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반역의 프로메테우스

최미선 인문숲사회적협동조합 사무국장 / 기사승인 : 2021-10-27 00: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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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숲 시즌3-그리스 비극

▲ 이종인(왼쪽), 최미선(오른쪽)


헤시오도스의 프로메테우스

최미선=프로메테우스는 인간창조의 신이다. 인간을 창조했으면서 인간을 끊임없이 보살피는 신이기도 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신인지 정리를 좀 해보자. 


이종인=인간 창조의 신, 구원의 신, 스승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창조의 신이라는 것은 잘 아는 부분이니, 구원과 선생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를 집중하면 어떨까 싶다. 창조만 하고 무책임하게 버려둔 것이 아니라 신의 형상을 가지고 문화를 일구며 살아가도록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손길과 가르침을 준 신으로 알려져 있으니. 제우스가 불을 숨긴 일과 프로메테우스가 훔쳐 옮겨준 일에 대해 얘기해 보자. 우선, 고대사회에서 불이라는 것은 음식을 익혀 먹는 음식문화, 한파를 견디기 위한 난방문화, 어둠을 밝히는 조명으로 밤 문화, 광석을 용해시키는 기계문명 등 불의 혁명은 연금술을 통한 혁명을 불러오게 될 원천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제우스가 불을 숨긴 이유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불의 힘’을 일러 ‘지칠 줄 모르는 화광’이라고 표현한다. ‘화광’이란 불에서 나오는 빛이다. 빛의 힘으로 단지 어둠을 밝히는 물리적 빛 이상을 뜻한다. 지성과 이성, 지혜를 뜻한다. 고대 수메르에서는 올빼미를,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지성을 상징하는 동물로 삼았다. 불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처럼 단지 자연에 적응하며 사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따라 자연(nature)을 바꾸는 힘, ‘문화(culture)’의 능력인 셈이다. 곰은 1000년 전에도 굴에 살았지만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은 거주지를 지속적으로 변모시켜왔다. 바로 지성과 문화의 힘이다. 불을 ‘기술의 빛’이라고도 부르는데, 기술은 단지 도구와 기계를 다루는 기술을 넘어서는 의미다. 그리스인들에게 ‘기술’이란 탁월함의 의미를 갖는 아레테(arete)다. 덕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바로 정신의 고양이다. 


문제는 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달한 것이 제우스로 하여금 격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했느냐는 것이다. 분명, 세상의 주권자인 제우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 가지 해답으로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불’에서 찾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은 일상에서 접하는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불이 아니다. 그리스신화에서 불을 지성의 상징으로 보듯, 그가 주장하는 불 역시 세계의 원리이자 정신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불은 세계의 이성, 세계의 영혼으로서의 로고스”라고 말한다. 불은 정신으로서의 로고스로, 진리나 보편적인 법칙, 원리를 뜻한다. ‘로고스’는 ‘언어’, ‘이성’, ‘원리’, ‘의미’ 등을 포함하는 단어로 크게는 우주의 원칙이자, 작게는 개인 삶의 원리를 뜻한다. 달리 말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제우스가 아니라 스스로 입법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새로운 창조자이자, 구원자이며, 스승이라 할 수 있겠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에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준 행위에 대해 제우스가 책망하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 자신에게도 후세의 인간들에게도 큰 화근이 되리라. 나는 불의 대가로 그들에게 재앙을 줄 것인즉,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재앙을 껴안으며 마음속으로 기뻐하리라.” 제우스가 불의 대가로 인간에게 준 재앙은 바로 최초의 여인 판도라다. 물로 흙을 개어 그 안에다 인간의 목소리와 힘을 넣어 아름답고 사랑스런 모습의 처녀가 태어나게 했다. 판도라는 항아리 뚜껑을 열어 인간에게 염려를 주는 것들을 모두 내보낸다. 놀라 뚜껑을 닫았을 때, 항아리 가장자리 아래 남은 하나는 ‘희망’이었다. 항아리 속 재앙들은 고통스러운 그리움, 거짓말과 알랑대는 말, 힘겨운 노고, 죽음을 가져다주는 질병 등이다. 이 모든 것들은 화광, 즉 지성의 힘을 약화시키는 작용을 하는 재앙들이다. 이성과 지성보다 충동에 휘말려 합리적 분별에서 멀어지게 해 힘을 빼는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

최미선=프로메테우스는 ‘미리 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미리 볼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이 겪을 고통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을 위해 신을 속이고 불을 건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종인=이를 니체는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인간의 거인정신의 표상으로 높이 사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사실 ‘죽음’의 사실을 미리 예견하는 사람들이다. 실존주의자들의 작업은 악과 죽음, 삶의 부조리가 엄존하는 삶을 인정하면서도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는 데 공헌하고 있다. 니체가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호평하는 일은 제우스로 표상되는 기존 질서 아래서 노예적 삶을 청산하고 주체적 입법자요 삶의 창조자로 살아가는 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입법자가 되고, 삶의 주인으로 세계를 스스로 조성하는 일은 고독하고 험한 길이고, 안락함과 거리가 먼 불안과 변화, 고통스러운 일을 예상하지만, 옳다 여기는 일에는 ‘닥진!’, 닥치고 직진하는 정신이다.


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신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만큼 그리스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과 유사한 형태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후대에 기독교적 신 이해가 등장한 후로는 제우스의 전능성과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다는 전지성에 대한 부분이 포함되는 듯하지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미선=아이스킬로스의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는 성격이 현존하는 다른 그의 비극작품들과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 그래서 아이스킬로스 작품이 과연 맞는지에 대한 의문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제우스의 성격이다. 다른 작품에서의 제우스의 성격과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여기서 나오는 제우스의 성격은 신 가혹하고 의리 없는 폭군의 모습이다. 비극 속 프로메테우스의 마지막 모습이 인상적이다. 제우스가 헤르메스를 보내서 프로메테우스가 알고 있는 제우스의 미래의 결혼에 대해 묻지만 결코 답하지 않은 채 벼락과 함께 벼랑 아래로 추락하는 것으로 나온다. 결코 굽히지 않는 거인의 풍모를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혹시 본인이 다가올 고통을 미리 알고 있음에도 그 길로 나아간 적 경험이 있는가? 아니면 본인에게서 거대한 권력에 저항해본 경험이 있는가?


이종인=나는 본성적으로 심약한 사람이다. 거대한 권력에 저항하거나 투사가 되는 일은 내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불화하고 다투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갈등과 투쟁 속에 내몰리는 것을 힘겨워 한다. 로마 시대 철학으로 치자면, 스토아 정신보다 에피쿠로스 정신에 가깝고, 춘추전국시대로 치자면 공자 사상보다 노장 사상이 내 성격에 맞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현실의 억압을 근본적으로 뒤엎은 혁명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는 폭군에 대해 저항하는 대중적 시선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명령을 거절하고 불을 전한 뒤 형벌을 당한 순교자라기보다는 절대 권력에 저항하는 혁명가에 가깝다. 


1868년 모로의 작품 <프로메테우스>를 보면 간을 쪼아 먹히는 중에서도 고통스러운 표정 대신 하늘을 노려보면서 대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발 아래 독수리 한 마리가 죽어 있고 그의 발가락 사이에 독수리 깃털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제우스에 대한 저항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독수리는 제우스를 상징하는 새다. 물론 그림이 좀 엉성하긴 하다. 코카서스산 절벽에 신전 기둥이 그려진 것이나 독수리가 쪼고 있는 부위가 간이 있는 위치도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모로가 상징주의 화가라는 점에서 그림을 통해 저항의 상징으로 프로메테우스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프로메테우스

최미선=현대 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는 누구인가?


이종인=독재의 총부리와 칼날을 무서워하지 않고 싸워온 선배들, 고통스럽고 불편한 가난에 저항해 힘써 싸워온 부모 세대가 아닌가 싶다. 또,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이 프로메테우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4.19 혁명에서, 5.18 민주화 항쟁과 대통령 탄핵 등을 통해서 우리 시대 프로메테우스들을 넉넉히 보아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프로메테우스의 저항정신 일변도보다는 이성의 간계를 파악하고,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지하는 성숙한 정신이 더 긴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전달했다는 불은 인간을 자유롭게 했고, 주체적으로 만들었겠지만 동시에 자유에 대한 대가와 위험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불은 유용하지만 또한 위험하지 않은가? 절대 권력을 행세하는 세력과 존재는 역사 이래 내내 있어 왔다. 군주정의 독재뿐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사형에서 보듯 다수의 민주독재도 존재한다. 언론의 선동과 지성의 왜곡을 통해 대중의식을 조작하는 음흉한 통치행위는 노골적인 괴벨스가 아니어도 우리 시대 대한민국에도 엄존한다. 애국심과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대중적 동의를 조작해 낼 수 있는 세상이다.

이오에 대해서

이종인=제우스의 이오에 대한 처사가 굉장히 불편하다. 폭군에 가깝다. 제우스가 이오에게 성적 욕망을 품은 것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그리고는 평생을 떠돌게 만든다. 육체를 고향으로부터 축출하고 정신 또한 제정신이 아니게 만든다. 프로메테우스는 스스로 자처한 처벌이라면 이오는 모르고 당하는 처벌이다. 어쩌면 인간의 조건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이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오는 고통을 당하는 인간이다.

정리=최미선 인문숲사회적협동조합 대표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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