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동백섬과 동백나무가 자생했던 지역의 전설(3)

정우규 (사)한국습지환경보전연합 이사장 겸 대표 / 기사승인 : 2019-12-26 09: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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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동백

마. 제비섬[연자도(燕子島)]의 진시황 약초 전설과 부자와 도둑 전설

제비섬은 온산읍 당월리 동북쪽에 있는 무인도로 제비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 이름이 붙여진 섬이다. 제비섬은 각종 고지리지와 읍지 등에 연자도(燕子島)로 수록돼 있다. 일설에는 육지에서 날아온 제비들이 이 섬에서 쉬었다가 겨울나기를 위해 남쪽으로 날아갔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섬은 당월에서 2.27km 거리에 있으며, 면적은 1만7690㎡, 해안선은 844m다. 지번은 당월리 산 1번지이며, 위도는 동경 129°12’, ‘북위 35°25’이다. 가까이에 이팔도가 있어 옛날에는 연자도의 이름을 쌍둥이 ‘자(孖)’자를 써서 연자도라 했다. 이 섬을 큰 섬 혹은 대도라 부르는 건 울산 주위에서는 제일 큰 섬이기 때문이다. 이 섬에는 1970년대까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자생했다고 한다. 이 섬에는 백년생 이상의 곰솔들이 군락을 이뤘고, 약간의 동백나무와 살대(이대) 숲이 있었다. 그러나 동백나무는 1970년대에 들어 정원수와 분재 붐으로 무단 채취됐고 곰솔 등은 해안경비 부대의 사격으로 화재가 나 불타 사라졌다.
이 섬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진시황과 이곳 약초의 전설이고 다른 하나는 부자와 도둑의 전설이다.

1) 진시황 약초 전설

이 섬에 약효가 뛰어난 약초가 있어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제비섬을 다녀갔다는 전설이 있다. 약효가 뛰어난 약초는 제비섬 약쑥이다. 제비섬 약쑥은 그 효험이 탁월해 한의학의 비조 황제 헌원의 <황제내외경>에도 명시됐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옛날부터 제비섬 약쑥이 천하제일의 약쑥이라고 알려졌다고 한다. 


이 쑥은 단오 이전에 채취해 그늘진 곳에 말려뒀다가 병에 따라 달여서 먹거나, 쑥뜸 혹은 삶은 물에서 생기는 김(증기)에 좌욕을 하면 금방 효험을 본다는 명약이다. 과거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서 이곳의 쑥이 좋다는 말을 듣고 원산리(뒷불럼)에서 배를 타고 가서 쑥의 뿌리조차 남기지 않고 자루에 가득 담아 간다고 해, 이 약쑥의 종자조차 남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1970년대 해안경비 군 초소에서 실시한 사격으로 불이 나 섬 전체가 불타버림으로써 울창하던 숲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곳은 개인 회사에서 공장부지로 개발하면서 천하제일의 약쑥이 사라졌고 주민들은 비통해했다. 이곳 약쑥 약효가 그만큼 뛰어났다면 이 약쑥을 건강보조식품이나 제약으로 개발하는 것이 공장의 건설보다 나았을 수 있었는데 대단히 아쉽다. 같은 식물이라 할 강화도 약쑥은 건강보조식품으로 개발해 연 매출액이 1000억 원이라고 한다.

2) 부자와 도둑 전설

제비섬은 <울산읍지>(1934)와 <흥려승람>(1938)에 울산 병영성 남쪽 40리에 있다(在府南四十里)고 실려 있다. 1938년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울산읍지와 흥려승람에서 설명된 거리보다 10리 더 먼 울산 병영성 남쪽 50리에 있다[재부남오십리(在府南五十里)]고 실려 있다. 이 섬에 공장부지 공사를 하기 위해 문화재를 발굴하면서 이 섬의 부자와 도둑 전설이 역사적 진실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온산읍지>(2002)에 의하면 참깨를 만 석이나 하는 큰 부자가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이 섬에 살았다고 한다. 이 부자가 뭍에 한 번씩 드나들려면 뱃길이 불편해 섬의 동쪽에 있는 큰 바위를 옮겨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다리가 반쯤 완성됐을 때 정체불명의 도적들이 나타나 만석꾼의 재물을 모두 약탈해 배에 싣고 사라져 버렸다. 이에 부자는 섬을 떠나 버렸고 섬은 무인도로 남게 됐다.


2010년 울산발전연구원이 이 섬을 발굴해 전설의 현장을 확인했다. 이 기관은 제비섬을 발굴하면서 고려시대 부자의 집터와 청자 등 다양한 유물을 발견했다. 제비섬에는 13세기 고려시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울산지역 호족이 섬으로 피신해 항거했던 곳으로 확인됐다. 제비섬 공장터 유적에서 온돌시설을 갖춘 고려시대 집터 20여 곳과 함께 금동여래불상과 청자베개 등 다양한 종류의 청자 유물을 발굴했다. 이 유물은 현재 울산박물관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 때 지방호족이 섬으로 피신했던 사실을 알려주는 유적이 확인되기는 울산에서 처음이라고 한다. 


제비섬 부자와 도둑의 전설, 문화재 발굴로 그동안 전설로만 남아 있던 역사적 사실이 발견됐다. 전설이 현대에는 비록 허구처럼 느껴질지라도 그 시작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섬의 문화재 발굴은 한반도 최남단에 속하는 울산지역조차도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었던 몽고병란의 소용돌이가 비켜갈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당시 울산지역의 부호들도 민중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화도에 피신해 자신들의 호사와 안락함만 추구했던 최씨 정권 같은 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도 모자라 섬에서 뭍으로 드나드는 것을 편리하게 하려다가 급기야 재물을 적에게 내어 주는 꼴이 돼 모든 재산을 강탈당했거나 도둑질을 당해 망해버렸다. 이 발굴과 문화재의 발견은 전설이 한 지역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역사적 사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역사성과 지역성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바. 매미섬 명선도(鳴蟬島) 모세의 기적

김정호가 1864년에 간행한 <대동지지>에는 명산도(鳴山島)가 울산부 남쪽 10리(南十)에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울산읍지>(1934), <흥려승람>(1937), <조선환여승람>(1938)에는 명선도(鳴蟬島)가 울산부 남쪽 오십리에 있다[재부남오십리(在府南五十里)]고 실려 있다. 


이 섬은 울주군 서생면 진하리에 속하고 섬의 넓이가 1만1000㎡이다. 이 섬은 회야강 하구 진하해수욕장 앞에 있다. 주변에 서생진성이 있어 국토 수호의 현장이며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서생왜성이 있어 정유재란의 접전 현장이다. 이곳은 곰솔이 우점하고 동백나무, 후박나무, 인동덩굴 등의 나무와 사데풀, 갯메꽃, 갯완두, 갯무, 갯질경, 갯사상자 등의 염생식물 그리고 계요등, 참나리 등이 자생하는 무인도였다. 


명선도라는 이름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 섬이라는 뜻을 가진 ‘맨섬’이라는 소리가 변해 ‘매미섬’이 됐다고 한다. ‘맨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매미 선(蟬)’자가 들어간 명선도(鳴蟬島), 여름철에 매미가 많이 울었으므로 ‘매미가 우는 섬’, ‘우는 매미의 섬’이라는 뜻에서 명선도(鳴蟬島), 산이 우는 섬이라 해 명산도(鳴山島)라고 불렀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서 1918년에 간행한 5만분의 1 지도에는 ‘이름난 신선의 섬’이라는 뜻의 명선도(名仙島)로 표기하고 있다. 이 섬은 뭍과 500여m 떨어져 있고 밀물 때는 바닷물이 빠져나가 진하마을과 연결된다. 이런 바닷물의 갈라짐 현상은 밀물과 썰물에 의한 물 높이의 차이로 썰물 때 바닷물이 빠지면서 주위보다 높은 바다 밑 지형이 바다 위로 올라와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구약성경에서 모세의 지도 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면서 일어난 홍해의 물 갈라짐 현상과 같다고 해 소위 “모세의 기적”이라고 한다. 명선도와 진하마을 사이에 평소 수심 2m이던 바닷물이 매년 음력 2월 말이나 3월 초에 시작해 음력 4월까지 한 달가량 낮 12시에서 오후 4시 사이에 하루 두 번 진행되는데, 이때는 이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지역은 진도, 하동군 진교면 토끼섬, 여수시 사도, 보령시 무창포, 화성시 제부도 등이 있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은 전남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2.8km의 바다가 갈라져 만드는 바닷길이다.

사. 장생포로 떠넘긴 양죽마을 대섬(竹島)

<경상도속찬지리지>(하연, 1465)에는 현재 장생포 근처에 동백포(冬白浦)라는 어랑이 있었다고 한다. 이 동백포가 지금 어디에 해당되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동백포는 지금의 대섬(죽도) 근처 포구였던 것 같다. 대섬하면 목도마을 앞의 동백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동백섬을 대섬(죽도)이라고 하는 것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를 간행하면서 동백섬을 죽도로 잘못 표기한 데서 생긴 오류를 바로잡지 않아서 생긴 잘못이다. 여기서 대섬이라 함은 남구 매암동의 대섬 죽도다. 이 대섬(죽도)은 울산지방항만해운청 뒤에 남아 있고 윤수일이 작사 작곡 노래한 ‘환상의 섬’ 노래비가 서 있으나 예전에는 울산항 섬목마을 앞에 자리 잡고 있었던 조그만 섬이었다. 이름이 말해주듯 예로부터 이대나무[전죽(箭竹)]가 많아 이를 화살로 만들어 관아에 상납하던 곳이다. 이 섬에 동백나무가 자생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장생포 동백포라는 어랑이 나오고 동백섬을 죽도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대섬(죽도)의 전설도 조사했다.


대섬은 장생포항(長生浦港)과 양죽(養竹, 楊竹) 마을의 어귀에 있는데, 다소 거리가 가까운 양죽에서 섬의 관리를 맡게 됐다. 섬을 관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화살 공납이었다. 잘 다듬은 화살대(이대)를 나루터까지 옮기는 일도 힘들거니와 수량이 적거나 품질이 떨어지면 관아에 불려가 곤욕을 치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을에 큰 부담을 주는 섬이 장승개(長承浦) 중간에 있으니 양죽 주민들은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섬을 장승개 쪽으로 떠넘기기 위해 주민들은 고심을 거듭했는데, 어느 날 마을 지도자[동수(洞首)]의 머리에 묘책이 떠올랐다. ‘이제 살았다’며 무릎을 탁 치는 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양죽 사람들은 장승개(장승포)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당신들이 별신(別神)굿을 할 때, 제당의 고을막(골매기) 신을 영감신이라 하고 대섬의 신을 할멈신이라 해 서로 짝을 이루는 신으로 신봉했으니, 영감신의 부인인 할멈신이 있는 대섬은 장승개 당신들의 것이라는 논리로 설명해 대섬을 장승개로 떠넘겼다. 대섬을 장승개에 떠넘긴 양죽 주민들은 화살 공납에서 오는 고통을 덜게 됐다. 이 전설은 <울산남구지명사>(남구문화원, 2010) 등에 실려 있다.

아. 처용리, 처용암 그리고 처용랑

처용암은 과거 처용리에 속했다가 청량천(외황강)의 흐름이 처용리 쪽은 하안을 침식하고 황성동 쪽은 퇴적시킴으로써 지금은 황성동에 속한 작은 바위섬이다. 처용암이라는 이름은 이 섬이 속했던 처용리와 처용설화에서 따왔다. 이 섬이 동백나무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과거 처용암이 속했던 처용리에는 도박골이라는 작은 골짜기가 있다. 도박골이라는 이름은 동백나무가 자라는 골짜기에서 유래한 땅이름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동백의 어원이 꽃이 질 때 일반적인 꽃들과 같이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지 않고 칼에 잘리는 것 같이 통째로 떨어지는 꽃이라고 해 ‘도바기’라고 했던 것 같고 음운변천의 과정에서 ‘도바기’ ‘기’의 ‘ㄱ’이 ‘바’에 연철돼 ‘도박이’가 되고 여기에 ‘골’이 붙으면서 ‘이’가 탈락돼 ‘도박골’이 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처용암에 개동백이라고 부르는 사철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처용암에 몇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랐을 개연성이 있다. 

 

▲ 남구 황성동 외황강 하구에 떠 있는 처용암 ⓒ이동고 기자


처용리에는 동백나무가 자생했고, 이 마을에 있는 도박골이란 지명의 ‘도박’은 동백의 어원이 ‘도바기’나 ‘도박’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이름이다. 처용리와 처용암은 위치적으로 동백섬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고 이들의 이름이 처용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니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처용리와 처용암 그리고 처용랑 설화는 동백나무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할 수만은 없다. 처용암은 처용이 바다에서 나타난 바위이고, 처용리는 처용암이 속했던 마을이며, 처용은 이때 나타난 동해 용왕과 그 아들 7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처용설화는 <삼국유사>(일연, 1285)에 실려 있는 설화이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처용리, 처용암 그리고 처용랑의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울산으로 나들이했다가, 경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침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려 대낮에 구름이 끼고, 안개가 짙어 앞을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에 왕이 일관(日官)의 조언에 따라 동해의 용을 달래기 위해 근처에 절을 세워주도록 왕명을 내리니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동해의 용은 크게 기뻐해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며 덕을 찬미했다. 그중 한 아들이 임금을 따라가 왕정을 보필했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헌강왕은 오래도록 처용을 곁에 두고자 어여쁜 아내를 배필로 삼게 하고, 급간(級干)이란 벼슬을 하사했다. 평온한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처용의 아내를 탐낸 역신(疫神)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해 몰래 동침하고 말았다. 서라벌의 달밤에 늦게까지 놀다 들어온 처용은 역신을 보고 역정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위적인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이두로 돼 있어 학자들마다 해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동경 밝은 달에 밤 드러 노니다가 / 돌아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 네히러라 / 둘은 내해였고 둘은 뉘해인고 / 본대 내해다마는 뺏겼으니 어찌하리꼬


이에 역신은 무릎을 꿇고 사죄하되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과오를 범했으나, 공이 노하지 않으니 감격했으며, 맹세코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는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요사한 귀신을 쫓고 경사를 맞아들였다. 


정수일은 문화 교류사적인 측면에서 처용을 아라비아 상인이라고 주장하고, 조용전은 체질인류학적 측면에서 처용을 울산 토착세력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일부 학자들은 화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처용의 전설이 주제가 된 처용무는 신라, 고려, 조선에서 궁중무로 전승됐다. 1971년 1월 8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됐고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처용무란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이다.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 살던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전염병을 옮기는 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처용무는 5명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데 동은 파란색, 서는 흰색, 남은 붉은색, 북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이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해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하다.


정우규 (사)한국습지환경보전연합 이사장 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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