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그림자

조숙 시인 / 기사승인 : 2020-09-09 09: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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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세상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길을 걸어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은 늘 긴 그림자를 보며 걸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태풍 10호 ‘하이선’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구름의 그림자에 덮여있다. 그림자는 실체의 반영이라서 닮기도 하고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아티스트 다카마쓰 지로는 그림자를 작품으로 <그림자>를 그렸다. 자신은 ‘그림자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한다. 


그림자 이야기를 재미나게 만났던 책은 피터팬이었다. 피터팬이 웬디 집 창문을 황급히 나오느라 그림자를 두고 오게 된다. 다시 그림자를 찾으러 와서 웬디가 그림자를 꿰매 주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림자가 실체에서 떨어져 다른 의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우선 충격을 받았다. 실체에서 떨어져 다니는 그림자, 다시 붙어 다니지 않으려고 하는 것, 바느질로 발바닥에 붙일 수 있다는 것들은 몇 십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림자는 빛이 직진하는 성질 때문에 생긴다. 빛이 투명하지 않은 물체를 만나게 될 때 반사되거나 흡수된다. 그래서 반대편에서는 빛을 받지 못하고 깜깜하게 보이게 되고 이것을 그림자라고 한다. 그러니까 빛을 만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은 ‘우리 인생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우리가 햇빛을 받으며 서 있기 때문에 생긴다’라는 시인다운 말을 남겼다. 행복의 짝으로 늘 고통이나 불행이 따라다니는 것은 피터팬에 붙은 그림자처럼 당연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그림자는 눈앞에 있었다. 태양이 비치거나 가로등이 비칠 때 그림자가 짧게 혹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등 뒤에 그림자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젠가 바람이 부는 깊은 밤, 산발한 그림자가 길을 뒤덮으며 출렁거리는 길을 엄마의 두꺼운 손가락에 매달려 걷던 밤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위급하시다는 전갈을 받고 밤을 도와 가다가 폭우로 끊긴 길을 걸어서 갔던 듯하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그림자의 실체가 있다는 것이므로, 무서운 그림자를 보면 더 무서운 실체를 상상하게 되고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그날의 산발한 나무 그림자는 종종 마음속에 나타나 출렁거렸다.


그림자는 실체와 동일할까. 한낮 내 그림자는 짧고 진하다. 저녁 무렵의 그림자는 길고 옅다. 그리고 금방금방 모양이 변한다. 실체와 다르다. 그런데 그림자가 실체의 반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림자를 없애는 방법도 있다. 아예 어둡게 하면 된다. 그림자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방법도 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다. 고통이 싫으면 행복을 없애면 된다. 그림자는 행복의 대가로 지불하는 노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른이 되면서 그림자의 기억은 발에 길게 매달려 끌고 가는 것이었다. 등 뒤를 돌아보며 끝날 것 같지 않은 삶의 무게가 질질 매달려 있었다. 정면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따위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누구에게나 청년 시기는 힘든 시간인 것 같다. 


피터팬은 창문 안에 남겨진 그림자를 찾아서 발바닥에 붙이고 기뻐했다. 웬디가 따끔따끔한 바느질로 그림자를 붙여주었다. 그림자를 만나 한 몸이 돼 몸을 움직여보는 피터팬을 보면서 기뻐했다. 안심하면서 함께 날아다녔다. 이제 사회의 그림자를 몸에 붙여 함께 날아다닐 때다. 어둡고, 색이 없고, 소리가 없지만 빛을 마주한 값이기 때문이다. 


조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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