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조약의 현장, 정해사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7-19 09: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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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청나라 1838년 아편 3000톤 수입

“아편의 위해성을 분명히 알고 있는 영국 상인들이 중국에 아편을 파는 것은 실로 마땅하지 않은 일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 상인들이 영국에 아편을 팔고 영국인들을 부추겨서 아편을 사서 피우게 한다면 여왕께서도 크게 분노하시리라 믿습니다.”(흠차대신 임칙서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


1820년대 청나라 조정은 아편과 관련된 논쟁이 뜨거웠다. 일부 관리들은 아예 아편 무역의 합법화를 주장했다. 합법화를 통해 안정적인 국가 재정 수입원이 될 수 있고, 아편 밀무역으로 발생한 부정부패를 근절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어떤 관리들은 한술 더 떠서 값싸고 질 좋은 국산 아편으로 수입 아편을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아편 흡연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관리들은 모든 아편은 국가와 백성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고 말했다. 아편의 범람을 이대로 방치하면 몇 년 후에는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울 병사, 군대를 먹여 살릴 세금을 낼 사람도 모조리 없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1838년에 이르자 매년 청나라에 수입되는 아편의 양은 4만 상자로 무게는 3000톤에 달했다. 그러자 아편 금지파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주류가 돼갔고 뜨거웠던 아편 논쟁이 정리가 됐다. 황제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청나라는 누르하치의 건국 이래 빼어난 군주들이 연속해서 배출됐다. 이 결과 200년에 걸쳐 제국의 기틀을 다져 놓은 상태였다.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고대시절부터 중국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북방 민족, 외몽골 지역까지 완벽하게 정복했다.


선대 명나라처럼 무능한 황제들이 툭툭 튀어나와 국정의 혼란이 야기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청나라 황실은 명나라 황실과 다르게 황실 재정을 97% 규모로 축소할 만큼 근검절약을 실천해 왔다. 가경제는 재위 기간 중 황제가 입는 옷조차 두 벌로 제한했다. 그는 신하들 앞에서 뜯어진 옷을 손수 꿰매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당연히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나 전횡도 없었다.


이러한 청나라의 번영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건륭제 치세 후반기부터였다. 1796년 가경제 때 일어난 백련교의 난은 8년간이나 지속됐고 힘겹게 진압됐다. 이 난을 진압한 것은 정부군이 아니라 지방 의용군인 향군이었다.


19세기 청나라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던 배경은 뜻밖에 머나먼 서양으로부터의 침입, 즉 이양선을 타고 나타난 영국이었다. 사실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을 처음 시작한 것은 청나라 초기인 1689년부터였다. 1715년에 이르자 영국 상관이 설치됐고 본격적인 교역이 시도된다.


산업혁명 이후로 영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널리 퍼지면서 청나라로부터 차를 대량으로 수입하게 됐다. 반면에 영국에서 청나라에 수출하는 모직물이나 면직물은 중국인들이 선호하지 않는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원래 모직물을 야만인들이나 입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모직물의 수요가 늘지 않았다.


그 결과 영국은 대청 무역에서 만성적인 적자에 늘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양국의 무역에서 결제 수단은 은이었는데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니 이만저만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 상인들이 무역적자를 흑자로 돌릴 수 있는 대책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아편이었다. 중독성이 강한 아편은 처음에는 광동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해 나중에는 중국 동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판로가 확대돼 나갔다.
 




아편을 몰수해 폐기한 임칙서

1773년 무렵, 한해 1000상자였던 아편 거래량이 아편전쟁이 일어난 1839년에는 4만 상자로 늘어났다. 급기야 당시 청나라 황제 도광제는 호광(호북성과 호남성) 총독 임칙서를 황제의 특명을 받아 전권을 위임하는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광주로 파견한다. 임칙서는 복건성 출신으로 27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한 수재였다. 게다가 청렴하면서도 부패에 대해서는 엄격한 인물이었다. 광동에 도착한 임칙서는 외국 상인들에게 앞으로 아편 밀수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가지고 있는 아편을 모두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를 실행할 때까지 외국인에게 식량 공급을 중단하며 모든 중국인들은 외국 상관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한다. 결국 이에 굴복한 외국인들에게 넘겨받은 아편 2만 상자를 소금물에 담갔다가 소석회를 섞어 3주 동안 끓여 아편 성분을 없앤 다음 모두 바다로 흘려보내 처분한다.


“국가를 위한다면 살고 죽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어찌 화를 피하고 복을 좇겠는가.” 임칙서는 그 당시 지녔던 단호한 의지를 시로 남겼다. 광주의 호문(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해 폐기했던 장소)에는 1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시가 남아 있다고 한다.


임칙서는 또한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은 외국인을 광주에 머물지 못하도록 모두 쫓아내는 강공책을 편다. 그런 와중에 마카오가 있는 구룡에서 영국인과 마을 주민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져 임유희라는 주민이 영국 선원들에 의해 살해된다. 이에 임칙서는 살해한 영국인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고 영국은 치외법권을 주장하며 인도를 거부한다.


마침내 임칙서는 마카오에 머물고 있는 영국인들에 대한 식량 공급을 중단하고 중국인들의 철수를 지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견디지 못한 일부 영국 상선들이 아편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광주에 입항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영국군은 군함을 동원해 이를 저지한다. 

 



‘천비 해전’과 아편전쟁

그때 이를 지켜보던 청나라 광동제독 관천배는 수군을 이끌고 ‘천비’에서 영국 군함과 맞서게 된다. 영국 군함이 영국 상선을 공격하려는 반면, 청나라 군함은 영국 상선을 보호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1839년 11월 3일 벌어진 ‘천비 해전’으로 아편전쟁의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천비 해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29척의 청나라 군함은 단 2척의 영국 군함에게 괴멸당하고 만다. 청나라 군함은 22척이 대파됐고 4척은 침몰됐으며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배는 겨우 3척뿐이었다.


한편 영국의 아편 상인들은 영국 의회와 파머스턴 외상에게 청나라와의 전쟁을 촉구한다. 이에 파머스턴 외상은 멜번 수상을 설득해 우선 영국 내각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의결하고, 영국 의회에서 ‘파병을 위한 군사비 지출을 승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는 찬반 투표를 진행한다.


1840년 4월, 투표 결과 찬성 271표, 반대 262표로 9표의 아슬아슬한 표차로 영국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의결했다. 이로써 영국 역사상 가장 최악의 결정, 수치스러운 아편전쟁(1839~1842)의 막이 오르게 된다.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4000명의 영국군과 16척의 군함이 중국에 도착하자 문제가 됐던 광동이 아닌 천진 공략에 나서게 된다. 천진은 청 제국의 수도인 베이징과 근접해 있고, 해안도시여서 이동이 쉽다는 장점을 갖고 있어 천진을 공략함으로써 청나라 조정을 위협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때 청나라 군대의 지휘관들은 영국의 포함들이 중국의 강으로 뚫고 들어오기에는 강의 수심이 매우 낮아 해안가 사람들을 대피시키면 충분히 영국군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할 수 있다고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매시스 호를 비롯한 영국군의 새로운 포함들은 얕은 수심에도 잘 떴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 어떠한 장애도 없이 이동이 가능했다.


심지어 육지의 교전에서도 영국군은 해안선을 따라 신속히 군대를 움직여 전략적인 위치에 주둔할 수 있었던 반면, 청군은 주로 도보로 이동했다. 청군은 중국의 중부지역에서 동부로 이동시키는 데에만 3개월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한편 임칙서는 광동에서 신병을 모집해 훈련시키고, 서양의 군함과 대포를 구입해 주요 길목에 배치하는 등 앞으로 있을 영국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천진 앞바다에 영국 함대가 출몰했다는 소식을 접한 청나라 조정은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이에 도광제는 직례총독(북경과 하북성 장관) 기선을 파견해 영국군과 교섭을 진행시킨다. 기선은 “이 사건은 원래 광동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교섭은 당연히 광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영국 측에 사정해 교섭 무대는 다시 광동으로 옮기게 됐다.
 

 


 

임칙서의 파면과 진강 함락

청나라 조정은 영국과의 교섭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해 영국이 가장 증오하는 임칙서를 파면시킨다. 임칙서를 대신할 새로운 흠차대신으로 임명된 기선은 광동으로 내려와 영국과 교섭을 진행한다. 결국 기선은 홍콩 할양, 몰수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 지급, 무역 재개와 같은 ‘천비 조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천비 조약은 체결 단계에서 중단된다. 베이징의 도광제가 천비 조약의 가합의 사항, 홍콩 할양이라는 내용에 분기탱천해 교섭을 중단시켰고 교섭 대표단을 교체했기 때문이다.


교섭이 중단된 이상 전쟁은 재개될 수밖에 없었다. 1841년 5월 24일 빅토리아 여왕 생일을 기해 영국군은 광주에 상륙한다. 살인·약탈·강간 등 영국군의 잔혹한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남편은 화를 입고 아내는 욕을 당해 두 사람 모두 죽었다. 아들은 꽁꽁 묶이고 어머니는 살길 없어 집안이 망했다. 집은 무너지고 묘는 모두 파헤쳐져 백골이 나뒹굴고 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하고 산천초목이 울어도 시원치 않을 참상이다.”


마침내 5월 27일 영국과 광주의 수뇌부 사이에 ‘광동 협약’이 이루어지고 아편전쟁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국의 파머스턴 외상이 딴지를 걸고 나섰다. 협약내용 중 “영국이 점령한 모든 요새를 청나라에 반환한다”는 내용이 대영제국의 위신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였다.


1841년 8월 10일 광주 사령관으로 부임한 영국인 헨리 포팅거는 이번에는 광동과 천진을 제쳐두고 홍콩과 하문을 점령했고 다시 북상해 주산 열도를 점령한다. 영국군의 작전은 장강 공략에 있었다. 이곳 강남지역은 청나라 조세 수입의 90%를 차지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장강 중류에 있는 난징을 정복함으로써 청나라로부터 더 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영국은 장강 하류에 있는 진해·영파·사포·오송을 마치 어린아이 팔 비틀 듯 쉽게 점령하고, 8월에는 상해를 점령했다. 그리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난징의 관문 진강에 다달았다.


하지만 진강 공략에서 아편전쟁 개전 이후 가장 큰 저항에 부딪힌다. 진강을 수비하는 해령은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 성내에 있는 신분이 불확실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 목을 베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막강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고 해령을 포함한 1400 명의 수비병은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난징조약과 영국 최혜국 대우

진강이 함락되자 진주한 영국군은 여자만 보면 욕을 보인 후 살해했기 때문에 능욕을 당하기보다 죽음을 선택한 여성들이 속출했다. 이제 난징 함락도 시간문제였다. 이쯤 되자 도광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842년 8월 29일 제1차 아편전쟁을 끝내는 ‘난징조약’이 체결된다.


협약 장소는 난징에 있는 정해사와 난징에 정박한 콘월리스 호 두 곳을 오가며 이루어졌고, 체결은 콘월리스 호에서 이루어졌다. 광동·하문·복주·영파·상해 등 5개 항구의 개항과 홍콩 할양, 배상금 총 2100만 냥을 3년 이내에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이 난징조약은 정작 아편전쟁의 원인이 됐던 아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편전쟁은 청나라의 일방적 패배로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됐다.


난징조약의 후속 조약에서 영국은 향후 청나라가 다른 국가에 어떤 유리한 대우를 부여할 경우 영국에도 이와 똑같은 대우를 할 것을 요구했다. 국제 외교 관계에 문외한인 청나라 정부 관리들은 ‘최혜국 대우’로 불리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독소조항인지 알지 못했다. 이 조항에 합의해 줌으로써 이때부터 청나라는 외교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난징조약이 체결될 때 회담 장소였던 ‘정해사’를 찾아갔다. 봄을 재촉하듯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가운데 정해사 옆 산정에 자리 잡은 어느 이름 모를 사찰에서 운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운무에 가려진 풍경은 한 편의 시요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정해사에는 ‘난징조약 사료 진열관’이 있다. 정해사의 뜻이 ‘사해를 평정한다’는 의미인데 근대에 들어와 치욕적인 난징조약이 이곳에서 열리게 됐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난징 시민이 모금해 만든 청동종이 정해사에 안치돼 있다. 종의 높이 1842cm는 난징조약이 체결된 1842년을 상징한다. 종 꼭대기 7.1cm 높이의 화구는 홍콩 반환일인 7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종 앞면에는 ‘경세종’의 글귀가 새겨져 있고, 뒷면은 ‘전국책’이라고 주조돼 있다. 지난 일을 잊지 않고 훗일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의미이리라.


현재까지도 중국이 아편전쟁을 계기로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난징조약은 중국의 쇠퇴에 따른 결과일 뿐이지 쇠퇴가 시작된 원인은 아니다. 1750년대 이래로 서방 국가들이 국력을 키워 나가고 있을 때 대청제국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문자옥’을 통한 사상 통제로 강국 건설에 대한 열망을 짓밟아 버렸다. 또 관리들은 부정부패로 제국의 혼란을 부채질했다. 잇따른 민란의 결과 농상업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는 가운데 지배계층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대청제국이 발전은 고사하고 퇴보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원인들이 복합된 1840년의 아편전쟁은 청나라의 폐쇄적, 독재적 정치 제도에 대한 일종의 업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정화의 대항해를 기린 정해사

애초에 정해사는 명나라 영락제 시기 무려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까지 해상로를 개척했던 ‘정화’를 위해 만들어진 절이다. 현재 정해사에는 ‘정화 기념관’이 있는데 기념관 안에는 당시의 기록들이 일부 보존돼 있다.


정화가 환관이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정화는 1371년 운남의 곤양에서 태어났다. 정화가 태어난 시기는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 지 이미 4년째 되는 해였다. 그때까지 운남은 원나라의 잔존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원정군이 토벌하러 내려오자 정화의 아버지는 결사적으로 저항하다가 전사한다. 


원래 정화의 집안은 대대로 원나라의 함양왕으로서 원나라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화는 이때 12세였지만 집안이 명군에 저항했으므로 거세를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 후 명나라에 잡혀가게 됐고 당시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훗날 영락제)에게 헌상된다. 영락제는 정화의 인물과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를 곁에 두게 됐다.


한편 71세의 나이로 주원장이 죽자 당시 황태손이었던 건문제 주윤문과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 주체 사이에 황위 계승을 둘러싼 골육상잔이 벌어진다. 4년에 걸친 ‘정난의 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정화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정난의 변에서 승리해 황제로 등극한 영락제는 이때 정화라는 성명을 하사했고 정화를 환관의 최고 지위인 태감으로 발탁한다.


영락제는 신생 명나라의 국위 선양(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듦)과 외국과의 교역 촉진, 정난의 변에서 패배하고 종적을 감춘 건문제 주윤문의 행방 추적을 목적으로 대항해를 추진하면서 총지휘자로 정화를 기용한다. 1405년 1차 대항해 때 정화가 거느린 선단의 규모는 거선 62척, 승무원 2만7800여 명이었다.
정화의 1차 대항해가 있은 지 93년 후에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한 바스코 다가마의 기선이 불과 120톤,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 호가 200톤 규모였던데 반해, 정화의 거선은 8000톤급이었다. 길이 150m, 너비 62m에 이르렀다.


정화의 항해로는 동남아시아, 서아시아는 물론 서아프리카의 동해안(7차 항해)과 홍해 입구까지 미쳤다. 1423년 6차 대항해를 마치고 귀환할 때는 무려 1200명이 넘는 외국 사절단과 상인들이 승선해 있었다. 이렇게 정화는 많은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는 대임무를 완수했다. 정화의 대항해는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넓히는 데도 크게 공헌했고, 중국 항해사에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리학의 발전에도 큰 업적을 남기게 됐다. 


하지만 정화가 이룩한 대업적은 영락제 사후 계승되지 못한 채 명나라는 쇄국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정화의 대항해가 애초부터 단지 명나라의 국위 선양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콜럼버스나 마젤란이 원양 항해에 나서서 지리상의 대발견을 한 것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만일 명나라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했거나 해양무역에 투자했더라면 오늘날 중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만한 역사적 선택이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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