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강과 만나는 하얀 모래밭에 찍힌 수 많은 발자국들

울산저널 / 기사승인 : 2019-07-12 0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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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쓰는 자연 이야기
▲ 낙동강 모래밭에 깨알 같은 발자국들, 강변 모래밭은 단지 ‘사모래’가 아니라 다양한 생물종들의 서식처다. ⓒ이동고 기자


낙동강 걷기는 제자리를 맴도는 듯했다. 적포삼거리에 도착한 것이 언제인데 다시 적포삼거다. 하지만 오늘은 출발점이다. 우리는 우포늪을 둘러보러 잠시 낙동강 올라가기를 멈췄다.
이제 갈수록 날씨가 겁난다. 낙동강 걷기에서 가장 적은 6명이 모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동무들은 며칠 더웠던 날씨에 놀랐는지 걷기 여정이 너무 덥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친다. 다행이 구름이 많은 날이고 강바람도 있어 크게 걱정할 날씨는 아니었다.

 

오늘은 적포삼거리에서 청덕교, 합천창녕보를 거쳐 곽재우 묘소를 지나 이노정을 가는 여정이다. 적포삼거리를 지나 한 20분쯤 걸었을까? 저 강 풍경의 소실점에 합천창녕보가 가물거리며 보인다. 눈에 보이지만 잠시 돌아간다 해도 8km를 걸어야 한다는데 믿기지 않는다. 적포리가 끝나는 곳에 황강이 낙동강과 만난다. 경상남도 거창군 고재면 삼봉산(三峰山, 1254m)에서 발원해 거창군과 합천군을 흘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이고 길이가 111㎞다. 내 고향 합천면 자지리 마을을 지나온 강물이다.


네 살 때 도시로 나온 나에게 방학 때마다 만나는 고향은 경이로운 장소였다. 온몸으로 뛰어놀던 자연이었다. 개울에 둑 만들고 물을 퍼 물고기를 잡았고 철사를 구부려 밥알로 중태기를 낚았다. 마을 우물은 산에서 내려온 물이 용출되는 장소로 두레박 없이 그냥 박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는 곳이었다. 합천 읍내를 지나는 지금 황강 모래밭은 벌초를 끝내고 가족이 같이 휴식을 취하는 여백의 공간이다. 황강의 모래는 풍부한 만큼 누구나 눈독을 들이는 귀한 것이었다. 대병면 창리에 합천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더욱 맑은 물이 흘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꽤나 물이 상했다. 그 넓은 백사장과 모래로도 정화되지 않은 물들은 바로 고여 있는 물이다.


황강을 가로지르는 청덕교를 지나 이제 저 멀리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합천창녕보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둑방길로만 걷는 무료함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강변 백사장으로 내려갔다. 하얀 모래에는 다양한 흔적이 보였다. 크고 작은 새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왜가리 같은 큰 발자국도 있었지만 종다리 같은 작은 발자국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리류가 한없이 뒤뚱거리며 걷는 것은 일직선의 보폭으로 정갈하게 나아가기 위한 나름의 걷는 원칙이었다고 생각했다. 간혹 고라니 똥도 보였다. 모래밭은 사람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생명체들의 삶의 공간이지 단순히 ‘사모래’가 아니었다. 뜨거운 햇빛과 바람은 모래밭 풀들을 말리고 다시 바람은 뿌리를 정점으로 하는 여러 동심원들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의 모래밭 발자국처럼 존재들은 모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가까이 차양텐트를 치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 이곳 모래사장은 그대로 어릴 적 고향 마을의 기억처럼 원시성을 가지고 있었다.


창녕합천보를 건너 보 관리소에 들어서니 매점 하나 운영하지 못하고 파리를 날리고 있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산토끼 동요가 만들어졌다는 창녕군 이방면 면사무소 까지 들어거 꽤 유명하다는 중국집 짜장면을 먹었다. 오후 3시가 넘은 점심. 모두 배도 곯았던 터라 최고의 맛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다시 돌아와 올라갈 길은 가파른 산길. 배는 든든히 채워 더 오르기 힘든 길이었다. 냄새나는 축사에 갇힌 소들과 잠시 눈이 맞는다.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처지다. 산길 내리막에 나무에 달린 미처 따지 못한 자두 몇 개로 지친 정신이 번쩍 들얶다. 강변이 편안하게 내려다보이는 무심사에서 공양보살에게 냉커피를 대접받고는 ‘딱 맞는 보시’가 갖는 고마움을 목젖 가득히 느꼈다. 이제 강둑길은 대구 달성군으로 길고 긴 강둑길이다. 건너편은 고령 땅이다. 강변 습지는 말라 죽은 버드나무들로 원시 늪처럼 스산하다. 말라죽은 나무들이 파란색 물총새들 집이 되고 있었다. 자연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


이제 곽재우 장군 묘역 앞에 다달았다. 무능한 선조는 전선이 무너지자 줄행랑을 쳤고 이순신이나 곽재우 같은 용맹한 장군이 전공을 세우는 것은 더 불안했다. 사후에 <곽재우전>이라는 영웅소설이 나온 걸로 짐작할 수 있듯이 곽재우는 의병장으로서 관군과 비교되며 빼어난 지략으로 임금보다 더한 민심을 얻었을 것이다. 이 같은 민심은 자칫 ‘역모’라는 모함에 걸려 바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극약이 될 수도 있었다. 곽재우 장군이 숨어 살기로 한 계기가 이순신 장군의 투옥과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1567~1596년)의 옥사로 알려진 만큼 그의 말로는 슬펐다.

곽재우 장군과 정부인 상산김씨 합장묘가 대구 달성군 구지면 언덕을 올라가는 한쪽 면에 모셔져 있다. 이 묘역은 장군의 증조부인 곽위로부터 아래로 5대에 이르는 현풍곽씨 문중의 선영이다. 17세기 전반기만 해도 장묘문화는 상하 위계가 강하지 않았는데 모르는 이는 역장(逆葬)이라고 말이 많다. 다시 걸어 이노정(二老亭)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7시를 넘었다.

조선 성종 때 대유학자인 김굉필과 정여창이 무오사화로 화를 당해 내려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하던 곳이다. 풍경이 아름다워 ‘제일강정’(第一江亭)이라고도 하며, ‘이노정’(二老亭)이라는 이름은 김굉필, 정여창을 칭한다. 동병상련이랄까? 노정(老亭) 한자가 두 노인의 말년 모습처럼 다정하다. 넘어가는 해가 이노정의 기와 끝 하얀 회에 불그스름하게 비춘다. 단짝 동무처럼 좌우 딱 대칭인 모습이 단아했는데 대문을 걸어둬 마루에 걸터앉아 강 풍경을 바라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다.


이동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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