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홍수전과 태평천국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7-10 09: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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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논밭이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음식이 있으면 함께 먹고,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쓰고,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고, 누구나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는다.”(태평천국군이 난징을 점령한 후, 이곳을 수도로 삼으면서 천경으로 개명했고 이어 발표한 ‘천조전묘제도’의 기본방침)

19세기가 되면서 청나라는 외환이 끊이지 않았고, 대규모 내란도 여러 번 발생했다. 아편 무역은 중국의 광대한 지역, 특히 인구가 조밀한 중남부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거액의 아편전쟁 배상금 지불에 대한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됐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는데, 그중 청나라 통치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됐던 반란은 1851년에 발생한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 홍수전 동상

1851년부터 태평천국군이 멸망한 1864년까지 13년의 반란 기간 동안 희생된 백성들의 수는 무려 2000만 명에 이르렀다.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점령한 후 명나라 궁궐의 토대 위에 ‘천왕부’를 지었다. 그러나 천왕부는 1864년 난징이 함락되고 태평천국이 멸망하면서 완전히 파괴됐다. 지금은 ‘첨원’이라는 명나라의 전통을 따른 정원이 다시 지어졌다. 이곳은 1912년 쑨원 정부가 사용했고, 1929년에서 1949년까지는 국민당 정부가 이용했다.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은 원래 명나라 때 지어진 정원이었다. 태평천국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도읍으로 삼게 되자 이곳에 태평천국군의 몇몇 장수들이 기거하게 됐고, 지금은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태평천국과 관련된 문물 2800여 점을 비롯해 수많은 사진과 문헌 자료가 수장돼 있다.

 


광동에서 기의한 태평천국군이 중국 각 지역으로 어떻게 진출했는지 보여주는 지도, 홍수전이 사용하던 인장, 태평천국군이 지배하던 지역에서 통용되던 동전, 그들의 무기, 농업개혁·사회법·문화정책에 대한 법률이 담긴 책자 등이 전시돼 있다. 태평천국군의 조직도, 청나라와 서구 열강세력의 침입로, 난징 함락을 그린 책자도 있다. 특이한 것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의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의 동상이나 초상화는 후대인들이 추측해 묘사한 것일 뿐이다.


홍수전(1814~1864)은 어려서부터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을 꿈꿔왔던 인물이다. 14세에 첫 과거시험에서 낙방한 그는 30세까지 연거푸 네 차례 낙방한 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렸다. 그 계기는 7년 전 과거시험장 앞에서 어떤 남자가 나눠 준 한 권의 책이었다. 그때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져 꿈을 꾸게 되는데, 꿈속에서 하늘로 올라간 그는 금빛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인은 그에게 사악한 것을 퇴치하라며 칼과 황금 인장을 건네주었다. 칼과 황금 인장을 건네받은 홍수전은 다른 어떤 남자와 함께 요괴와 싸워 요괴를 퇴치한다. 하지만 홍수전은 이 꿈의 의미를 아직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네 번째 과거시험에서 낙방하게 된다. 이때 홍수전의 집에 놀러 온 친척이 옛날 과거시험장에서 건네받았던 책을 발견하게 되고 그 책을 빌려 간다. 홍수전의 친척은 그 책을 진지하게 읽었고 홍수전에게 다시 돌려주며 읽어 볼 것을 권유한다. 이 책을 비로소 읽게 된 홍수전은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권세양언>이라는 이 책은 중국인 최초로 목사가 된 양발이라는 사람이 성경을 요약 발췌해 만든 책으로 하느님, 천지창조, 천국과 악마, 심판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홍수전은 그 옛날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꿈은 바로 신의 계시였고, 하늘에서 만난 금빛 수염의 노인은 하느님이었으며, 자신과 함께 요괴를 퇴치했던 사람은 예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홍수전 자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은 악마로부터 중국을 구하기 위해 보내졌으며 이 악마는 다름 아닌 청왕조와 그 지지자들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다.


신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 된 홍수전에게는 이제 과거시험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유교 사당을 파괴하고 상제를 섬기는 ‘배상제회’를 조직했다. 그의 확신과 열정, 신념을 따르는 추종자가 순식간에 늘어나기 시작했고 곧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홍수전의 고향인 광서성 동부의 산간 지역은 여러 해 계속된 기근과 정부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시달려 민심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1850년 즈음에는 홍수전의 추종자가 2만 명 이상 모이게 됐고, 군사적 역량도 갖추게 됐다. 홍수전은 자신을 ‘태평천왕 대도군전’에 봉하고 태평군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은 광서성 금성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태평천국군은 그해 가을에 북상해 광서성 영안을 점령하고 태평천국의 건국을 선언한다. 잇따른 전투마다 연속해서 승리한 태평군은 호남과 호북, 안휘성을 휩쓸다가 1853년 초 호북성 무한을 함락시키고 두 달 후에는 강남 제일의 도시인 난징을 점령하게 된다. 이때 태평군은 50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난징의 이름은 ‘천경’으로 바뀌게 됐고 태평천국의 수도가 됐다.

 


이들은 아편을 금지했고, 여성들의 전족 금지, 남자들의 축첩 금지, 매춘 금지, 음주 금지, 도박 금지와 같은 혁신적인 법령을 공표했다. 또한 부패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통해 엄격한 규율을 세웠으며, 부부간에도 남녀를 구분해 막사를 따로 세웠다. 공공 금고를 세워 재정을 책임졌고 법과 농경의 개혁이 잇따랐다. 그리고 만주족을 악마로 규정하고 이들과 성전을 선포한다. 그러나 태평천국에 대량의 식량과 물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이상적인 제도는 곧 유명무실해졌다. 농민들은 막중한 조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태평천국이 분배한 땅을 버리고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다. 언뜻 보기에는 진보적인 정책 같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전혀 실현될 수 없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마른 풀과 썩은 나무를 꺾듯 휘청거리는 대청제국을 태평천국군이 멸망시키지 못한 이유다. 홍수전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를 기초로 중국을 ‘예수 천당’ 사회로 개조하려고 꿈꾸고 있었다. 조상 숭배와 오랜 전통문화를 유지해온 중국에서 전혀 이질적인 신, 하느님 숭배와 기독교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먼저 기존의 사회 질서를 철저히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태평천국군에는 능력 있고 용감한 장수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사랑과 자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풀을 베듯 살육을 서슴지 않았고, 난징을 점령한 다음 유생, 상인, 승려, 의사, 예술가들을 요괴로 몰아 무더기로 죽여 버렸다. 난징에 살고 있던 3만5000명의 만주족들을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불에 태워 죽이거나 물에 빠뜨려 죽였다.

 


태평천국 지도부의 부패와 타락상도 태평천국군이 망하게 되는 데 톡톡히 한 몫 거들었다. 난징 점령 이후 지도부는 예전의 검소했던 규율과 기풍을 잊어버렸고 곧바로 축재와 처첩을 두는 데 혈안이 됐다. 특히 천왕 홍수전부터 여인들 치마폭에 파묻혀 음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매일 <권세양언>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계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태평천국은 난징을 점령한 지 불과 3년 만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동안 지도부의 내분으로 수만 명이 죽거나 서로 죽였다. 내분 과정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대다수의 장수들을 잃게 되었고 천왕 홍수전은 목표를 잃고 갈팡질팡만 할 뿐 예전의 총명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태평천국군이 베이징과 상하이를 점령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 수립 후 상해 거류 외국인은 엄정중립을 선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를 필두로 다른 외국 사절들도 청나라를 지원한다. 


서구 열강의 눈에는 태평청국군이 정통 기독교 교리에서 한참 벗어난 일종의 사이비 집단으로 비쳤다. 게다가 규율과 체계가 엄격한 태평천국이 부패한 청나라 조정을 대체해 중국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보다 청나라가 유지되는 것이 식민지 지배 전략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864년 청나라와 영국, 유럽과 미국의 용병들이 연합해 7개월간 난징을 포위했다. 7월 19일, 땡볕 아래서 포위만 하고 있던 청나라가 전략을 바꿔 공세로 전환했다. ‘증국번’이 이끄는 호남성 출신의 정예병들이 물 밀듯 난징 성벽에 쇄도했고 결국 태평천국은 함락된다. 50세를 갓 넘은 홍수전은 난징이 무너지기 48일 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길 속에서 타버렸다. 증국번은 청나라 황제에게 난징의 반란군 중 10만 명이 항복을 거부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보고했다. 난징 함락 당시 태평천국군 장병 가운데 항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천 명의 궁녀들도 모두 자살로 최후를 마쳤다.

 


홍수전보다 200년 전에 기의한 틈왕 이자성도 베이징 공략에 성공해 황궁을 점령했었다. 이들도 재물과 미녀를 취하는 데 혈안이 됐고 아직 권력이 온전히 손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싸움을 벌이다가 자멸했다. 홍수전의 태평천국도 똑같은 전철을 밟은 것이다.


태평천국군의 북상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때평천국군을 멸망시키는 데도 결정적 공을 세운 증국번은 이후에도 화북지역의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청나라 군부 세력의 실세로 부상하게 된다. 증국번은 한족 출신의 유가 관료였다. 증국번은 공자의 위패와 사당을 부숴버린 홍수전과 태평천국군을 중국의 파괴자로 생각했다. 한족 지식인들에게는 만주족과 한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보다 유가사상이라는 정체성이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 역사와 중국 경제에 커다란 유산을 남기게 된다. 중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풍유로운 장강 중·하류 유역의 모든 생산 활동을 붕괴시킴으로써 청나라의 세수, 세입원의 고갈로 이어지게 됐고, 이는 이후 대청제국 멸망의 원인이 됐다. 


태평천국의 진압 과정에서 청나라 팔기군의 허약하고 무능한 전투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결국 청나라는 지방 민간 조직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지방 무장조직의 합법화가 이루어진다. 이후 지방 무력에 기반한 군벌세력이 득세하게 됐고 한인 군벌들은 중국 정치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됐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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