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

황은혜 기억과 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19-06-05 09: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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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동아시아 평화·인권 운동가와 함께하는 사제동행 특강 후기

재일 조선인, ‘서승’


1945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도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하던 중 1971년 4월 보안사에 불법 체포돼 고문을 당하다가 분신을 시도해 온몸에 중화상을 입었다. ‘재일교포학생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0년 2월 28일 석방될 때까지 19년간 갇혀있었다. 1988~2011년, 리츠메이칸 대학 법학부 교수로 일했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당국의 강제적인 사상전향 공작에 맞섰고, 석방 이후에는 고문 반대운동을 벌였다.(위 특강의 읽기 자료 참고)

일장기를 불태운 청년, ‘치바나 쇼이치’


오키나와의 반전·평화운동가, 1948년 오키나와 요미탄에서 태어났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치바나 쇼이치는 1987년 오키나와 국민체육대회에서 일장기를 불태운 사건으로 지명수배받아 유명해졌다. 이 사건으로 그는 우익의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후에 요미탄 마을 의원으로 당선, 3선 연임(1998~2010)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대규모의 민간인이 희생·학살된 것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물으며,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기지 철수를 외치는 등 반전·평화운동을 해오고 있다.(위 특강의 읽기 자료 참고)

1. ‘서승’의 이야기


그는 재일 조선인으로 태어나 한국인답게 사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조국이라 믿었던 곳으로부터 하지 않았던 일에 대한 진술을 요구받으며 고문당해야 했고, 이후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평화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겪은 모든 고통의 원인은 분단이라는 겨레의 특수한 상황이었다.


석방 후 오랜 시간 평화와 관련된 운동에 동참하면서 많은 강연을 다녔던 그는 꺼내기 힘든 이야기도 시종일관 유쾌하고 담담하게 이어나갔다,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하면 기억이 형성되지 않아요.”


대전 형무소에서의 삶은 참으로 참기 힘든 것이었는데, 그곳은 공간부터 수감된 모든 이들의 소통을 차단하도록 설계돼있어 사람을 보지 못하고 지내는 고통이 가장 컸다고 한다. 가장 즐거운 시간은 옥상에서 멀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풍경을 볼 수 있을 때였다고 하니 얼마나 단조로운 생활을 이어갔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옥중 19년>이라는 저서를 통해 더 많이 들을 수 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우리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교류라고 했다. 교류를 통해 소통하다 보면 신뢰가 쌓이고 결국 그 신뢰 속에서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2. ‘치바나 쇼이치’의 오키나와 이야기


오키나와는 19세기 말 일본에 편입되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옛 명칭은 ‘류큐’다. 류큐 왕국은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며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다. 스스로 ‘수례지방(守禮之邦: 예의를 지키는 나라)’이라고 칭하며 군사 시설과 무기를 폐기하고 평화적 교육을 통해 번성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에서 군사비 부담을 요구했으나 거절하기도 했다. 1906년 일본 남부의 사쓰마 번에서 류큐를 무력으로 침공·병합했는데 이때부터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는 양속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일본의 단독 지배를 받게 된 것은 메이지유신(1868) 이후다. 1879년에는 류큐 번을 폐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1984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류큐를 독자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오키나와 언어의 사용이 금지됐고, 각종 전통 풍습을 폐지하는 등 동화정책을 강요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를 사수하는 최전방의 거점이 됐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오키나와를 일본에서 분리해 미군의 전략기지로 삼으려고 했고, 미군 군사정부에 의해 1952년 ‘류큐 정부’가 세워졌다. 1960년부터 미군정에서 벗어나 일본으로 소속되기를 희망하는 ‘본토복귀운동’이 추진돼 1972년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으로 복귀 이후에도 오키나와는 여전히 태평양 방면 미군의 거점 기지가 되고 있다.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일본 주둔 미군시설의 75%가 집중돼 있다.
“권력자들은 모두 연대하고 있습니다. 민중들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인 치비치리가마 사건은 ‘집단 자결’이 아니라 ‘집단 강제 죽임’이 적절한 표현이며 그 모든 것의 원인은 일본식의 교육이었다. 아베의 장기집권을 막아내지 못한 일본 시민사회를 비판하며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는 지금도 여전히 반전 평화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식료품점 주인이며, 스님으로서의 개인적인 삶도 지켜내고 있다.

3. 후기


함께 강의를 들은 어느 고등학생의 소감을 빌려 이번 특강의 후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정답을 알고 싶었는데, 더 많은 질문만 가져가는 것 같습니다. 혼란스럽지만 어떻게 살면 좋을지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황은혜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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