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언양 지역의 활동가가 되다(2)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12-04 08: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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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언양보통학교 출신 중에서 강대곤(강철, 2회)은 주로 울산에서 활동했다. 양산군 하북면 순지리 출신인 그는 사상단체인 ‘성우회’를 조형진, 김문성 등과 1925년 2월 10일 창립했고, 1926년 4월 14일에는 신영업(2회)과 이규경(언양 천도교인), 성세빈(보성학교 창립) 장인두(동면구락부), 조형진(성우회) 등과 ‘자오회’를 창립했다. 그는 동아일보 울산지국 기자로 기자들 모임인 ‘울산기우회’에 참여했다. 나중에 신간회 지회와 울산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1937년 7월 25일 동아일보 울산지방 소개판 특집 기사에 ‘계몽기 울산문화운동 선상에서 중심인물은 이종천, 강철(2회), 성세빈, 신학업(3회), 조형진 등이었다’고 언급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가장 정보를 획득하기 좋은 곳은 언론사다. 당시는 사회활동가들의 신분 위장용으로도 좋았다. 1923년 11월 이후 신학업(3회)은 동아일보 울산지구 기자와 언양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4월 조선일보 언양지국장 김교철이 경질되고, 총무 겸 기자로 신영업(2회)이, 기자는 김복조(2회), 이규경, 정태균이 있었다. 1932년 양산의 동아일보 지국에 신영업(2회)과 이동개(7회)가 활동했고, 1935년 4월에 언양기자단이 결성됐는데 총무는 윤동명이고, 조선일보의 윤수암(6회), 조선중앙일보의 이동계(7회)가 참가했다.
 

▲ 언양읍성에서(이건욱 제공)


강습회, 야학운동에 앞장서다

언양공보 출신들은 또 언양과 언양 인근 지역 강습소와 야학운동을 했다. 당시 강습소는 1년마다 경남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운영됐는데, 밤에 할 경우는 야학이라 했다. 강습소(야학)는 한글을 가르치며 계몽운동을 했다. 이러한 문맹퇴치 교육은 설립자와 강사들에 의해 민중교육을 통해 민중의 자각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는 제도적인 식민지 정규학교교육보다 민중적 기반과 민족운동의 역량을 확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야학 운동에 언양공보 졸업생이 교사로 크게 활동했다. 특히 야학은 농민과 여자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됐다. 조선어, 산술, 주산, 작문, 습자 등을 공부했다. 


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여자야학과 부인야학이 있었다. 1923년 4월 언양에서 정인섭이 주최가 돼 언양공보 여자부 교실에서 ‘언양여자야학’을 개설했다. 학생은 70여 명으로 보통학교 여자부 담임 김덕수와 훈도 서주식이 가르쳤다. 1923년 7월 20일 ‘언양여자야학회’ 제1회 수료식을 거행했다. 김홍경, 오무근 등 유지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7월 21일 야학교사 일동을 위로했다. 9월 1일부터 제2회 개학식을 했다. 야학교사는 보통학교의 서주식, 이태인, 최규찬, 김수호 4명이었다. 언양청년회에서는 노병철, 김기오가 참가했다. 또 1924년 1월 9일 언양청년회에서 경영하는 제3회 ‘부인야학’ 개학식을 했는데, 교사는 김덕수 언양공보 교사였다.


언양공보는 9회인 1923년에 첫 여학생 9명이 졸업했다. 여자 교육은 그만큼 미흡했다. 여자야학에 앞장선 김덕수는 1924년 1월 19일 ‘언양여자청년회’를 조직했다. 여자부 선생인 김덕수의 사회 아래 정완섭(정인섭?)의 취지 설명이 있었다, 회원 30여 명에 임원으로 회장은 김덕수, 간사는 정덕조, 회계는 이순연이 선출됐다. 또 교사 서주식은 울산공보 1회 졸업생으로, 언양공보에 1914년 부임해서 1931년 4월까지 학생들을 지도했다. 졸업식 사진에 항상 등장할 정도로 오랫동안 있었다. 여자야학을 개설한 정인섭은 언양공보를 세울 때 건물 3교실 1동을 건립 기증한 정택하의 아들이다. 그는 어린이운동가, 민속운동가, 한글운동가 등으로 활동했지만,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학병지원 등을 주장한 친일활동을 했다.
 

▲ 언양공보 제9회 졸업생, 왼쪽 한복 여교사가 김덕수, 오른쪽 두 번째 양복 교사가 서주식인 듯하다.


야학은 문맹퇴치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언양청년회는 1923년 9월 30일 ‘언양노동야학’ 개학식을 했다. 학생은 50여 명이고, 교사는 청년회원 오석근(1회)과 여럿이 담당하기로 했다. 신주극(신학업, 3회), 정인목(2회), 정인섭(3회), 최수한(1회)의 강의가 있었다. 또 언양청년회에서는 1924년 9월 29일 청년회관에서 ‘언양야학’ 개학식을 했다. 야학교사는 김선택(5회), 오보근(오석근?, 1회), 신영업(2회) 외 3인이었다.


1923년 11월 10일 남녀생도 40여 명을 대상으로 ‘어음리 노동야학’이 개최됐다. 최장한(1회), 최양수(1회), 박팔천(2회), 박용수(2회) 등이 활동했다. 1923년 12월 1일 반곡리에서 ‘반곡노동야학’이 청년 김상탁(金相鐸/택(澤), 3회), 오원특, 권재식(5회) 등과 반곡 구장 김포언의 노력으로 생겼다. 


1924년 두서면에 세워진 ‘두북강습소’ 운영이 어려워졌다. 강습소는 두서면 인보리 장만환, 정태진, 이석찬, 손석권, 임창선(4회) 등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두서면 서하, 내와, 전읍, 인보, 소호 국유지소작인조합 저축금을 보조해 운영하게 됐다. 아동 40여 명은 송정호, 임창선(4회)이 교편을 잡아 가르쳤다.
이외에 두서면 ‘서하리 노동야학’, 상북면의 ‘길천야학회’와 ‘양등리 노동야학’, ‘명촌야학회’, 다개리의 ‘진신강습소’, 천도교인 중심인 상남면 거리의 ‘양정강습회’, 중남면 ‘신화리 노동야학회’ 등이 있었다.


언양군 내에 무산노농(無産勞農) 대중의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회가 70여 개 산재하고 있으나 서로 연관이 없었다. 언양청년동맹 발기로 언양 주변과 두동, 두서에 산재한 80여 개의 야학연합회를 1929년 2월 3일 창립하고자 했다. 언양면내 10개 단체대표가 모여 ‘언양노동야학회’를 조직하고 교재 통일, 세포단 유지 방침 등을 협의했다. ‘노동야학연합회’의 준비위원은 신영업(2회), 임시집행부 의장은 이규경, 서기는 곽봉균(11회, 곽해진의 동생), 서무 경리부는 신영업(2회), 조사 연구부는 곽봉군(11회), 오문영, 강영상, 신갑문으로, 문예부는 이종인, 정규용, 정병택, 이무종으로, 체육부는 선성규(11회), 정기수(11회)로 구성했다. 


하지만 12년 동안 무산 농민대중의 계몽운동을 담당하며 운영됐던 ‘언양농민야학회’가 1931년 10월 23일 강제 폐쇄됐다. 이유는 대표자와 강사가 불온하다는 이유였다. 이는 당시 언양과 양산을 오가면 활동하던 신학업(신주극, 3회)의 ‘경남적색농민조합건설 사건’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야학이 사라져 언양지역 교육에 많은 문제점을 가져왔다.


언양공보 출신으로 야학 활동한 명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회 졸업생은 주로 어음야학회에서 활동한 최장한, 최양수, 박팔천이 있다. 2회 박용수(어음), 3회는 정인섭(언양여자야학)과 김상택(반곡노동야학), 4회 임창선(두북강습소), 5회는 권재식(반곡노동야학)과 김선택(언양노동야학), 11회는 노동야학연합회의 정기수, 곽봉군, 선성규가 있었다.

농민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언양 주변 지역은 농촌 지역이다. 당시 대부분 농민으로 소작인들이었다. 1920년대 국내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1923년 1월 4일부터 15일까지 ‘울산소작인회’에서 소작인 생활 상태와 소작료 남봉 지주 조사를 위해 범서, 두동, 구 언양 5개 면에 오덕상, 김택천, 신학업(3회), 오태영(2회)을 담당자로 파견해 조사하게 했다. 

 

▲ 언양 사회운동의 선구자인 독립유공자 신학업(1901~1975)


언양읍 밖엔 상남면 길천리에서 1926년 3월 4일 ‘북남농민조합’을 결성했다. 이는 이전의 길천리노동합성회를 개칭한 것이다. 노동본위와 계급의식을 강조한 ‘시대청년회’에서 활동한 김대식, 강영상, 이규경 등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언양청년회에서 1926년 8월 1일 ‘언양남부노동회’를 설립했으나 노동자가 없는 관계로 ‘남부농민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연령 제한을 둔 것으로 보면 일반 농민의 가입이 제한적이었던 것 같다. 당시 회장은 신인찬, 서기 방기현(6회), 간사는 신영업(2회), 김기오, 김효택(김선택?, 5회), 김문갑, 서소룡, 정재봉, 장소동, 문득준, 김기줄 등이었다.


1930년대에 신영업(2회), 신학업(3회), 이동개(7회) 등은 소작농의 권리 옹호를 위한 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울산과 양산에까지 사회활동을 넓히며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1931년 11월 언양에 사는 통도사 소작인들이 소작 조건 개선 운동을 하는데 신학업(3회)이 그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긍정적 결과를 얻었다. 그는 1932년 2월 언양농민조합 신춘 간담회에서 임시 집행부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경남적색농민조합 동부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언양과 양산의 사회 농민운동에 악영향을 미쳐 일제의 탄압이 가중돼 농민조합, 야학, 청년회 등이 해체되고 이후 언양 사회운동의 침체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동개(이야개, 7회)는 울산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했다. 두서 출신의 배기철(13회)은 1941년 양산 통도중학교에서 항일민족교육을 하다 고초를 겪고,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 김수선(12회)과 농지개혁에 앞장섰다. 


1924년 8월 ‘언양체육 구락부’가 만들어졌다. 당시 기부한 조선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규정, 오익근, 박창선, 배인찬, 유철순, 곽해진, 김복조(2회), 김효동(1회, 김원룡의 부친), 서주식(언보교 교사), 김선암(7회), 김규환(1회), 김용대(5회), 서오식, 강석록(2회), 이민우, 김홍경, 김상택(3회), 김영건, 김성업(4회), 윤상룡, 정병호, 권종수, 정인조, 김교만, 정태조, 윤수암(6회), 오채영, 김만출(4회), 노병출 등 29명이었다.
 

▲ 작천정에서(이건욱 제공)


언양 청소년들,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언양보통학교 출신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사회운동을 하며 항일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가운데 언양 청소년들의 항일독립운동이 표출됐다. 언양소년회 출신들이었다. 


언양청년회와 소년회 활동은 언양사회에 항일독립운동으로 나타났다. 1927년 10월 일본인이 조선인을 구타해 사망하게 한 ‘가리야 사건’으로 언양지역은 항일 감정이 높았으며 일본 상품 불매운동도 했다. 1928년의 만세문 사건, 1930년과 1932년의 언양소년회 격문사건이 그것이다. 이 운동에 연관된 인물이 바로 이동개(7회)다. 학적부에는 이야개로 돼 있다. 


부산지법 1929년 3월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1925년 3월경부터 소년단 간부로 활동하면서 이동개는 매월 1회씩 단원을 언양청년회관에 집합시켜 기회 있을 때마다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실천하도록 했다. 즉 “조선은 일본에 빼앗겨 독립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 소년들은 단결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그 방법으로서는 독립사상을 선전하고 또한 일본인은 조선인을 압박하고 정부 또한 차별대우를 하므로 일본인 상품을 사지 않도록 하여 일본인에게 고통을 주자!”라고 했다. 1928년 12월 8일 6학년 김동하는 집에서 “조선소년들아! 일본인을 타도하여 조선을 회복하자! 조선독립만세!”라는 글과 태극기를 그려 60*50cm의 선전 문서를 작성했다. 12월 11일 울산경찰서 언양경찰관 주재소 앞의 게시판에 김동하는 과감하게 부착했다.
김동하는 만국기를 그리라고 하면 가운데에 태극기를 넣는 학생이었다. 일본인 검사는 “나이는 어리지만, 그 의식은 장래 무엇을 목적하는 확실한 신념을 가졌다”하여 두 사람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고 판사는 8월형을 선고했다. 1929년 12월에 징역을 살고 나온 이동개를 환영 나온 언양소년단원 100여 명은 비를 맞으면서 소년단가를 높이 부르며 소년단 회관까지 행진했다. 

 

▲ 이동개의 대구복심 판결문
▲ 독립유공자 이동개(1910~1955)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전 민족적인 독립운동으로 전개됐다.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은 오영수의 셋째 동생인 오호근(14회)이 1930년 1월 언양 주재소 부근에 격문을 뿌려 체포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1932년 5월 다시 격문을 홍정수가 뿌려 검거됐다. 이런 연유로 언양청년회와 소년회는 탄압을 받았다.

언양공보 졸업생은 언양 사회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언양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 12명 중에 7명이 사회운동에 참여한 것에 비해 1927년 이후 점차적으로 사회운동가들이 줄어들고 1930년 15회 졸업생 이후에는 사회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만큼 독립운동이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언양공보의 15회까지 졸업생 529명 중 63여 명이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이 바로 언양지역에서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의식을 고취한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때 언양 일대가 야당 성향이 강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언양공보 출신들은 청년회, 소년소녀회, 야학, 강습회, 언론인 등 다양한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그중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분은 현재 신학업(3회)과 이동개(7회) 두 분이 애족장을 각각 받았다. 하지만 유공자가 될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한 분은 더 많다. 특히 김동하와 홍정수에 대한 언양공보 자료가 없어 안타깝다.

 

▲ 1930년 1월 14일 경오의 신춘을 맞이하여 (이건욱 제공)


이병길 시인, 울산 민예총 감사, 역사 질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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