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풀로 역사] 하루 반성은 밥솥에서
[내풀로 역사] 하루 반성은 밥솥에서
  • 윤지현 전문 기록인
  • 승인 2018.03.0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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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내풀로

<보은 법주사 쇠솥 ⓒ문화재청>


또 이사를 했다. 어릴 때도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이렇게 옮겨 다닐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어릴 때의 이사와 성인이 되어서의 이사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어린 시절 이사는 동네 친구와의 작별 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의미했다면, 성인의 이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선택하여야한다는 아주 어려운 문제다. 이사 갈 곳과 이삿날, 이삿짐을 옮기는 방법, 가져갈 것과 버릴 것까지 이사라는 하나만으로도 결정해야할 것이 너무 많다. 가구도 없고 살림살이도 거의 없는데도 하루를 몸져 누웠다. 다짐하길 여기서 이사 나갈 땐 더 이상 짐을 불리지 않으리. 그럼에도 지금 나의 최대 고민은 밥상이다. 밥상을 대체할 뭔가가 없다. 그렇다고 계속 바닥에 펼쳐두고 먹을 수도 없는 일. 사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첫날 와서 바로 산 건 냄비. 아무리 없어도 밥은 해먹어야했기에... 어디 냄비 밥 실력 한번 볼까? 어릴 적 감각으로 도전! 그뤠잇! 요즘 같은 시대에 냄비 밥이라니.


밥솥. 이처럼 간단한 그릇이 오롯이 한 가지 음식만을 위해 존재하다니... 이러저러한 기능을 추가하였다 하더라도 결국 집에서 늘상 쓰이는 건 밥 짓는 용도. 밥도 밥이지만 이 “솥”이라는 건 예로부터 특별한 기물이었다. 좋은 날 받아 이사 갈 집 정해두고 정 못 간다면 밥솥이라도 가져다 놓으란 이야길 들은 적이 있는데 이삿짐의 대표주자로 뽑힌 요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이 밥솥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쌀이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린 밥의 형태보다 떡을 먼저 먹었다. 고대 유물을 보면 시루같이 생긴 그릇이 종종 발견되는데 쌀을 갈아 떡의 형태로 쪄 먹은 것이다. 박물관에서 시루를 보면 옛날에도 떡을 해 먹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오늘날 특별한 날 떡을 해 먹는 별식이라기보다는 쌀이나 잡곡을 가지고 요리를 해먹는 방법이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럼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알맹이 그대로의 밥은 언제부터 가능하였을까? 무쇠솥이 등장하는 시기로 잡을 수 있겠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왕 4년(서기 21)조에 솥 정(鼎)자와 밥 지을 취(炊)자가 처음 나온다.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鼎)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炊)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어 일군(一軍)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따라서 기원 전후해서 이미 솥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철기공업의 발달 정도로 봐서는 삼국시대 후반쯤에 무쇠솥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으로 지금과 같은 밥을 먹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절 같이 대규모의 취사를 하는 경우에는 솥의 크기도 커서 지금도 법주사에 남아 있는 신라 성덕왕 때 만들어진 솥은 높이 1.2m, 직경 2.7m, 둘레 10.8m의 거대한 쇠솥으로 3000 승도가 ‘한 솥밥 먹는 사이’였다고 한다.


솥은 단순히 밥을 짓는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정치나 제의에서 권위의 상징으로도 기능했다. 중국의 신화에서 황하의 치수를 잘했던 하나라의 우임금은 임금이 된 기념으로 9주(州)의 주목이 바친 놋쇠를 모아 아홉 개의 솥(구정 九鼎)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솥은 주나라에까지 전해지면서 종묘에 모셔져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나아가 구정은 중국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궁궐의 중요 건물 앞에 가면 종종 세발솥을 볼 수 있다. 가끔 향로로 오해 받기도하고, 가끔 쓰레기통으로 오해 받기도 하는데 당시대의 권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것이라니 절대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솥은 형벌에도 사용되었다. 고대 형벌에는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팽형이란 것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이 팽형이 가끔 이루어졌는데 주로 부패 관리를 처벌할 때 이 형벌을 사용했다. 실제 끓는 물에 넣었다기보다는 미지근한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명예형이었던 것이다. 죽지는 않았지만 체면 문화가 극도로 발달한 조선사회에서는 이미 죽은 자 취급을 받아 살아 있어도 죽은 자나 같은 사회적 대접을 받았다.


오늘날 부패혐의로 물러난 뒤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선거에 당선되는 요즘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지금 이 팽형제가 있다면 효과가 있을까? 잠시 눈감고 들어갔다 나오면 그만이지 않나 생각하는 건 나만이 아니겠지? 시대가 바뀌었다. 밥솥에 밥을 안치며 오늘 이 속에 들어갈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참고: 하원호, 2006, <밥과 솥> 한국역사연구회


윤지현 전문 기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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