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연재-울산의 적폐들] 일제 50만 공업도시 울산 계획
[구술 연재-울산의 적폐들] 일제 50만 공업도시 울산 계획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8.04.2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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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이 공업도시로 개발된 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5년 12월 16일 동해남부선 부산~울산간 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이날 옛 성남동 울산역사는 학산동 새 울산역으로 옮겨왔다. 앞서 1928년 삼산평야에 울산비행장이 들어섰고 1931년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승격했다.


1938년 일본인 이케다 스케타다는 조선총독부에 울산공업지대 조성계획을 제출했다. 울산만의 공유수면을 매립해 180만5300평의 병참기지용 공업지대를 조성하고 인구 50만의 공업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울산 땅값은 다섯 배 껑충 뛰었다. 한삼건 울산대 교수에 따르면 1938년 무렵부터 일간지에 ‘평당 몇십 전에 불과하던 땅이 하룻밤 사이에 몇 배가 올랐다’, ‘졸부 된 자가 다수’, ‘토지 브로커를 단속하라’와 같이 오늘날의 개발 바람과 다르지 않은 내용이 신문지상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이케다는 울산과 야마구치현 유아만을 잇는 제2관부연락선 계획도 수립했다. 1943년 5월 11일 학성공원에서 울산공업도시 개발을 위한 기공식이 열렸다.


1944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고사동 일대 15만평의 공장부지를 매입해 원산에 있던 조선석유주식회사의 일부 시설을 울산으로 옮기려 했다. 연간 20만톤의 정유능력을 갖춘 울산공장은 착공 뒤 공정 70%까지 진행됐지만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건설이 중단됐다.


한삼건 교수는 “당시 신문지상에 토지보상비만 500만원이라고 나오는데 인구 8만명인 작은 동네 대현면에 지금 돈으로 5000억원을 뿌린 걸 보면 브로커도 암약하고 굉장히 흥청거렸을 것”이라며 “일본인 중에서 여천 매암동 배 과수원 하던 이가 많아 엄청난 보상금을 받았을 것이고, 대현면에서 집성촌을 이뤄 살았던 토박이 땅 부자들도 혜택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대현면에는 부곡동 심씨와 여천 박씨 집성촌이 있었다. 공단 개발에 따른 첫 강제 이주가 이뤄진 것도 이때였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계획대로 일본이 패전하기 전 울산에 정유공장과 석유비축기지가 들어서고 제2관부연락선 바닷길이 열렸다면 울산은 일본군 7만명이 집결해 있던 제주와 더불어 미국의 폭격 타깃이 될 수도 있었다. 제주도에는 가미가제 같은 가이텐 자살 특공대가 해안 곳곳에 인공동굴을 뚫고 어뢰와 폭탄을 실은 소형보트를 숨기고 있었다. 가이텐 자살 특공대의 1인용 돌격 보트는 방어진철공조선주식회사에서 만들었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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