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평전] 해월의 첫 사자후, 차별을 철폐하라
[해월 최시형 평전] 해월의 첫 사자후, 차별을 철폐하라
  •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학교 겸임교수
  • 승인 2018.03.0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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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상국서공헌순영세불망비. 부산 수영구의 백산허리길에 있다. 크기는 높이 104㎝, 너비 47㎝, 두께 12㎝이다. 이수(螭首)는 양쪽에 돌출된 소용돌이 모양 장식이 세 개씩 각각 달린 둥근 반원 형태이며, 꼭대기에는 보주가 있다. 이수의 전면에는 하트 모양의 틀을 음각하여 그 안에 양각으로 동그라미를 새겨 놓았다. >



조정의 명을 받아 수운을 참형시킨 서헌순은 목민관으로는 선정을 펼쳤다. 지난 1월 수운 최제우의 ‘피체로’(被逮路, 수운이 경주 용담에서 체포되어 과천까지 압송되었다가 다시 대구까지 내려온 길)를 탐방하기 위해 문경새재를 찾았다. 문경새재 제1관문에 있는 비석군을 살펴보니 조선 후기 관찰사 몇 명의 선정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헌순 직전과 직후 관찰사의 선정비는 있는데 유독 서헌순의 선정비가 없어서 궁금해졌다. 집에 돌아와 서헌순에 대해 검색해보니 경상도 일대에 네 개의 선정비가 있었다. 


첫째,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에 ‘관찰사서상국서헌순휼민영세불망비(觀察使徐相國徐憲淳恤民永世不忘碑)’가 있다. 서헌순이 중과세에 시달리는 양산 메기들 농민들을 위해 세금을 영구히 면제해주도록 호위영 대장 정원용, 심락정 양산군수 등과 함께 해결해주어 지역민들이 이들 세 명의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둘째, 밀양군 동헌 앞에 ‘순국상서공헌순영세불망비(巡國相徐公憲淳永世不忘碑)’가 있다. 이 비는 1865년 1월에 세워졌는데 그 연유는 ‘빚은 나누어 갚도록 하고 조창(漕倉)의 남용을 방지하는 절목(節目)을 만들어 백세(百世)토록 백성을 풍요롭게 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지역민들의 부채를 나누어서 갚도록 하고 조세의 횡포를 방지해준 공을 기리는 선정비이다. 셋째, 부산의 수영공원에도 ‘순국상서공헌순영세불망비(巡國相徐公憲淳永世不忘碑)’가 있다. 필자가 사는 인근에 있어서 지난달에 답사했지만 비가 안내된 비석군에서 없어 다시 확인해보니 수영강변의 백산허리길에 있었다. ‘폐정 혁파’를 기리는 선정비이다. 넷째, 부산 사하구 윤공단에 ‘순국상서공헌순만고불망비(巡國相徐公憲淳萬古不忘碑)’가 있다. 이 비는 다대진의 환곡 폐단을 시정해 준 보답으로 세운 선정비이다.


서헌순의 선정비가 이렇게 있는 것으로 봐서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했을 때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867년 암행어사로 경상도를 순찰한 박선수(朴瑄壽)는 서헌순에 대해 ‘판결을 내릴 때는 가끔 지연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반복적으로 고려하는 과정에서 너무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며, 고질적인 포흠(逋欠)에 대해서는 낱낱이 조사했는데 이것은 그의 주찰(周察)이 엄명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온 경내를 두루 살피자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감히 느슨해지지 못했다.’라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신중한 성격으로 직무에 충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이야기에 수운의 부친인 최옥공으로부터 배워 수운을 심문할 때 앞으로 동학을 하지 않겠다고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수운이 끝까지 거부해 어쩔 수 없이 중형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다고 한다. 


영덕 강수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해월은 영해를 거쳐 평해의 도인 황주일을 찾았다. 황주일은 반갑게 해월을 맞았으나 스승의 순도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였다. 해월은 황주일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며 기거할 곳을 부탁하자 그는 백방으로 힘을 써 해월이 은거할 곳을 주선해 주었다. 해월은 가족을 평해로 불러 나막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어서 이듬해인 1865년 1월에 울진의 죽변으로 거처를 옮겼다. 죽변은 작은 항구지만 울진에서 삼척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라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봄이 오자 인적이 드문 영양 용화동의 윗대티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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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티마을.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해월은 1865년 이곳으로 들어와 1871년 영해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있었다. 해월은 이곳에서 수운 사후 흩어졌던 교인을 수습하여 동학 교단 재건에 나섰다.>



영양의 용화동 윗대티는 해발 1219미터의 일월산 동쪽의 깊은 산중에 위치해 있다. 31번 국도를 타고 영양에서 봉화 방면으로 가다보면 아래대티에서 영양터널 들어가는 고개 직전에 위치한 도로변의 왼쪽 마을이 윗대티이다. 윗대티는 문암리에서 일월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마지막 마을이다. 지금은 국도변에 위치한 마을로 찾아가기가 쉽지만 예전에는 도로가 없는 오지 마을이었다. 필자가 윗대티에 처음 갔을 때도 31번 국도가 새로 건설되기 이전이었다. 용화리라는 이름은 아홉마리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이곳에 삼국시대에 용화사라는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자연치유생태마을로 제법 알려진 곳이지만 150여 년 전 이곳에서 동학의 제2세 교조 해월이 약 6년간 은거하며 수운의 순도 이후 위기에 빠진 동학의 재기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곳이었다. 즉, 해월의 제1기 동학도소(東學道所)가 있었다.  

  
윗대티는 봉화로 넘어가는 길목의 깊은 산중이라 관군이 추격해오는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피신하기가 용이한 곳이었다. 해월의 은거지는 대부분 긴급하게 피신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윗대티도 마찬가지다. 대티의 절구골은 경주 최씨들이 살고 있어서 해월은 쉽게 이곳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해월은 손재주가 좋아서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해월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자취를 감추었지만 암암리에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을 듣고 1865년 여름에 수운의 가족들이 윗대티로 찾아왔다. 수운의 사후 단양접주 민사엽의 도움으로 단양과 정선, 상주 등지에서 숨어살던 수운의 가족들은 갑자기 민사엽이 죽자 의지할 곳이 없어 고생하다 소문을 듣고 윗대티로 해월을 찾아왔다. 해월은 수운의 가족을 보고 가슴이 메어져 제대로 사연을 묻지도 못하고 우선 자신의 집을 내주고 아랫대티로 이사했다. 얼마 후 해월은 윗대티에 집을 지어 다시 이사와 수운의 가족을 보살폈다.


수운이 죽고 난 이후 동학 교단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수운과 함께 체포된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죽고, 일부는 귀양을 가고, 일부는 풀려났다. 수운이 죽자 많은 제자들이 교문을 떠났다. 남은 도인들끼리도 서로 아는 척하지 않고 왕래를 끊어 남 보듯이 하였다. 해월은 관의 지목을 피해 영양 일월산의 대티에서 몸을 숨겨 산옹(山翁)으로 살아가면서 남들이 보기에 평범한 농부에 지니지 않는 처신을 해서 위험에 노출될 염려는 없어졌다. 해월은 윗대티로 들어온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농사에만 전념했다.


1865년 가을에 접어들어 동학에 대한 탄압이 잦아들자 해월은 비로소 동학 교단의 재건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해월은 수운의 탄신일인 10월 28일에 우선 흩어진 도인들을 한 곳에 모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윗대티에 아직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가 아니어서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고심 끝에 해월은 자기가 살던 검등골에 도인을 모으기로 하였다. 용담 또한 지목이 심해 찾을 수 없었고 검등골은 경주 인근이며 그나마 지목이 심하지 않아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10월 28일 검등골에 수십 명의 도인들이 모였다. 수운 사후 흩어졌던 동학도인들이 처음으로 집결하였다. 해월은 그간 만나지 못했던 도인들과 반가운 정을 나누고 교단의 앞날을 위해 힘을 모으자고 서로를 격려하였다. 이 자리에서 스승인 수운의 뜻을 잇자고 하면서 제자들을 독려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 일성(一聲)은 차별 철폐, 즉 평등을 실현하자는 내용이었다. 1920년에 지은 <천도교서(天道敎書)>에 이날의 법설 요지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인(人)이 내천(乃天)이라. 고로 인(人)이 평등(平等)하여 차별(差別)이 없나니 인(人)이 인위(人爲)로써 귀천(貴賤)을 분(分)함은 한울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니라. 우리 도인(道人)들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토록 하여 스승님의 본뜻을 따르라.
 
해월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릴 때부터 동학에 입도하기 전 35년간 수많은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다 수운을 만나 시천주(侍天主)를 통해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 존엄한 존재이며,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운은 이를 실행하다 조선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참형을 당하였다. 해월은 스승인 수운의 길을 그대로 이어서 차별의 철폐, 곧 평등의 실현을 첫 법설(法說)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35년이라는 긴 기간 도바리 생활을 하였다. 해월이 강조한 차별의 철폐는 동학이 민중 속으로 확산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해월은 검곡행을 통해 흩어진 교인들을 수습하고 교단의 재건을 위한 실마리를 찾았다. 이후 해월과 수운의 가족이 일월산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문은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해월과 수운의 가족이 윗대티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상주의 제자들은 수운의 3년상을 벗는 1866년 3월 10일 윗대티를 찾아 수운의 종기년(終期年) 제사를 지냈다. 해월은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평등을 강조하는 법설을 하였다.


양반과 상놈의 차별을 차별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게 하는 일이오,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는 것은 집안을 망치는 일이니 우린 도인들은 앞으로 적서의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 도문에서는 일체 차별을 없애라.


해월의 평등에 대한 갈망은 도인들의 가슴 속으로 전해졌다. 해월의 이러한 강론은 조선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제의 폐해에 사무친 민중들은 동학의 차별 철폐에 대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을 실생활에 적용하며 구체적인 실천으로 생활화시켰다. 이러한 그의 차별 철폐의 노력으로 수운의 사후 위기를 맞았던 동학 교단은 서서히 교세를 회복해 나갔다.


수운의 가족들은 도움을 주던 민사엽의 사후 생계의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윗대티로 들어와 해월과 제자들의 도움으로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해월과 수운의 가족이 윗대티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제자들이 하나둘씩 윗대티로 모여들었다. 이때 윗대티로 이사 온 제자들은 전성문(全聖文), 김덕원(金德元), 정치겸(鄭治兼), 전윤오(全潤吾), 김성진(金成眞), 백현원(白玄元), 박황언(朴皇彦), 황재민(黃在民, 영양접주), 권성옥(權成玉), 김성길(金成吉), 김계악(金啓岳) 등 10여 호 이상이었다. 이렇게 윗대티는 조용히 동학마을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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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항. 울진에서 삼척 가는 길목의 항구.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해월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해월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 <개벽>에 해월이 가족과 바닷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 데 바로 죽변에서의 모습이었다.(사진 출처: 다음카페 울진청소년상담)>


1866년 8월에 강화도에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도를 학살하자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한 달 간 강화도를 점령했던 프랑스 군은 양헌수 부대의 정족산성 전투의 패배로 물러났다. 이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그 여파는 동학 교단에까지 미쳐 동학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이렇게 세상이 뒤숭숭해지자 윗대티를 찾아오는 도인의 수도 늘어났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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