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인과 사랑한 양산의 권순도 세계인을 환영하다(2)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07-03 0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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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육영사업과 국채보상 운동에 참여한 권순도

최익현의 장례 후 권순도는 육영사업에 기부한다. 먼저 1907년 1월 황성신문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문명록(文明錄)으로 2환 70전, 10월에는 4환 80전을 기부한다. 2월에 그는 부산 동래 사립여학교인 정정의숙(貞靜義塾) 건립에 동참한다. 동래부윤 김교헌(훗날 대종교 2대 교주)은 40원, 장우석(사립구포구명학교 설립, 구포은행 창설자) 50원, 권순도는 10원을 기부해 총 2천여 원을 모금했다. 그런데 이 학교는 유교이념에 따른 여성성을 강조하는 학교였다. 그의 보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1907년 1월에 동학교단과 일진회에서 파견했던 유학생 32명 중 21명이 두 단체의 갈등으로 생활비를 받지 못하자 손가락를 잘라 혈서로 항의하는 단지혈맹(斷指血盟) 사건이 발생했다. 5월에 동래 부윤 김교헌은 40환, 장우석과 윤상은은 2환, 권순도는 30전을 기부해 총 318환 70전을 보낸다. 그리고 1909년 1월 부산동래 보통사립학교와 여학교 4개소를 사립노동야학교에서 주도해 설립할 때 장우석 10환, 윤상은과 권순도는 5원을 모아 총 483원 50전을 기부한다. 이런 육영사업에 대한 기부행위는 최익현의 유교적 의리론에 입각한 무장투쟁노선에서 권순도가 서양근대문물을 수용해 자강력을 양성하자는 실력양성론적인 구국계몽운동으로 변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최익현의 항일 충의정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또 권순도는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했다. 1907년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빌어온 차관이 1300만 원에 달해 빚더미 위에 올라서자, 이를 상환하고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됐다. 당시 민족언론들이 모금운동을 일으키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국민들이 이에 호응해 남자는 담배를 끊고 절약한 돈으로 모금에 참여하고 부녀자들은 비녀, 가락지 등을 팔아서 이에 호응했다. 이러한 애국 배일운동은 통감부의 탄압으로 지도자인 양기탁 등이 구속되면서 결국 중지되고 말았다. 1907년 3월 부산상공회의소의 권순도를 비롯한 36인은 각 30전을 냈다. 권순도는 또 5월에 부산항상무회의소 내 단연동맹(斷烟同盟) 명의로 2회에 걸쳐 각 30전을 기부했다.

권순도, 부산에서 양산으로 삶터를 옮기다

권순도는 1908년 12월 “측량기구 대방매” 광고를 5회에 걸쳐 대한매일신보에 낸다. 이는 그가 부산에서의 사업을 정리하는 신호로 볼 수 있다. 1910년 한일강제 병합이 일어나자 권순도는 부산에서 양산으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대석 마을에 정착하면서 그는 부산에서 축적한 부를 고향을 위해 사용한다. 

 

▲ 1970년대 대석마을 전경, 왼쪽 하천 큰 집이 권순도의 집으로 추정된다. (전병구 제공)


먼저 상북면 유지와 함께 육영사업과 빈민구제 사업을 했다. 1912년 6월 양산공립보통학교 설비비를 지원하는데, 상북면의 권순도, 이재영, 권순모가 10원, 통도사 김구하 10원, 범어사의 김고산 26원, 상삼마을의 김교환이 10원을 기부한다. 그 일로 총독부로부터 목배를 받았다. 또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마을 주민들을 위해 세금을 대납했다. 1913년 5월 16일 매일신보는 당시 마을의 자산가로 자선심이 많은 두 명망가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소석동의 정순모는 207호에 종자 벼 넉 섬을 주고, 117호의 호세 17원 70전을 대신 바쳤다. 대석동의 권순도는 빈민 152호의 호세 미납금 22원 20전을 대납했으나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1919년 7월 상북보통학교 건립에 권순도는 1500원을, 김교환은 2500원을, 정순모는 2000원을 기부한다. 그는 이 일로 1936년 6월 총독부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1922년 1월 30일과 31일 이틀 동안 양산청년회관에서 노동야학과 여자야학 운영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 연극을 했다. 이때 유지들과 그 부인들이 기부했는데, 권순도의 부인도 2원을 기부했다. 1925년 동래기영회에서 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를 관립으로 변경할 때 공사 대금으로 양산의 김교환 200원, 정순모와 통도사는 각 510원, 배영복과 김형철 각 100원을 기부했다. 그때 권순도는 소 한 마리를 기부했다.

 

▲ 대석마을 골목은 고요하고 아이들의 소리가 없다. 그래도 마을을 살리는 작업이 조용히 있다.

비석과 마을 바위에 글을 새긴 권순도

권순도는 자기 마을을 알리기 위해 1917년 마을진입 대성고개에 무송대(撫松臺)를 조성하고 “세계인 환영” 비석을 세운다. 고개에는 이미 대원군 척화비(1871년)가 있어 묘한 대조를 이뤘다. 서양 세력을 반대하는 비석과 환영하는 비석이 나란히 서 있었다. 


마을 이장 박기명(70세) 씨에 의하면, 무송대는 큰 소나무로 둘러싸인 넓은 터로 가운데에 정자나무와 약수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행인들이 쉬어가는 곳이라 ‘숲안’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무송대’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원래 무송대는 대성마을의 ‘엄마손 뷔페’(상북중앙로 63)이지만 현재는 경부고속도로 덕운육교 앞으로 기념비를 옮겼다. 권순도는 ‘천하절경 홍룡폭포를 보러 온 세계인들을 환영하노라’하면서 행여나 그의 아들이 오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무송대에 있던 ‘세계인 환영’ 비석이 대석마을 입구인 성산교 당산동산 앞으로 옮겨졌다. 아랫부분이 부러졌으나 붙여 세웠다. 이것도 땅에 묻힐 운명이었으나 권순도와 함께 가홍정을 세운 이재영의 후손인 이능우 씨에 의해 복구됐다고 전병구 씨가 알려줬다. 당시 부서진 비석에 소주 한 병을 붓고 세웠다고 한다.


2001년 세운 홍룡사 입구 홍룡교 아래에는 권순도가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 쓴 고인돌같이 큰 바위가 있다. 대석마을을 상징하는 바위지만 다리에 가려있어 안타깝다. 맞은 편 하천에 의충단 바위가 있다. 그리고 다리에서 40여 미터 아래 바위에 “상용추(上龍湫)”라 새겼다. 그는 비석과 바위에 글을 새김으로써 대석마을을 널리 알리려 한 것이다. 권순도는 양산 군수가 찾아오면 정중하게 프록코트(Frock Coat)로 갈아입고 접대했으며, 또 가홍정에 보통학생들이 소풍을 오면 밥과 떡을 지어 고루 배불리 먹였다고 한다.
 

▲ 홍룡교 다리 하천의 제일강산과 의충단 바위, 제일강산 바위는 대석(大石)의 상징이다.

가홍정을 세운 이재영과 그의 아들 백농 이규홍

홍룡폭포 입구에 세워진 가홍정(駕虹亭)은 석은(石隱) 이재영(李宰榮, 1853~1928)이 노병(老病)이 치유되고 난 66세에 권순도와 같이 세운 것이다. 그는 홍동(虹洞) 입구 병풍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가선대부를 지낸 이재영은 검소했으며 손님 대접을 넉넉히 했다. 1903년(고종 7) 기근에는 금품과 곡식을 많이 출연해 마을 사람들을 주휼(?恤)했다. 평소에 비단옷을 입지 않고 거마를 타지 않다가 예순 살이 된 후에야 비로소 비단옷을 입고 거마를 탔다고 한다. 


권순도의 영향인지, 이재영은 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 아들을 상해에 보내 유람하면서 그곳 정세를 살피고 그곳의 인사와 교유를 맺도록 했다. 그의 둘째 아들이 백농(白農) 이규홍(李圭洪, 1893~1939)이다. 백농은 1916년 명치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후 부산에서 안희제의 백산상회 옆에 1917년 일광상회를 운영하며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1919년 만세 운동 후 윤현진(1892~1921, 상해 임정 재무차장)과 함께 4월 상해로 가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한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 외무총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임시정부 약헌기초의원 등을 역임했다. 또 한국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 집행위원으로 독립운동 통합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는 1935년 중증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 1925년 2월 11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이규홍


귀국한 그는 ‘가촌토지(주)’의 대표자, ‘환영(丸榮)자동차(합자)’의 중역, 양산산업조합의 평의원으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기업 활동이 반민족적 친일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후손이 아니라 국가가 찾아야 할 것이다. 아들 이종문(李鍾文, 1913~1967)은 대석저수지 주변 땅을 매입하고 수리조합을 운영하며 사재를 털어 홍수 피해를 입는 3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저수지를 완공하는 데 기여했다.


권순도는 대석마을에 온 이후 마을 청소년들에게 최익현을 비롯한 지사들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의충단에 제사를 지내는 등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중에 이규홍도 있었을 것이다.

제일강산 천성산, 명승 홍룡폭포와 권순도

권순도가 자랑한 대석마을의 홍룡폭포는 ‘제일강산’이라 한 천성산 자락에 있다, 홍룡사 일주문을 지나면 가홍정이 나온다. 가홍정에 들러 가홍정을 노래한 시를 읽고 맑고 청아한 대숲 바람과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때론 홍룡사에서 오는 종소리도 애절하다. 권순도는 만년에 대석마을과 홍룡폭포를 시로 남겼다.
 

▲ 양산시에서 지은 가홍정은 현재 출입금지(出入禁止) 정자다. 이 정자는 당장 지금입출(只今入出)해야 한다.

계곡 위의 하늘은 푸르고 폭포의 물빛은 더욱 희구나
까마득한 옛날 누가 땅의 영혼을 일깨웠는가?
계곡의 곳곳마다 큰 바윗돌이 숨겨져 있어
험준한 계곡 첩첩이 둘러싼 양산은 나라의 빗장이라
이렇듯 굳건한 기둥을 세운 자연의 솜씨여!
그를 읊조리는 내 마음도 깨어나누나.
시를 아는 친구들이 멀리서 찾아와
흔연히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마치 군자의 향기가 도는 듯하구나.


신라 문무왕 때(661~681) 원효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홍룡사. 위쪽 협곡에는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듯 신비롭게 느껴지는 홍룡폭포가 숨어있다. 이재영은 “천길 푸른 절벽이 좌우로 둘러싸고, 수많은 수목들이 위아래를 둘러 푸르게 에워싸고 있다. 그러다가 산에 햇빛이 막 비치고, 무지개 그림자가 번뜩거리며, 골짜기의 바람이 한바탕 뒤흔들면, 우레 소리가 펑펑 울리니 참으로 절경이다”라고 했다. 그는 산과 물이 공공의 물건이나 혼자 즐기려 감출 수 없으니 구경하러오는 천사람 만사람의 것이니 그들을 위해 올라오기에 편하게 길을 내기도 했다.


폭포 아래에서 보면 절벽을 깎아 세운 듯한 바위가 위풍당당하다. 흐르는 물보라는 마치 하얀 눈과 같다. 수량이 많고 맑은 날이면 폭포에서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옛날에 천룡(天龍)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3단 폭포는 옛 기록에 따르면 상층은 높이가 80척이요, 중층은 46척, 하층의 33척이었다고 한다. 

 

▲ “제일강산”바위 아래 40여 미터에 큰 소 옆에 “상용추” 바위가 있다.


면암 최익현의 항일의식을 중요시했지만 결코 서양 문화를 배척하지 않은 권순도는 개화인이었다. 그는 시골 서생으로 영국 여인과 사랑을 했고, 축적한 부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 육영사업과 빈민구제에 힘쓴 그였다. 마을 사람들이 거나하게 모두들 한잔하면 자신이 모든 술값을 지불한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대석마을의 자연풍광을 사랑하며 만 사람에게 알리고자 한 마을 알리기 사업의 선구자였다. 지금 대석마을에는 <문화교육연구소 田>을 통해 마을을 살리고자하는 제2의 권순도가 살고 있다.
 

▲ 현재의 대석마을 전경, 중앙의 다리 왼쪽 집이 권순도의 집으로 추정된다.

이병길 시인, 울산민예총 감사. 역사문화 질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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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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