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평전] 한글 경전 [용담유사]도 간행
[해월 최시형 평전] 한글 경전 [용담유사]도 간행
  •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 승인 2018.05.1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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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 대강면 남천리의 용담유사 간행지 기념비. 기념비는 해월이 순도한 지 100년이 지난 1998년 3월 27일 천도교중앙총부와 해월신사순도백주년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건립했다.



<동경대전>은 민족의 경전


1880년은 동학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해였다. 우선 초기 동학의 역사를 기록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가 정리됐다. 다음으로 수운이 동학을 창도한 후 지었던 경전 가운데 한문경전인 <동경대전>이 목판본으로 간행됐다. 또 창도 20년 만에 수운의 창도일인 4월 5일에 창도기념제례를 거행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해월을 중심으로 동학교단은 체계화되었고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관의 지목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월은 여전히 은밀하게 동학을 전파할 수밖에 없었다.


<동경대전> 간행은 수운이 염원했던 일이었기에 해월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제자로서 도리를 다했다는 점에서는 기뻤지만 수운이 살아있을 때 간행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경전의 간행은 지식인들의 동학에 대한 인식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문(文)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문서로 동학의 교의를 간행했다는 것은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동학을 이단으로만 비난하던 유학자들도 경전을 보고 동학에 입도하는 자가 늘어났다.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김동민 교수는 동학의 <동경대전>이 갖은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동학은 동양의 유불선과 서학을 아우르는 큰 가르침이다. 배타적 신을 앞세워 다른 믿음을 악으로 규정하고 핍박하는 따위의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동학은 신을 믿는 종교(religion)가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는 으뜸가는 가르침[종교(宗敎)]다. …… 성경을 읽고 불경을 외우듯이 <동경대전>을 한번쯤 읽어야 조선민족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동학과 다른 종교는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동학을 필요로 했던 그 시절처럼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지금도 마음을 닦고 기를 바르게 하여[수심정기(修心正氣)] 국가폭력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제하는[제폭구민(除暴救民)] 데 필수불가결의 각성제가 될 것이다.(공무원신문, 2014년 7월 16일)


김동민 교수의 말처럼 <동경대전>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 고스라니 담겨있는 우리 민족의 경전이다.
 
단양 샘골 여규덕의 집에서 <용담유사(龍潭遺詞)> 간행


해월은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나서 살펴보니 미진한 면이 보였다. 짧은 기간에 급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완벽하지 못했다. <동경대전> 간행은 30명이 한 달간 합숙하면서 만들었는데 갑둔리가 아무리 인적이 드문 장소라고해도 오래 머무르면 관의 지목을 받을 염려가 있어서 서둘 수밖에 없었다. 또 판각을 하는 기술자들은 동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판각 과정에서 잘못된 글자와 일부 빠진 글자도 있었다. 또 수운의 경편 가운데 일부 수록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동경대전>의 간행이 만족스럽지 않자 해월은 다시 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해월은 지목을 피해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 개간소를 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경대전> 수정본의 간행에 앞서 수운이 지은 또 다른 경전인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기로 했다. 수운은 특이하게 경전을 한문과 한글 두 가지로 만들었다. 한문 경전은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했고, 한글 경전은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했다. 수운은 동학이 지식인뿐 아니라 민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경전을 만들었다. <용담유사>를 저작했다는 점에서 동학은 민중의 종교임을 알 수 있다.


해월은 여러 곳을 물색하다 단양 샘골에 경전 간행소를 차렸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881) 6월에 (해월)신사가 대신사께서 지으신 가사(歌詞)를 발간하사 반포하시니 이때의 개간소(開刊所)는 단양군(丹陽郡) 남면(南面) 천동(泉洞) 여규덕(呂圭德)의 집이었다.


샘골은 송두둑에 있는 해월의 집에서 예천 방향으로 약 2㎞ 더 가다가 왼쪽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나타난다. 샘골의 현재 지명은 남천리(南泉里)로 바뀌었는데 그 연유는 영춘이 단양에 통합되면서 샘골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이 있어 대강면의 샘골은 남천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샘골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가 되는 도솔봉(兜率峰, 1342m) 북쪽의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샘골을 수차례 방문했던 표영삼은 원로들에게 <용담유사>를 간행한 여규덕의 집에 대해 물었으나 각각 기억이 달라 원로들이 일러준 곳들을 다 둘러본 후 경전 간행소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마을의 개울이 합치는 곳에 위치한 사랑채가 있는 집을 여규덕의 집이라고 추정했다. 현재 이곳은 일부는 한옥이 남아 있지만 사람은 살고 있지 않다. 샘골의 입구로 들어서서 고갯길을 조금 오르면 1998년 천도교에서 해월의 순도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운 ‘천도교경전 용담유사 간행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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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대전> 포덕문(布德文) 부분. 수운이 지은 한문 경전이다. 이 판본은 1883년의 계미중하판이다. <동경대전>의 판본 가운데 글자가 가장 잘 제작됐다. 



<용담유사>는 노랫말 형식 


해월은 샘골에서 <용담유사> 수백 권을 간행했다. 당시 김연국이 <용담유사> 간행에 참여했는데 그에 의하면 비용은 인제접에서 부담했다고 한다. 한글 경전인 <용담유사>는 3?4조와 4?4조의 노랫말 형식으로 되어 있다. 노랫말로 써진 <용담유사>는 민중들이 쉽게 동학에 빠져들게 했다. 김춘성 전 부산예술대학교 교수는 <용담유사>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수운의 관심은 통치자나 지배계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왈이자질(曰而子姪) 아이들아 경수차서(敬受此書) 하였어라”, “현숙한 내집부녀 이글보고 안심하소”, “현숙한 모든 벗은 차차차차 경계해서 안심안도 하여주소” 등 대중을 향하고 있다. 따라서 <용담유사>는 대중을 위한 글이며 생활을 통한 가르침이다. <용담유사>는 대중을 지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 생활을 통하여 보편적 진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특히 추상적?보편적 가치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이 존중되는 현대 사회에서 볼 때 이런 지향은 매우 선구적인 모습인 것이다.(김춘성, <용담유사>의 철학적 고찰)


<용담유사>는 민중들이 생활 속에서 동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시천주의 개념, 마음을 공부하는 동학의 수양법, 다시개벽의 시운관 등 동학의 교의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즉, <용담유사>는 동학을 통해 만민평등을 실현하고 만인의 군자화를 추구하는 내용을 노랫말로 표현했다. 많은 부수는 아니지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간행으로 도인들은 쉽게 경전에 접근할 수 있었다. 경전을 접한 도인들은 대부분 그 내용을 외웠다. 특히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옆에서 읽어주는 <용담유사>를 듣고 외우는 도인들이 생겼다. 


여규덕은 몽양 여운형의 종조부(從祖父)    


<용담유사>의 개간소를 열었던 여규덕은 조선건국동맹을 이끌었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종조부(從祖父)다. 여운형이 태어나기 전해인 1885년 여주와 원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증조부 여장섭은 가족을 데리고 샘골의 여규덕의 집으로 피난 왔다. 당시 운형의 어머니 이씨가 운형을 임신하고 있었는데 태몽으로 해를 보았다고 하자, 할아버지 여규신(呂圭信)이 운형의 호를 ‘몽양(夢陽)’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운형의 가족은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곳 샘골로 피난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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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유사> 교훈가 부분. 이 판본은 계사년인 1983년 간행본이다. <용담유사>는 가사체 노랫말로 이루어져 있어서 민중들이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여운형의 조부인 여규신은 해월의 제자로 왕성하게 동학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운형의 작은 아버지 여승현(呂升鉉)도 일찍이 동학에 입도해 동학혁명 당시 도사(道使)라는 직책으로 충청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시형이 지은 <여운형평전>에는 운형과 동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간 반봉건.반제 투쟁의 대중적 무장봉기인 갑오농민혁명(1894~1895)이 일어나자 운형의 조부 형제와 부친 형제가 모두 동학에 가담하여 싸웠다. 숙부 여승현(呂升鉉)은 도사(道使)가 되어 충청.강원 양도에서 관군과 맞서 싸웠다. 이때 그는 한양의 악질지수인 민 모(閔某) 집에 쳐들어가 격한 목소리로 호통치며 주인 영감을 혼쭐을 내준 일이 있었다. (이기형, <여운형평전>, 45~6쪽)


여운형은 비록 어릴 적이지만 할아버지의 동학에서 배운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중원정벌’에 대한 실천 활동은 뒷날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할아버지 여규신의 북벌론은 황당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주고 국제적인 감각을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운형은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조부께서는 흔히 맏손자 되는 나를 불러 세우고 중국과 조선의 근세사를 말씀하여주시며, 또 북정(北征)의 경륜이 결코 그릇된 국책이 아니란 말씀을 늘 들려주셨다. 십여 세밖에 아니 된 나이 어린 내가 그때에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었으랴만은 중국과 조선의 관계가 심절(深切)하여 어쨌든 중국에 대한 경륜이 막연하게나마 내 가슴에 떠올랐다. 이리하여 나는 조부의 감화로 이 산골구석에 묻혀 있을 때가 아니란 자각을 얻고 앞서 말한 고향 양평을 떠난 것이 열아홉 살 때였다.(<삼천리>, 1933년 9월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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