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연재-울산의 적폐들] 1962년 울산공업센터 기공
[구술 연재-울산의 적폐들] 1962년 울산공업센터 기공
  • 정리=이종호, 이채훈 기자
  • 승인 2018.05.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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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2월 3일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렸다. 대현면 일대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은 대대로 일궈온 논밭과 조상의 묘소까지 국가에 바치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원산에 있던 조석석유공장을 울산 대현면 고사동 일대에 옮기면서 첫 이주를 겪었던 고사동 주민들은 이번이 두 번째 강제이주였다.


한삼건 울산대 교수에게 울산공업센터 건설에 얽힌 비화를 들었다.
“소련 침공으로 원산에서 조선석유가 이전하고 해방 전까지 70퍼센트 정도 공사 중이었는데 지금 장생포초등학교 부지도 당시 직원 사택이나 복지시설이었을 걸로 추측된다. 1942년 울산항 옆에 철도가 부설된다. 지금 에스케이 안 장생포역 자리에도 철도는 깔려 있지만 준공은 안 됐던 것 같다. 1952년 관보에 보면 전란 중에 준공해 유류보급창에서 미군이 쓴 것으로 보인다.


1953년 삼양사가 울산에 온 것도 일제 때 세워져 진척된 공단 개발 플랜 때문이다. 바로 옆에 울산항역이 있었고 이런 항만과 철도 때문에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이 됐다.


일제가 남긴 적산토지를 정부가 그대로 갖고 있었던 것도 울산에 공업단지를 조성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매암동, 여천동, 고사동 일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였거나 조선석유주식회사 소유 땅이 토지대장만 분석했을 때 109만 평이었다. 임야는 더욱 커서 500만 평으로 추측된다. 토지공급은 양찬우 육군소장이 경남도지사가 돼서 했다. 건설부장관도 육군 소장, 울산특별건설국장이 공병 준장, 박정희 의장이 별 네 개, 이렇게 별들이 울산을 개발했다. 경남도에 계획서를 제출하고 민간이 토지를 달라고 하면 심의 절차를 거쳐서 줬다. 1963년 신문 기사를 보면 서로 땅을 많이 가져가려고 해서 불과 몇 달만에 땅값이 두배 세배 뛰었다. 120호 남짓 사는 영남화학 사택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홈플러스, 신선여고, 용연초 등등 학교들이 들어오고 동부아파트 들어오고 한 걸 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땅이었다.


혁명공약을 내걸고 빨리 실현시켜야 하는 박정희 군정 입장에서는 울산이 항만 철도 인프라가 다 돼있고 수백만 평 되는 적산토지도 매매 절차 없이 공급할 수 있어서 눈 여겨 봤을 것이다. 1963년 에스케이 공장 지을 때 이장님 인터뷰가 ‘우리는 일제 때 강제이주 한 번 하고 국유지 적산토지에서 농사짓고 나가라면 바로 나가는데 일거리라도 얻을 수 있게 해달라’는 수준이었다. 일본에 의해 검증된 개발계획에 항만 철도 조건도 좋고 울산이 공업화에 드는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가장 좋은 곳이었다.”(계속)


정리=이종호, 이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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