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평전] 강원도 인제에서 한문 경전 [동경대전] 간행
[해월 최시형 평전] 강원도 인제에서 한문 경전 [동경대전] 간행
  •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05.09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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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생주문집>.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선생주문집이다. 이 문집은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수운의 일대기만 떼어내서 만든 것이다. 현재 두 가지 본이 전해지고 있다.



수운의 일대기만 공개


해월은 수운이 동학을 창도한 이후 20년간의 초기 동학의 역사를 <최선생문집도원기서>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정선 도인들의 도움이 컸다. 해월은 정선 도인들의 고마움을 <도원기서>에서 “장하고 아름답구나, 정선도인이여, 신미년(辛未年, 영해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던 1871년) 이래로부터 오늘(1879년-필자 주)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결 같이 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즉 선생의 도를 닦은 자 어찌 성덕의 운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기록했다. 대표적인 정선 도인들로는 유시헌, 방시학, 전세인, 홍석범, 김해성 등이 있었다. 정선 도인들은 학식도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 여유도 있어 해월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해월은 <도원기서> 전체를 공개할 수 없었지만 앞부분의 수운의 일대기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보고 이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전했다. 현재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이라 이름 붙여진 책이 이것이다. 현재 <대선생주문집>은 두 가지가 전하는데 하나는 천도교단에서 소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규장각(奎章閣)의 관몰문서인 <동학서(東學書)>에 수록된 <운수재문집(雲水齋文集)>인데 운수(雲水)는 수운(水雲)의 오기이다. 천도교 소장본은 수운의 둘째 사위인 허찬이 필사한 것을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가 천도교단에 기증했다. 규장각의 <운수재문집>은 평남 용강군의 임중칠(林仲七)이 상주에 와서 해월을 만나보고 필사한 것을 1900년에 재필사한 것이다. 두 판본은 내용이 크게 차이가 없으나 <운수재문집>이 조금 더 자세하다. 한글본 <대선생주문집>도 있는데 황토현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인제 갑둔리에서 경전 간행하기로


1880년 4월 5일에 해월은 처음으로 동학의 창도기념제례를 거행했다. 그때까지 해월은 10월 18일의 수운 탄신제와 3월 10일의 순도제만 지냈고 창도기념제례는 거행하지 않았다. 해월은 인등제를 시행하면서 창도기념제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창도 20년만인 1880년 처음으로 기념제례를 거행했다. 당시 해월은 창도기념제례를 각 접에서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시행된 수운의 창도기념제례는 제3세 교조 의암에 의해 천일기념일(天日記念日)로 이름이 바뀌어 천도교단의 제일 큰 기념일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운의 행적과 동학의 수난사를 정리한 해월은 곧바로 동학 경전 판각 작업에 나섰다. 현실적으로 경전 간행은 교세가 신장되어 경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학의 교세는 강원도의 영월, 인제, 정선, 그리고 충청도 단양, 경상도 상주, 청송 등을 중심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늘어나는 도인들이 경전을 요구하자 붓으로 쓰는 필사(筆寫)는 한계가 있었다. 경전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자 해월은 목판본을 만들어 경전을 대량으로 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젊은 시절 해월은 10여 년간 제지소에서 종이를 만들어 인쇄 과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서 수운이 살아있을 때 해월에게 자신의 경편들을 간행해달라고 부탁했었다.


<도원기서>를 갈무리한 해월은 1880년 4월 하순에 본격적으로 경전 간행 작업에 돌입했다. 경전 간행에 필요한 경비는 각 접에서는 나누어 마련했는데 경상북도 상주의 윤하성이 40금(金), 정선접에서 35민(緡, 돈꾸러미), 인제접에서 130금(金), 청송접에서 6민(緡)을 염출했다. 이렇게 자금이 마련되자 각판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해월은 5월 9일 경전을 만들 각판소(刻版所)를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김현수(金顯洙)의 집에 설치하고 11일부터 본격적으로 각판에 착수했다.


인제군 갑둔리는 홍천에서 인제 방향으로 가는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 신남을 조금 못 미쳐 있는 다물교차로에서 446번 국로로 빠져나와 상남 방향으로 난 고갯길을 약 5㎞ 가면 나타난다. 갑둔리는 인제관아와 홍천관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관의 지목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응봉산록에 위치한 갑둔리는 첩첩산중으로 인적이 드물어 다른 사람의 왕래가 없어 조용히 각판 작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갑둔리에는 김현수를 포함해 동학도인들이 많아서 수십 명이 모여서 작업을 해도 비밀이 보장됐다. 외진 곳이면서도 동학도인들이 많았던 갑둔리는 해월이 위기에 처하면 들어와서 피신하는 은신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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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갑둔리 김현수의 집터. 해월이 최초로 <동경대전>을 간행한 곳으로 2016년 10월에 강원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신인간)



강원도에서는 2016년 10월 <동경대전>을 간행한 갑둔리 김현호의 집터(갑둔리 351, 375번지)를 ‘동경대전 간행터’라 명명하고 강원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했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 갑둔리는 군 작전구역이어서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돼 출입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군 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갑둔리와 이어진 마을이 성황거리인데 이곳의 이명수의 집에서 해월은 “저 새 소리도 한울님의 소리이다.”라는 유명한 법설(法說)을 하였다. 갑둔리를 지나면 김부리인데 이 지명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김부(金傅)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곳에는 경순왕의 사당인 대왕각(大王閣)이 있다. 


갑둔리 김현수의 집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있어서 수십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생활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많은 물이 필요한 판각 작업을 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5월 11일에 시작한 판각 작업은 해월이 직접 주관했다. 각판 작업에 참여한 인원은 해월을 포함해 30명이었다. 해월은 이들에게 각각 역할을 맡겨 일사분란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여기에는 해월이 청년기 제지소에서 일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한 달 만에 <동경대전> 완성


해월이 주도한 경전 판각 작업은 간행을 시작한지 한 달 만에 마무리됐다. 6월 14일 해월은 드디어 목판본 <동경대전(東經大全)> 100부를 완성했다. 다음날인 15일 해월은 경전 간행을 스승에게 고하는 봉고(奉告) 제례를 올렸다. <도원기서>의 마지막에서 해월의 경전 간행에 대한 소감과 공헌한 이들의 ‘별공록(別功錄)’이 적혀 있다.   


아. 선생(先生, 수운을 가리킴)의 문집(文集)을 판각해서 만들려고 한지 오랜 세월이 이미 지났다. 이제 경신년(庚申年, 1880)을 맞아 강시원(姜時元)?전시황(全時晄) 및 여러분과 더불어 장차 판각을 간행하려고 발론(發論)하였다. 각 접중에서는 다행히 한가지로 나와 의논하여 각소(刻所)를 인제 갑둔리에 정하였다. 뜻한 대로 일을 마치니 비로소 능히 책으로 만들어 선생의 도와 덕을 분명하게 하였다. 이 어찌 흠탄(欽歎)하지 않겠는가. 각 접중에서 비용을 성출(誠出)한 이들에게 특별히 별록(別錄)을 만들어 그 공을 차례대로 기록한다. 경신년 중하(中夏) 도주(道主) 최시형(崔時亨)이 삼가 기록한다.   


해월은 수운이 지은 경편을 책으로 엮어내어 비로소 스승의 도와 덕을 분명하게 밝히게 되었다고 경전 편찬의 의의를 밝혔다. 목판본 <동경대전> 인쇄는 동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다. <동경대전>의 간행은 첫째, 뒤이어 수운의 한글 경전인 <용담유사>의 간행과 수차의 경전 간행을 가능하게 했다. 수운은 특별히 경전을 한문과 한글 두 가지로 만들었는데 <동경대전> 간행이 성공함으로써 한글 경전의 간행도 촉발시켜 이듬해인 1881년에 이를 간행했다. 이후 경전 간행은 수차 이루어졌는데 이는 갑둔리에서의 성공에서 비롯됐다. 둘째, 경전 간행을 통해 도인들이 동학의 교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전까지 경전은 필사를 통해 소규모로 전해졌지만 오탈자가 많았다. 그리고 경전의 수가 적어 해월이나 교단 지도부가 직접 각지를 다니면서 동학의 교의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전의 대량 간행으로 도인들이 쉽게 경전을 접할 수 있게 됐고 기본적인 교의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경전의 간행은 도인들의 신앙심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넷째, 동학이 확산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식자층은 <동경대전>을 통해 동학의 교의를 이해할 수 있었고, 부녀자들과 한글 해독자들은 <용담유사>를 통해 동학을 접하게 되었다. 즉 민중들이 쉽게 동학 경전을 통해 동학을 이해했고 이는 교세의 확장으로 연결됐다. 1880년대 중반부터 삼남 일대에서 동학의 교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여기에는 경전 간행이 기반이 되었다. 경전 편찬은 도인들에게는 자부심이 되었고, 식자층에게는 동학에 대한 인식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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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 간행 기록화. 2003년 경주동학문화축제에 출품됐던 작품으로 해월의 경전 간행 모습을 그렸다. 



경진판은 현재 전하지 않아


해월이 이때 간행한 경전은 출판한 해인 1880년의 간지를 붙여 경진판 <동경대전>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해월은 이후 몇 차례 <동경대전>을 더 간행했기 때문이다. 해월이 간행한 <동경대전>은 경진판 이외에 계미중춘판(1883년 봄), 계미중하판(1883년 가을), 무자계춘판(1888년) 등이 있는데 각각 간행한 간지를 붙여 부른다. 1880년대에는 총 네 차례 경전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해월이 최초로 간행한 1880년 간행한 경진판 <동경대전>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최근에 윤석산 교수가 경진판으로 추정되는 판본을 발견해서 소개했지만 아직 검증 중에 있다.


1883년 여름에 간행된 계미중하판을 보면 <동경대전>은 크게 경문(經文), 시문(詩文), 통문(通文)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경문(經文)은 수운이 신비한 종교체험을 통해 깨달은 천덕(天德)을 이 세상에 펴는 이유를 밝힌 ‘포덕문(布德文)’, 동학의 교의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논학문(論學文)’, 동학의 수행 방법을 밝힌 ‘수덕문(修德文)’, 인식 가능의 세계인 기연(其然)과 인식 불능의 세계인 불연(不然)을 통해 궁극적 실재가 무엇인지 묻는 동학적 사유체계인 ‘불연기연(不然其然)’의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은 시문(詩文)으로 ‘축문(祝文)’, ‘주문(呪文)’, 입춘(立春)시(詩), 절구(絶句), 강시(降詩), 화결시(和訣詩),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등 각종 시문으로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수운이 도인들에게 각종 소식을 전한 ‘통문(通文)’과 각종 의식이 정리되어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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