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평전] 수운 최제우 가족의 수난
[해월 최시형 평전] 수운 최제우 가족의 수난
  •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학교 겸임교수
  • 승인 2018.04.0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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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간지. 영월 쪽의 노루목[장항(獐項)]과 영춘 노루너미[장현(獐峴)] 사이의 산밭이다. 수운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


해월은 박용걸의 도움으로 영월에서 위기를 모면했다. 1871년의 영해교조신원운동과 이필제의 문경봉기로 인한 두 번의 큰 위기를 모면한 해월은 그해 겨울을 참회와 기도로 보냈다. 그러면서 대인접물(待人接物)과 우・묵・눌(愚・黙・訥)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듬해인 1872년이 밝자 마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의 제례를 올렸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많은 제자들을 희생시켰고 교단도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을 뼈저리게 반성하였다. 그리고 해월은 소미원을 찾아 수운 가족을 보살폈다.


이후 해월은 겨울동안 자신을 보살펴준 박용걸의 형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순흥으로 갔다. 소수서원 근처에 있는 박용걸 형의 집에서 머물고 있던 1월 25일 임생(林生)이 급하게 찾아와 수운의 큰 아들 세정(世貞)이 양양관아의 포졸들에게 붙잡혔다고 알려주었다. 세정은 당시 동학도인 장춘보가 마련해준 인제군 귀둔리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1월 22일경에 체포되어 양양감옥에 수감되었다. 세정이 잡혀간 직후 귀둔리에서 같이 숨어있던 수운의 둘째 딸 최완(崔婉)과 세정의 처인 강릉 김씨는 인제 교졸에게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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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내 버스정류장. 화암 1리(그림바위)와 화암 2리(화암동굴) 사이에 있는 마을이 싸내다. 수운의 부인 박씨는 경주에서 피신해 영월, 단양 등지를 떠돌다 이곳 싸내에서 생을 마감했다. >


해월은 세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소미원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체되면 수운의 부인과 다른 가족들도 위기에 처할 것이 염려가 되어 걸음을 재촉했다. 해월은 수운의 부인과 딸들에게 남장을 시켜 밤이 되기를 기다려 박용걸의 집으로 향했다. 해월은 박용걸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운의 가족을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는 수운의 가족이 숨어 있을 곳을 찾아 나섰다. 해월과 영월, 정선 도인들은 영춘군 의풍의 깊은 산중인 장간지(獐間地)가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이곳으로 수운의 가족을 이주시켰다. 장간지는 영월 쪽의 노루목[장항(獐項)]과 영춘 노루너미[장현(獐峴)] 사이의 산밭이다. 노루목과 노루너미 사이에 있는 땅이라고 해서 노루 장(獐)자를 써서 장간지라 불렀다.


필자는 2007년 동료들과 함께 장간지를 찾으러 갔다가 고생한 기억이 있다. 지도를 들고 답사를 갔지만 장간지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맸다. 그래서 동학 사적지에 밝았던 표영삼 선생에게 여러 번 전화를 해서 물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몇 시간을 헤매다가 비포장 길을 타고 영춘으로 작은 고개를 넘어 가면서 차안에서 내려다보니 널찍한 산밭이 있어 혹시나 하면서 차를 세웠다. 고개에서 살펴보니 할머니 한 분이 밭에서 일을 하고 계셔서 물어볼 요량으로 찾아가니 옥수수를 심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이곳 이름이 무엇이냐고 여쭈니 장간지라고 해서 찾을 수 있었다. 표영삼 선생의 안내에도 제대로 찾지 못한 장간지를 동네 할머니 덕분에 찾을 수 있었다. 장간지는 움푹 들어간 계곡 사이에 약간 경사가 진 수백평의 밭이었다. 밭 가장자리에 네다섯 집의 터가 남아 있었고 큰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수운의 가족을 안전한 장간지로 피신시킨 후 해월은 3월 중순에 세청, 임생과 함께 세정의 옥사를 살피기 위해 양양으로 갔다. 양양에 잠입한 해월은 세정이 심문 중이어서 언제 판결이 날지 알 수 없다는 소식만 접했다. 해월은 세청과 함께 인제 남면 무의매리에 있는 세청의 처가를 방문했는데 세정의 소식을 접한 세청의 처가는 이미 피신을 가서 찾을 수 없었다. 해월이 근처 김병내(金秉鼐)의 집으로 가니 그는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신미년 거사의 여파로 세정이 체포되고 지목이 다시 일어나자 인제의 도인들은 피신을 떠나고 있었다. 해월은 숨을 곳을 찾는 김병내에게 정선 무은담의 유인상(劉寅常)에게 의지하자며 함께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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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인제 동면 귀둔리 마을 안내돌. 수운의 큰 아들 세정은 점봉산 아래 귀둔리에 숨어있다 양양의 교졸들에게 붙잡혀 곤장을 맞고 사망했다. >


해월이 인제 김병내의 집에 들렀을 때 김연국(金演局)이 동학에 입도했다. 그때가 1872년 3월말 경이었다. 이때 동학에 입도한 김연국은 해월을 지근거리에서 따랐다. 나중에 손병희, 손천민과 함께 해월의 수제자로 동학 교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해월이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해주자 불만을 품고, 손병희에게 출교당한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가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자 시천교로 들어갔다. 김연국은 이용구가 죽고 난 이후 신도안으로 내려가 상제교(上帝敎)를 만들었다.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영양 윗대티에서 도망친 해월은 임시로 박용걸의 집에 있었지만 언제까지 있을 수가 없어 정선의 유인상을 찾아 지낼만한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박용걸의 집은 농사철이 되자 사람들이 드나들어 은거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유인상은 해월에게 자신의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했다. 해월이 자신이 오래 머물면 사람의 눈에 띌까 염려된다고 하자 유인상은 설혹 알려지더라도 자신은 귀양살이가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해월에게 편안하게 자신의 집에 머물라고 권했다. 다행히 유인상의 집인 무은담은 정선읍내에서 떨어져 있고 개울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숨어있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해월이 유인상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때 비보가 날아들었다. 양양감옥에 수감되어 심문을 받던 세정이 곤장을 맞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같이 수감되었던 김덕중, 이일여, 최희경 등도 장형(杖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받고 원지(遠地)로 유배되었다. 조선왕조는 수운에 이어 수운의 아들 세정도 처형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수운의 부인 박씨는 온종일 통곡하였고 해월 또한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 해월은 두문불출하고 세정의 애통한 죽음을 위무하는 49일 기도를 했다. 49일 기도는 수운이 을묘천서 이후에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행했던 기도로 이후 동학 교단의 기도 기일로 자리 잡았다.


해월은 정선 유인상의 집에 머물면서 점차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특히 정선의 교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기초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해월은 이후 정선 교인들과 함께 동학교단을 재건하였다. 9월 들어 영춘 관아에서 장간지에 있는 수운의 부인을 지목한다는 정보가 정선으로 날아들었다. 해월은 강수와 함께 급히 장간지로 달려갔다. 정선 도인들은 정선 동면 싸내에 박씨부인이 기거할 집을 마련하였다. 당시의 곤궁했던 모습이 <도원기서>에 사실적으로 적혀 있다.

 

강수는 사모님을 모시고 아이들을 업고 앞서 나아갔다. 주인(해월을 지칭함)과 세청은 짐을 수습해 짊어지고 뒤를 따랐다. 아! 사모님의 신세가 이리도 측은할까. 사모님의 정상은 마음으로는 달리고 싶었으나 걷기가 힘들었다. 뒤돌아보며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걸었다. 골짜기를 건너면 쓰러지고 고개에 이르면 숨이 차서 걸음걸이는 더욱 느려졌다. 곁에서 이 모습을 보게 되면 차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그 자리에서 보게 되는 강수의 처지는 어떠했을까. 해는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걷기를 재촉하지만 치마를 짧게 걷어 올리고 걷는 데 힘을 다했으나 심하게 발이 부르텄다. 중도에서 소리 내어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였다. 하늘은 실로 무지하구나. 어째서 나를 통곡하게 하는가. 강수에게 이르기를 무은담은 어디 있는가. 대답하기를 산을 따라 물을 따라 이른다고 하였다. 겨우 이끌어 유인상의 집에 이르렀다. <도원기서, 임신년조>

    

박씨부인은 힘든 걸음에 탈진하여 3일 동안 유인상의 집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겨우 몸을 추스른 박씨부인은 정선 동면의 싸내마을로 갔다. 싸내는 정선에서 화암동굴을 지나 화암면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마을이다. 안타까운 것은 박씨부인이 기거했던 집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표영삼 선생을 비롯한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여러 차례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필자도 몇 차례 싸내를 찾았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해월은 수운 가족을 안정시킨 후 조용한 곳을 찾아 기도하려고 마음먹었다. 영해교조신원운동 이후 잇달아 발생하는 어려움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해월은 스승인 수운의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 해월이 기댈 수 있는 것은 한울님밖에 없었다. 정선 도인들은 정암사(淨巖寺)의 암자인 적조암(寂照庵)이 기도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추천해 주었다. 적조암은 정암사에서 화방재 방면으로 약 5㎞ 가면 고한읍 체육공원 시작되는 지점의 적조암 입구 팻말을 따라 함백산 방면으로 약 1㎞를 걸어 올라가면 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는데 스님 한분이 절터 옆에 임시건물을 지어놓고 기거하고 있다.


해월은 강수, 유인상, 김해성, 김택진 등과 함께 10월 15일 적조암으로 올랐다. 암자의 스님은 철수좌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문 수행에 들어갔다. 49일 동안 해월은 주문 수행에 매진했다. 동학의 수행법은 주문수행이 기본이었다.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의 21자 주문을 소리를 내어서 읽기도 하고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외운다. 의암 손병희는 동학에 입도하고 3년간 매일 주문을 3만 번 외웠다고 말했다. 3만 번 외우는 데 20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주문을 외우면서 잡념을 제거하고 정신을 통일해 우주의 기운이 지기와 혼연일체가 되기 위해 집중한다.


해월은 태백산중의 적조암에서 주문 수행에 집중했다. 철수좌가 해월 일행의 주문소리에 감화되어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월은 깊은 경지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해월은 12월 5일 49일 기도를 마치고 강시(降詩) 한 수를 받았다.

 

太白山工四十九(태백산공사십구) 태백산에서 49일 공부를 하고

受我鳳八各主定(수아봉팔각주정) 내가 봉황 여덟 마리를 받아 각각 주인을 정하니,

天宜峰上開花天(천의봉상개화천) 천의봉 위에 꽃핀 하늘이요,

今日琢磨五絃琴(금일탁마오현금) 오늘 오현금을 갈고 닦아

寂滅宮殿脫塵世(적멸궁전탈진세) 적멸궁전에서 티끌세상을 벗어나고.

 

해월이 기도를 마치고 유인상의 집에 돌아오자마자 정선 싸내의 박씨부인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해월은 김계악과 함께 싸내로 가서 박씨부인의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했다. 수운의 순도 이후 이곳저곳 떠돌면서 피신하던 박씨 부인은 결국 곤궁을 이기지 못하고 49세를 일기로 힘든 생을 마감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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