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여 역사의 기억이 되다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19-07-17 08: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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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30여 년 전 대학시절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밤기차를 타고 새벽에 강원도 원주역에 내려, 역 앞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물병 하나 들지 않고 치악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의 속도에 상당히 뒤처진 채 겨우겨우 정상에 오르고, 확 트인 시야와 성취감에 잠시 기뻐한 뒤 다시 긴 시간 산을 내려왔었죠. 산을 내려오니 저녁이 다 되었고, 산 아래 맡겨뒀던 배낭을 찾은 뒤(배낭을 맡긴 건 정말 훌륭한 판단이었죠), 양양군에 있는 하조대 해수욕장 근처에 민박을 정하고 저녁을 먹고 나니 밤 12시가 넘었던가! 도전을 즐기지 않는 성격인 탓에 치악산을 올랐던 기억은 그렇게 세월이 지났음에도 장면 장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원주는 내게 그런 기억의 장소입니다.


울산의 한 공공노조에서 간부 활동하고 있는 친구가 원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적어도 1년 6개월을 원주에서 지내야 한다는군요. 친구의 갑작스런 발령 소식에, 나와 오랜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원주로 여행을 가자는 얘기를 했지요. 기꺼이 맞아줄 친구가 그곳에 있을 테니까요. 친구의 원주 발령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오랜 친구가 30여 년 전의 그 원주 여행에 함께 할 예정이었는데,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새로 산 옷이 이유 없이 훼손되는 불길한 기운(?)으로 여행을 포기했다는군요. 저의 기억 속에 이 친구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당시 여행 멤버에 끼게 된, 의심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네요. 여행을 취소한 친구는 제 단짝이었고, 그가 함께한다고 해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제가 큰 망설임 없이 간다고 했을 게 뻔합니다. 그러니 단짝의 여행 출발 당일의 취소는 저를 몹시 당황케 했겠지요. 그럼에도 저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답니다. 단지 강원도 여행은 산을 오르며 느꼈던 심한 갈증과 긴 하산으로 인한 육체의 피로, 그리고 배고픔, 그러나 싫지만은 않았던 기억으로 있었지요. 이제 과거 여행은 저의 기억 속에서 좀 더 구체화되겠지요. 


나와 오랜 친구의 기억은 서로 다릅니다. 이처럼 개인의 기억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그러나 둘의 기억이 만나, 우리의 과거는 더욱 구체화되지요. 아마 역사도 이렇지 않겠습니까?. 과거 무수히 많은 이들이 셀 수 없는 많은 경험을 했고, 그 경험들은 서로 충돌하며 기억으로 남겨져 있다가, 그들이 떠난 후 사라져 갔겠지요. 그중 누군가는 자신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 기록은 오랜 훗날 역사가 됐지요. 기억을 기록으로 남긴 자는 역사에서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역사의 뒷면에 숨어버렸습니다. 


개인의 기억은 구체적인 일상과 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삶의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이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밝히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사명일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 ‘울산노동역사관 1987’과 함께 퇴직을 앞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생애사를 기록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어떤 삶의 경험을 거쳤고, 현대자동차 노동자가 되기까지 과정은 어떠했으며, 노동자가 된 이후 노동자로서 일상은 어떠했는지를 기록하는 일이지요. 노동자 개인의 삶의 전반과 의미를 모두 담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삶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사 주체로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인식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그들의 삶이 역사의 뒷면으로 숨어버리지 않도록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나름 제게도 의미 있는 일이랍니다. 


과거 강원도 여행을 둘러싼 저와 친구의 기억이 다르듯,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사건을 경험하지만, 사람들은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기억이 옳다고 해서, 다른 이의 기억이 틀린 것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하나의 기억보다는 백 명의 백 가지 기억이 기록으로 남을 때 역사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며, 사람에 대한 이해도 넓어지겠지요. 그렇게 세상은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그런 믿음에서 저는 오늘도 숙연한 마음으로 개인의 삶의 의미가 오롯이 담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올해가 될지, 아니면 내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일이 없다면 친구가 있는 원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게 되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또 같고도 다른 기억을 남길 것이며, 더 시간이 흐른 뒤 다른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보겠지요. 그때가 몹시 기다려집니다.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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