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의 역설

최병문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19-12-04 09: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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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문 정치칼럼 ‘사람세상’

1964년 당시 소수 야당이었던 자유민주당 김대중 초선 의원은 동료 의원의 구속동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혼자 연속 발언했다. 다수파의 독주를 막는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행위로서의 무제한 토론, 즉 필리버스터가 우리나라 국회에서 처음 행해져서 결국 해당 안건 처리를 무산시킨 역사적 장면이었다. 그는 나중에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 됐다.


1973년 유신헌법에 따른 국회법은 국회의원의 발언 시간을 최대 45분으로 제한하면서 필리버스터를 사실상 폐기시켰다. 그 후 2012년 5월 2일,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새누리당과 통합민주당 여야합의로 국회(선진화)법이 개정되면서 필리버스터가 부활했다.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토론의 종결을 원하고 무기명 투표로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종결에 찬성할 경우가 아니라면 필리버스터는 회기 내내 계속할 수 있다.


2016년 2월 23일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목표로 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김광진 의원, 은수미 의원, 정청래 의원 등이 각각 10시간 이상 연설했고 마지막으로 이종걸 원내대표가 총 12시간 31분 동안 무제한 토론함으로써 우리나라 헌정사상 가장 긴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웠다. 국민들은 합법적으로 필리버스터에 헌신한 의원들에게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무제한 토론의 효과는 해당 회기에 국한된다는 법 규정에 따라, 테러방지법은 자동으로 다음 회기 첫 본회의 표결에 부쳐져 통과됐다. 


국회선진화법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꽃피우는 씨앗이 될 수 있지만, 여야 대치가 극에 달했을 때에는 국회 공전이 불가피해 식물국회를 만들 수도 있다. 신속처리안건 지정제도, 이른바 패스트트랙은 이러한 우려 때문에 마련된 것이다. 다시 말해, 특정법안이 본회의에 무제한 상정되지 못하거나 주요 쟁점법안을 처리하지 못해 식물국회가 되는 부작용을 방지하고자 도입한 장치다.


20대 국회에서 제1야당이 된 자유한국당은 자신들이 만든 국회선진화법의 요체인 패스트트랙과 필리버스터 모두를 당리당략에 따라 무력화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2019년 11월 29일 본회의 상정을 앞둔 199개 전체 법안을 대상으로 필리버스터 신청을 했다. 이 또한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유치원3법(사립학교법·유아교육법·학교급식법 개정안)’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자유한국당은 여야가 합의 처리한 법안과 국정운영 필수 법안뿐만 아니라 자당 의원들이 추진해왔던 법안 26건까지 모두 신청함으로써 국회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국회 선진화를 위한 법이 오히려 후진적인 발목잡기 정치에 악용되면서 정상적인 정치를 도태시키는 현실이다. 


자유한국당은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낸 유치원3법 개정안이 패스트트랙을 타고 국회 본회의에 자동 상정되는 당일에 갑자기 ‘맞불 수정안’을 내놓았다. 교육부와 국회, 사학비리추방 운동단체 등이 “사립유치원 이사장의 사유화 보장법”이라고 규정한 자유한국당의 맞불 수정안은 헌법재판소의 결정 내용들까지 모두 뒤집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제 결단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이 필리버스터 신청을 공식 철회하지 않고 국회 정상화에 협조하지 않으면, 문희상 국회의장의 적극 협조를 받아, 이른바 ‘4+1’ 연대로 한국당을 배제하고서라도 예산·법안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과 정치세력이 연합해 국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정상화하는 방안을 선택해야 할 시점이 됐다. 


‘4+1’ 연대가 최대 동원 가능한 161석에 민중당 김종훈 의원, 무소속 김경진·손혜원·이용호 의원 및 문희상 국회의장 등 잠재적 우호표를 다 합치면 과반수 148석을 넘는 최대 166석이다. 국회법 규정을 이용한 이른바 ‘살라미 본회의’ 전술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다. 필리버스터 관련 내용을 규정한 국회법 106조 2에 따르면 “회기가 끝나는 경우에는 무제한 토론의 종결이 선포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해당 안건은 바로 다음 회기에서 지체 없이 표결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고, 한 번 필리버스터가 실시된 안건은 재차 신청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정치는 민생을 위해 행해야 한다. 국민 다수의 뜻을 배반하고 소수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는 선택은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 제1야당 자유한국당이 ‘민식이법’ 등 어린이 안전 관련 법을 정쟁의 인질로 삼아 국민들 마음속 역린을 건드리고, 여야가 합의했던 ‘청년기본법’과 ‘데이터3법’을 막아 젊은이들의 꿈을 뺏은 것은 우리나라 미래를 막아서는 정치적 만행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유치원3법, 연동형비례대표제선거법, 공수처법 등 패스트트랙에 올라 숙려기간을 거친 법안들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국민을 볼모로 민생테러 인질극을 벌이는 자유한국당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말고 뜻을 같이하는 다른 야당들과 함께 주저 없이 개혁과 민생의 길에 나서야 한다.


최병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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