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는 자의 발을 밝히는 석등(2)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09-04 09:28:24
  • -
  • +
  • 인쇄

일본에 비행기 헌납 운동을 한 양산의 정인두

원표(元標)의 양산 정인두(鄭寅斗)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조선인만으로 결성된 경남국방회인 ‘경남총후지성회(慶南銃後至誠會)’의 부회장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이 단체는 조선인에게 국방의식을 보급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도록 선전선동활동을 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직접 지원하기 위해 헌금과 헌납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 7월 6일, 울산비행장에서는 경남총후지성회와 경남관공서직원 일동이 헌납한 ‘진주호’의 헌납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지성회는 1938년 8월 6일 일제에게 ‘94식 수상 정찰기’인 ‘보국 223, 224호(제1, 2 경남지성호)’ 2대를 헌납했다.


정인두는 지역사회에서 1938년 양산실업보습학교 건립 기금 조성을 위한 ‘양산인사기성회(梁山人士期成會)’를 결성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양산군 안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을 구현하고 황국신민의 신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일 먼저 ‘소산인일(小山寅一)’로 창씨개명을 했다. 그는 창씨명으로 조선의 미신화된 풍수설에 근거한 매장 묘지를 하지 말고, 전통적 악습과 미신 타파의 관점에서 ‘화장(火葬)’할 것을 주장하는 ‘묘지(墓地)의 미화(美化)’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 양산 권인두의 창씨개명 신문 보도(부산일보 1940.2.15.)

소작민이 공덕비를 세운 지주 김정헌

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잠리에 가면 1911년~1934년 사이에 세워진 3기의 비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주가 소작인에게 베푼 행적을 기려 세운 송덕비다. 그 중 한 명이 하마비 근처에 세워진 3정 석등의 시주자인 창원 김정헌(金禎憲)이다. 그는 1930년 창원노동야학교가 경비 곤란으로 유지의 어려움이 있어 자주 문을 닫고 열고 했는데 결국 폐문 상태에 직면한 것을 창원면 소답리의 김정헌이 전 경비를 스스로 부담함으로써 야학을 유지하도록 해 칭송이 자자했다. 또 1930년 3월 15일에는 궁춘(窮春)을 당해 생계가 묘연한 빈민에게 벼 50석을 갈라주었다. 1933년에는 문둥병 예방을 위해 200원을 기부했다. 1939년에는 창원면과 군의 사회공공사업에 크게 기부해 공헌이 많았던 그가 창원동소학교 시설비로 600원을 기부했다(부산일보).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39년 조선경찰협회에서 주는 민간경찰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매일신보). 1933년에는 농공대부업, 화재보험대리업의 금융신탁을 한 마산농공금융(馬山農工金融)의 이사로 활동했다. 


‘정삼품전비서승김공정헌송덕비(正三品前秘書承金公禎憲頌德碑)’는 ‘동면소작인(東面小作人)’이 1934년 6월에 세운 것이다. 송덕비에는 “공이 선조의 공업을 계승하니, 백성들의 어려움 알아서라네./ 땅을 골고루 나누어 소작 주고, 조세 거둘 때 능히 관대했다네./ 조세가 적어도 이미 걱정하지 않고, 백성들 부리는 것을 기뻐했다네./ 이에 빗돌을 세워서, 사람들의 논의로 보전하는 바일세.”라고 적혀있다.
 

▲ 창원 김정헌 공덕 비문

450원 석등을 시주한 여신도들

그런데 정말 석등을 기생들이 시주했을까? 통도사 무풍한송 이름바위에는 40여 명의 기생 이름이 새겨져있다. 봉란, 향란, 벽도, 채란, 만년춘, 난희, 금홍, 계선, 춘흥, 선희, 초월, 월선, 경월, 국향 등 참으로 많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관리들과 함께 동행한 관기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예기(藝妓)로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기생들도 많았다. 기생 정칠성은 일본 유학도 다녀오고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도사에 다녀간 기생이 석등을 시주한 보살이라는 직접 증거는 없다. 통도사 여스님 중 기생 출신으로 유명한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인 흑치마 사다코로 유명한 배정자가 있다.


스님과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석등 기부자 6명은 여신도인 보살들이다. 대구의 채고불심, 마산의 김대륜화, 예산의 김진여성, 창원의 장해탈심, 마산의 강원만행과 김평등심, 구포의 노대덕화다. 이 중에서 경봉스님의 <삼소굴 일지>에 채고불심과 김진여성이 나온다. “1938년 1월 20일. 채고불심의 석등값은 음력 2월 말에 지불하기로 약속하다.”, “1938년 5월 2일. 예산군 읍내 김진여성 석등 대금 450원을 김구하 형에게 맡겨 놓다.” 이 기록을 볼 때 1938년 전후로 경봉스님이 주지로 있을 당시 통도사 무풍한송의 석등이 조성됐고, 석등값은 450원이었다. 동아일보에서 1938년 “현재 조선 가옥은 1채당 300원 내외가 적당한데 현재 호가는 600원 정도이다”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당시 석등 1개 값이 한옥 1채 값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37년 <삼천리> 잡지에 기생의 월수입이 50원에서 300원이라는 보도가 있다. 수입 측면에서 석등 시주자가 기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주 보살들은 기생이라기보다 상업 활동을 한 분들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기생 배출지 중에서 영남지역은 전주, 진주, 경주가 그 중심이다. 석등 시주자는 그 지역 출신이 한 명도 없다. 오히려 상업이 발달한 부산, 마산, 창원, 구포, 대구지역이다. 이 지역은 통도사의 포교 관할 지역이다. 특히 마산과 창원 같은 특정 지역이 등장하는 이유는 경봉스님이 한때 마산포교당에서 활동한 인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4정의 예산 김진여성과 2정의 구포 노대덕화는 그 아들 이름을 석등에 새겼다. 대구의 채고불심은 부산에까지 경봉스님과 동행하며 설법을 들을 정도로 불심이 깊은 보살이었다.
마음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 


상대석은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다. 팔각형에 연꽃이 하늘을 향해 있는 앙련(仰蓮)석을 얹었다. 이 기단부만 해도 성인 키 높이 이상이다. 기단부는 불상의 대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을 모시는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이다. 화사석은 불의 집이다. 불은 진리요, 삶의 이정표다. 석등의 불은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상징이다. 따라서 화사석은 부처님이 머무는 장소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화창(火窓)이 보통 네 개지만 통도사는 여덟 개다. 네 개는 사성제를, 여덟 개는 팔정도를 상징한다. 그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어둠을 밝히기를 기원한 것은 아닐까. 옛날에는 이 화창(火窓)에 나무틀이나 창호지를 붙여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화사석 위에는 연꽃이 활짝 핀 문양을 새긴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나는 이 옥개석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보통 눈 아래의 꽃을 보다가, 사람의 머리 위에서 그것도 하늘을 향해 자기의 꽃잎을 활짝 펴고 있는 꽃을 보노라면 저 자신도 창공으로 팔을 벌리고 있는 느낌 때문이다. 지붕돌 위에는 보배로운 구슬인 보주(寶珠)를 얹어 놓았다. 


부처님의 이야기 가운데 등과 관련한 일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의 등 하나(빈자의 일등, 貧者一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난타(難陀)라고 하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난타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을 위해 등불공양을 올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구걸하러 다녀 얻은 것이라고는 겨우 동전 두 닢뿐이었다. 난타는 동전 두 닢으로 등과 기름을 사고 부처님께서 지나가실 길목에다 작은 등불을 밝히고는 간절히 기원했다. “부처님, 저에게는 아무것도 공양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이렇게 보잘것없는 등불 하나를 밝혀 부처님의 크신 덕을 기리오니, 이 등을 켠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도 다음 세상에 태어나 성불하게 해주십시오.” 밤이 깊어가고 세찬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밝힌 등이 하나둘 꺼졌다.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도 예외일 수 없이 꺼져 갔다. 그러나 난타의 등불만은 꺼질 줄을 몰랐다. 밤이 이슥해지자 부처님의 제자 아난(阿難)은 이 등불에 다가가 옷깃을 흔들어 불을 끄려 했다. 하지만 이 등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밝게 세상을 비추었다. 그때 등 뒤에서 바라보고 계시던 부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아난아! 부질없이 애쓰지 마라. 그 등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한 여인이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절대 꺼지지 않으리라. 그 여인은 이 공덕으로 앞으로 30겁 뒤에 반드시 성불하여 수미등광여래(須彌燈光如來)가 되리라.” 불경(佛經)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에 나오는 이야기다.


불빛은 어둠을 이겨낸다. 가난 속의 작은 성의는 부귀한 사람들의 많은 보시보다도 가치가 더 크다. 꺼지지 않는 불빛은 없다. 하지만 번뇌와 무지로 가득 찬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추어 어둠을 이겨내는 것은 진리다. 진리는 밤하늘의 별이며 불빛이다. 진리는 물질적 욕망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불교에서는 비움의 마음이 진리의 출발이다. 빛없는 무지한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등불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 다비장 가는 길 양쪽에는 새로 만든 석등이 세워져 있다.

일제 잔재라 해도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이 석등을 일제강점기의 유물로 보고 눈살 찌푸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역사적 민족적 민중적 고통은 엄청나게 많다. 우리 문화유산을 말살했고 불교 또한 왜색으로 변모된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면 도대체 얼마나 없애야 할까. 실제로 통도사 적멸보궁의 석축이 왜성형식이라 하여 조선성 석축으로 바꿨다. 하지만 적멸보궁 안의 울타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산물이 섞여 있다. 


우리 문화유산에는 일제강점기의 것들이 많이 있다. 그것도 우리 문화유산으로 인정하고 보존해야 한다.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찰의 문화 유적도 마찬가지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모함을 추구해야지 특정한 시대의 흔적이라 하여 강제로 철거하듯이 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 부도원 앞 노대덕화 보살 석등, 석등은 밤과 낮에 꺼지지 않는 등불이다.


오욕의 문화도 우리 문화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 평가는 엄정하되 남겨둠으로써 교훈이 되는 역사도 있다. 특정한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과 유적에 역사의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 유산은 남겨져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없으면 욕할 대상도 사라진다. 노골적인 왜색문화의 잔재라도 우리의 문화유산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색문화 유산에 왜색이란 딱지를 붙일지언정 특정한 시대의 상징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아픈 역사를 되새길 수 있다. 문화유산은 시간을 먹고 살아가는 우리 역사의 지문이다. 


이병길 시인, 울산민예총 고문, 역사문화 질문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오늘의 울산 이슈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