기획했다. 황주경, 정현신, 이인호 시인이 묻고 백무산 시인이 답했다. 50여명의 울산지역 문인들이 참석한 이날 인문학 콘서트를 지상중계한다.


백무산


질문=87년 민주화운동과 2016년 촛불혁명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나?


백무산=87년 1월 14일 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다. 그 후로 집회를 시작했는데 시가전을 좀 해야겠다고 몇 번 울산성당(현 복산성당)에서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3.1절 집회를 하고 그 다음 옥교동에서 집회를 시작하는 걸로 계획했다. 주리원백화점 앞이 아니고 작은 골목에서 먼저 시작했는데, 그 당시 총동원해서 모인 인원이 40명 정도가 전부였다. 엄혹한 시절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그 당시에 울산이 생기고 어쩌면 시위를 한 것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호를 한 다섯 개 외치는데 사복경찰들이 5분도 채 안돼 진압했다. 그때 잡혀서 처음으로 구류를 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87년과 지난해 촛불은 그럴 정도로 차이가 크다. 알고 보면 시대 변화는 그렇게 클 수밖에 없다. 절대권력의 지배를 받아온 체제 아래서 살아온 삶과 이후의 삶이 너무나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차이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것을 연결시키기 어려울 것 같다. 굳이 연결시킬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질문=촛불혁명은 이전의 엄숙주의를 깨고 개인이 주체로 나선 것이라 보는데?


백무산=어떤 집단 이전의 권력구조 변화에서 봐야 하는데, 민중이라는 개념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개념이다. 절대권력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아픔 속에서 투쟁들이 집단화될 수밖에 없는데 민주화 이후에는 개별화되고 시민이 등장하게 된 것 이다. 알고 보면 촛불항쟁은 민중항쟁이 아니고 시민항쟁이라고 불러주면 좋겠고, 혁명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의가 있다. 민중에서 시민이 등장한 셈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민계급의 등장인데 집단에서 시민 개개인의 권리가 높아지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이다. 굳이 개개인의 시민의식이 높아졌다고 보는 건 아닌 것이다.


질문=촛불혁명 이후 필요한 새로운 시대정신은 뭐라고 보는가? 


백무산=그 질문을 다 감당하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변화된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촛불시위를 촛불혁명이라 부르는데, 고전적으로 혁명이라고 하면 권력의 계급적 변화 수준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따라야 하는데 87년은 절대 권력이 잡고 있었고 시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국가와 개인만 있었고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87년 이후에야 시민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그 전에는 국가가 사회를 다 장악하고 있었던 시대였으니까 시민사회가 없었기에 시민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민중이라 불렀다. 시민의 탄생은 의미가 있었다. 형식적이나마 정치적 변화는 그런 시민을 탄생시켰다.


이후에 국가 성격을 바꿔오게 된다. 커다란 변화, 지금 우리에게 닥쳐져 있는 과제는 촛불에서도 많이 이야기 나왔지만 이전과 다른 민주주의, 조금 더 직접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볼 때는, 인간의 자율성 문제다. 인간의 자율적인 활동이 요구되는 그런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질문=시민혁명 이후로 적폐청산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완성되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인지, 촛불 시민사회혁명 이후 요구되는 것들은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보나?


백무산=개인이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개인이 역사에 등장하지 못했다. 개인의 책임이 커지게 되었다. 개인과 개인의 연대를 통해서 사회변화를 꾀할 수밖에 없다. 집단화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권력화 되는 것이라 집단화를 경계하기도 한다. 이런 개개인의 등장이 우리에겐 역사적 실험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인의 등장은 바로 자율과 연관이 있고 자율적인 사회를 만들어 가는 주권이 시민에게 있다고 하지만 국민이 국가권력을 가질 수 있는냐 문제인데요. 다수 국민이 국가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거대 국가권력을 분권화 하고 국가권력을 사회로 이전해 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사회가 자율적으로 굴러가는 것이, 국민이 주권을 가지는 것이 권력을 가지는 과정이다.


국민이 국가권력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다보니까 모두가 정치에 몰리고 선거에 몰려가지만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에 대한 관심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관심은 많은데 사회에 대한 관심은 소홀히 한다. 사회의 기반 없이 국가가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국가권력은 최소화하고 사회기능을 높이는 것이 수준 높은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문화와 자치활동, 그리고 언론 등이 더 중요하게 된다. 울산에 배달되는 신문이 10만 부가 넘는 데 대부분이 보수언론이고 겨우 수천 부 진보언론 매체인 수준에서 선거를 잘 치르는 문제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사회를 지탱하고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 언론인데 아직 언론의 우리 현실이 그렇다. 그런 것과 함께 문화에서 할 일이 많다. 절대적인 것이 문화라고 봐야 한다.  


정현신 시인이 백무산 시인의 ‘기차를 기다리며’를, 황주경 시인이 백 시인의 시 ‘가방 하나’를 낭독했다.


백무산=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다. 새로운 시집을 내면 그 시를 좀 뺐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사실 그럴 때가 적지 않다. 내 개인 생각과 다르게 선호가 달라지더라. 시가 그렇게 어렵고 내가 시를 냈지만 내 것이 아닌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냐면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시가 아니다. 길게 가지 못하는 시다.  자기감정이 노출되고 혹은 자기 지식이나 또는 자기 뭔가를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돌출되어 드러나거나 하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라고 본다. 내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다.


질문=촛불이후 우리 문학인들의 과제는 무엇일까?


백무산=사실은 지금 문학이 많이 힘들어 한다. 문학의 시대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가깝게는 80년대 중후반을 ‘문학의 시대’라고 불렀다. 문학인들이 사회변화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인들이 앞장서지 않고서는 되는 일이 없던 시대였으니까. 또는 문학에 담긴 메시지가 사회를 변화시킬 메시지가 실제로 담겨 있고 그것만이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기 때문에 그렇다. 그 때는 언론도 제대로 기능을 못했던 점도 있었고 다른 지식인들도 별로 활동하지 못했고 정치적인 자유도 많이 박탈되어 있었고 사실 문학이 많은 걸 견인하는 시대였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여러 가지 매체가 있고 소통매체가 있지만 문학으로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분화를 겪기도 했지만 문학의 역할은 끊임없이 남는다.


모든 언어의 출발에서 문학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자폐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거대한 사회문제와 세계문제를 다루는 데 제한을 받고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지점에서부터 후퇴해서 지극히 개인문제에 침잠하는 게 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문학이 세속화되었음에도 우리 삶의 실제적 문제를 거의 문학이 건드리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문학이 대중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많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문학이 엇결을 빼고 나면, 다른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문학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시기보다도 문학은 항상 저항이고 문학 자체가 저항이다. 기성관념과 제도적 고정관념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은 끊임없이 저항할 수밖에 없고 저항 그 자체가 문학이다. 그래서 문학 본령에 더 가깝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현실에서 아까 자율문제를 말했지만 이 개인의 자율이 중요하고 개인의 자율은 이 권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스스로 사회를 이끌어가면서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으로 선다는 것인데 우리가 이러한 외부의 힘을 없애도 우리 스스로 해갈 힘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자본의 논리도 문화에 깊이 배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그런 자율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본다. 문학이 그런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본질적으로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문=책을 읽지 않는 시대, 책을 출판해도 대중에게 읽지 않는 시대에도 문학을 계속해야 할까?


백무산=작가들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좋은 작품들이 별로 없다. 작가가 책임 있게 우리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아픔을 같이하고 하는 작품이 흔치 않다. 작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과거에 보면 알고 있듯이 좋은 작품들이 특히 빅토르 위고, 헤세 같은 문학을 참 좋아한다. 우리는 헤세 문학이 위안을 주는 문학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헤세 같이 그 시대의 고민을 안고 가는 작가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작가들의 작품이 사소화되고 개인화되고 자폐화되면서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면서 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질문=시인을 잠수함의 토끼, 제일 먼저 울기 시작해서 가장 늦게까지 우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시대의 아픔에 대한 시인의 역할은?


백무산=시인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나는 시인은 시대의 변화를 알려주는 사람, 변화하지 않는 데서 변화를 감지하고 변화하지 않는 데서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바뀌고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시인이라고 본다.


가장 대척점에 있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은 끊임없이 유지하려고 하고 고정시키려 하고 강력한 것으로 세우려고 한다. 시는 그것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려 하고 조각조각내려 하고 끊임없이 말랑말랑하게 하고 끊임없이 전복하는 것이 시의 역할인 것이다. 알고 보면 그런 언어를 유포하고 변화를 유도하고 하는 것이다.


흔히들 틈이라는 것이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작은 틈을 내고 많은 균열을 내고 그 많은 균열로 벽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 시의 역할이다. 그 큰 것을 어떻게 무너뜨리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 틈을 내는 일이 시의 역할이라고 본다. 시 한 편이 그런 틈을 내고 많은 사람들이 그 틈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볼 때 시의 역할은 작은 것이 아니다. 시가 큰 메시지를 담고 큰 역사를 담고 하는 데 있지 않고 시는 아주 작은 데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끊임없이 거대한 벽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시라고 보는 것이다. 


정리=이동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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