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톺아보기] 같이 늙어가는 제자
[교육 톺아보기] 같이 늙어가는 제자
  • 조성철 삼일여자고등학교 교사
  • 승인 2018.02.28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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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동네에 돌아와 차를 대고 걸어가는데 옆에 주차된 차에서 한 여자가 내리면서 “선생님”하고 부른다. 안면은 있는데 딱히 누구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아 대답을 주저하면서 머리를 급히 굴리기 시작하였다.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여러 학교의 선생님들, 지역의 시민단체 활동가들, 동네 이웃들, 졸업생들 중 한 명일 텐데, 연배를 보아하니 동네 아주머니들보다는 젊어 보이고 졸업생들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이니 아마도 학교 선생님들 중 한명일 거라고 넘겨짚어 “아 선생님” 하고 얼렁뚱땅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저 선생님 아닌데요. 민희라고 합니다”한다. 자세히 얼굴을 뜯어보니 생각이 났다. 울산에 발령을 받은 첫해 담임을 할 때 우리 반 체육부장을 했던 녀석이다. “야 너 김민희 맞지? 와 반가워.” 두 손을 마주 잡고 한참 얘기를 주고받았다. 언제나 활발하고 주변을 챙길 줄 알았던 학생이었는데 마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얘기를 하다 보니 녀석이 나하고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조만간 같은 반 친구들 몇몇을 모아 자리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고 헤어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작년 한 해만 해도 나는 여러 곳에서 제자들과 마주쳤었다. 봄에 시내 식당에 들어갔다가 이름은 잊었는데 30대 후반인 여사장에게 한 상 잘 대접받고 왔다. 여름에 LG A/S센터에서 30대 이 모 졸업생을 만났고, 성남동 식당에서 밥 먹다가 마흔 살 유 모 졸업생을 만났다. 가을에 울산과학대 농성장에서 20대 장 모 졸업생을, 전교조 행사장에서 30대 이 모 졸업생을 만났다. 민주노총 선거운동을 하면서 경상일보를 방문했다가 갓 대학을 졸업한 김 모 졸업생을 만났고, 동구 어느 학교를 방문했다가 40대 강 모 졸업생을, 현대중공업 앞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다가 30대 김 모 졸업생을 만났다. 그리고 한 달 전 범서읍사무소에서 마흔 살 서 모 졸업생을 만났다.


선생은 어디를 가도 나쁜 짓을 하지 못한다. 인사를 하는 제자들은 소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나를 보면서도 인사를 하지 않는 제자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한 해 평균 졸업생을 400명씩만 잡아도 25년이면 1만 명이다. 울산시내 어디를 가건 제자들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이들 앞에서 내가 만일 쑥스러운 행동을 한다면 그 소문이 동창들에게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니 최소한 울산에서는 자나 깨나 근엄하고 의젓한 모드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울산을 벗어나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해운대 벡스코 전시장에서도 서울 대학로 술집에서도 제자와 마주친 경험이 있다. 심지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고3 학생을 만나 당황했던 적도 있었고, 대만의 어느 해변에서 30대 이 모 졸업생과 조우하기도 했으니 천상 지구를 떠나지 않는 한 품위를 지켜야만 한다.


그런데 사실 여학교 선생님들은 남학교 선생님들에 비해 제자들 복이 다소 적은 편이다. 졸업 후 선생님들과 연락을 지속하는 남학생들의 숫자는 세월이 지나도 그리 큰 변화가 없는 반면, 여학생들 다수는 졸업하고 몇 년 지나면 하나 둘 연락이 끊어진다. 결혼과 육아로 인한 생활의 급격한 변화를 겪거나 안정된 직장을 확보하지 못하여 스스로 위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러다가 좀 더 세월이 지나 이제 걔들이 학부형이 될 연배가 되면 다시 연락이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민희처럼.


민희를 만났던 게 참 반가웠던 이유는 같은 동네에 산다는 사실 때문이다.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은 단지 공간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여러 제자들과의 마주침이 일회성에 그치는 경향을 띄었다면, 동네 주민으로서 만난 민희와는 이제 새로운 사제관계를 형성할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라는 수직적 관계를 넘어 일상을 공유하는 시민 대 시민으로서의 수평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자녀를 키우는 같은 학부모로서, 같은 아파트 반상회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동등한 주민의 일원으로서, 오다가다 두부김치를 놓고 막걸리를 권할 수 있는 이웃으로서의 관계를 기대한다. 이제 제자들과 나는 같이 늙어간다.


조성철 삼일여자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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