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다방과 긴장의 바다를 품은 역, 월내역

황주경 시인 / 기사승인 : 2019-04-03 0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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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 월내역을 통과하는 열차

 

별, 은하수, 수정, 호수, 장미, 길, 청포도, 청자, 역전... 이 단어들은 내가 기억하는 다방 이름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소설 모비딕 속 일등항해사의 이름을 딴 모 프랜차이즈 카페보다도 더 시적이다. 내게 있어 다방은 처음으로 커피의 쓴맛을 알게 된 곳, 처음으로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여자의 관능미를 알게 된 곳이다. 남성이라는 떠돌이별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던 곳. 소설 조르바의 마담 부불리나 같은 다방 레지의 기구한 사연이 내게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던 곳이다.

 
월내역은 동해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좌천역과 서생역 사이에 있다. 1935년 12월 16일 배치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945년 보통역으로 승격했으며 지금은 무궁화호가 운행된다. 월내역은 좌천에서 달려온 기차가 비로소 동해를 내려다보며 달리기 시작하는 곳이다. 지금은 2킬로미터 남짓하지만 2013년 이전까지만 해도 기차가 이곳에서부터 해운대까지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내리 달렸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월내역사는 오래전에 사라지고, 1980년에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이 있었으나 이마저도 2017년 9월에 동해선 복선화 사업과 맞물려 철거됐다. 지금은 조립식 역사가 승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이는 신축 역사로 옮기기 전까지 임시로 사용된다.


기차에서 내리면 역 구내는 복선화 사업으로 몹시 어수선하다. 동해를 마주 보고 좌측 언덕에 신축 역사 공사가 한창이다. 과거 월내역은 더러 영화 속 배경이 되기도 했다. 조인성, 류준열이 출연했던 영화 더킹에서는 월내역 육교 위 패싸움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지금은 복선화 사업으로 사라졌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육교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거나, 또 누군가에게는 애인을 바래다주던 추억의 계단이었을 것이다. 비록 현실에서는 사라졌지만, 영화 속에는 그 육교가 영원히 남았다.

 

▲ 2009년 월내역 구내 전경(출처=다음 카페 ‘행복한 산행’)

 

▲ 2009년 월내역 구내 전경. 멀리 영화 더킹에 등장한 육교가 보인다.(출처=다음 카페 ‘행복한 산행’)

 

▲ 2009년 월내역 전경. 소나무 아래 건물에 역전다방 간판과 호수다방 간판이 함께 붙어 있다.(출처=다음 카페 ‘행복한 산행’)

역사에서 빠져나오면 제일 먼저 들어오는 풍경 중에 하나가 좌측 해변을 막고 선 원자력발전소의 콘크리트 돔이다. 어촌의 한가로운 풍경을 일순간에 팽팽한 긴장으로 바꿔버리는 구조물이다. 이처럼 낭만적인 해변의 풍경과 핵발전소의 가공할 긴장을 품은 역이 바로 월내역이다.

 

▲ 해변 어디서나 보이는 원자력발전소.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월내역전 마당은 좁다. 진입로 바로 옆에는 교회 십자가를 꽂은 가건물이 있고, 역사 맞은편에는 칼국수집과 카페 한 곳이 성업 중이다. 그리고 맨 좌측 끝에는 그 이름이 너무나 고전적인 역전다방이 하나 있다. 지금은 역전커피라는 간판이 붙어있지만, 블로그들의 옛 사진을 보면 역전다방과 은하수다방 간판이 함께 붙은 때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이유로 ‘은하수’라는 새 간판을 달았지만, 위치상 굳이 역전다방이라는 간판을 내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역전다방의 샷시문을 밀쳤다. 다방에 들어서자 나이가 들어 보이는 퉁퉁한 주인아주머니가 예상치 않은 손님의 등장에 더 놀라는 눈치다. 자리에 앉아 ”장사하십니까?”라고 묻자 “네, 장사는 하지만,..”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 손님 대신 고양이가 자리를 차지한 월내 역전다방

 

▲ 월내 역전다방. 바로 옆에 들어선 신식 카페와 대조를 이룬다.


다방 안쪽에 컵라면과 음료수, 과자 등을 쌓아 놓은 것으로 보아 동네 구멍가게 역할도 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옆에 신식 카페가 생긴 뒤로 다방 본래의 영업에 지장이 생긴 듯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른 뒤 분위기를 전환할 겸 내가 “옛 다방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이다, 계란 동동 띄운 쌍화차 한 잔 되느냐?”고 묻자, 그제사 아주머니가 약간 움츠려 보이던 인상을 풀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한약재 향기를 풍기며 쌍화차가 테이블에 올려질 때, 마침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능청스럽게 내 옆에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고양이를 안아 쓰다듬자 이를 살피던 주인아주머니, 이제는 완전 무장을 해제한 사람처럼 내게 고양이에 대한 사연부터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 미루어 짐작컨대 고양이도 아주머니도 사람이 무척 그리웠다.


고양이는 원래 다방 옥상에서 태어난 길고양이 새끼였다. 어디 가서 죽었는지, 어미가 새끼들을 둔 채 나타나지 않았고 아주머니가 밥을 갖다 주며 돌보았다. 새끼는 모두 네 마리였는데 세 마리는 죽고 녀석만 남았다. 최근 아주머니는 교통사고로 두어 달 입원을 했었다. 병원에서 제 살 길 찾아 떠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퇴원해서 어저께 다방 문을 열자마자 고양이가 쏙 들어와 자기 다리에 몸을 마구 부비더란다.


“예전에는 다방 장사가 잘되었느냐.”고 묻자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 10여 년 전만 해도 꽤 괜찮았다.”고 한다. 월내는 원자력발전소 증설 공사가 끊이지 않아 기차를 타는 사람이 많았다. 술시가 되면 바닷가에 줄 선 횟집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덩달아 역전다방 장사도 재미났다. 잘 나갈 때는 아가씨를 서너 명 이상 둘 때도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짬에 다방을 찾은 손님 중에는 매력적인 아가씨에 홀려 위스키티를 마시며, 다음 차~ 다음 차~ 하다 막차까지 놓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야말로 월내역 역전다방은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다방 같은 곳이었다. 아가씨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왠지 한곳이 비어 있는 남자들의 허전한 가슴을 달래던 곳이었다. 아래는 어린 시절 다방과 얽힌 사연을 추억하며 쓴 필자의 졸필 시 한 편이다.

역전다방 미스김 / 황주경
 
역전다방 미스김이 떠나가네
철길에 핀 코스모스처럼
하늘하늘 휘청휘청 가냘프게 떠나가네

푸른 제복 군인들이 많던 내 고향은
봄꽃처럼 화사하게 왔다가
가을바람처럼 쓸쓸히 떠나는
미스김 같은 여자들이 많았네

어린 내게 상냥했던 그녀였네
동네 여자들 눈총 따가웠지만
한달음에 달려가 가방 들어주었네

칙칙폭폭 기차는 들어오고
?조르바의 여인 부불리나처럼
허리 굽힌 그녀가 내 볼에 키스해주었네

역전다방 미스김이 떠나가네
철길에 핀 코스모스처럼
하늘하늘 휘청휘청 가냘프게 떠나가네


월내역 철도관사. 다방에서 월내역 옛 관사가 있는 곳으로 길을 잡았다. 일제강점기 철도역 주변에는 철도원들의 집단 관사가 조성됐다. 지금은 매각되거나 많이 철거됐지만, 유독 동해남부선에는 1930년대에 지어진 역 관사가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

 

▲ 일제강점기에 지은 월내역 옛 역장 관사


역에서 나와 울산 방향으로 10여 분 선로 옆을 걸어가자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두 채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네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한 채는 역장 관사이고 또 한 채는 선로반원 수장 관사라고 했다.

 

▲ 일제강점기에 지은 월내역 철도 관사

의외로 월내역 옛 관사는 개조의 흔적 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있어 놀라웠다. 지붕 처마 밑에 돌출창마다 처마를 얹은 모습이 고급져 보이고 정교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창 안에는 아직도 철도 제복이 걸려있었으며 우레탄 방수처리를 한 지붕은 황청색의 묘한 색감으로 찾은 이를 끌어당겼다. 한때 이곳은 월내 일대에서 가장 고급진 주택이었을 것이다.

 

▲ 언덕에 신설 중인 월내역 밑을 지나가는 열차 모습

관사를 나오며 봄꽃이 지천인 주변 풍경에 취해 ‘꽃밭에서’라는 노래가 절로 내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엔~ 이렇게 좋은 날엔~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정훈희가 바로 이곳 바닷가에 ‘꽃밭에서’라는 라이브 카페를 한다는 생각이 났다. 내친 김에 그 카페로 향하며 생각했다. 그녀는 왜 원자력발전소 옆에다 카페를 열었을까? 옳거니,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꽃은 이 세상의 모든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평화의 상징이 아니던가.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가 긴장의 바다를 평화로 이끄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황주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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