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보더 더 붉은 하목정 배롱나무

이동고 기자 / 기사승인 : 2019-08-26 09:3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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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쓰는 자연이야기

▲ 배롱나무 한창인 하목정에는 인생샷을 얻으려는 관람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동고 기자

 

[울산저널]이동고 기자= 낙동강 걷기 여정은 강정고령보 위쪽 다사읍 문산리에서 시작했다. 가는 길옆에는 수수들이 벌써 고개를 숙이고 붉은 양파망을 둘러쓰고 있다. 눈 밝은 참새를 피하기 위함이다. 수수는 기장이나 조와 더불어 한반도 초기유적에서 나오는 작물이지만 점차 재배면적이 줄고 있다. 시럽이나 당밀도 만들고, 술을 만드는 중요한 재료로 고량주, 문배주나 계명주(고구려 대표 술로 경기도 화성에서 맥을 이음)를 만든다. 옥수수와 가까운 집안으로 건조한 지역에도 잘 자라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작물이다. 예전 수수팥떡은 액운을 막는 아이 생일에 없어서는 안될 음식이었다. 모든 가치는 시대에 따라 변해 간다.  

문산리는 낙동강을 끼고 가는 마을이라 민물고기를 이용한 매운탕을 파는 식당이 많다. 마을 별칭을 아예 ‘물고기 마을’이라고 붙여 놨다. 강변을 향한 넓은 벽에 곽도경 시인이 지은 ‘나룻배 그리고 기억’이라는 시를 벽화로 만들어 놨다.

기다려야 해 나는 나룻배 / 버드나무 숲으로 난 오솔길 따라 내게 올 수 없었던 긴 세월 거슬러 네가 내게로 온다면 / 자박자박 네가 걸어오던 발소리 기억하는 귀가 나보다 먼저 나루터에 나가 앉아 기다리겠지 / 바람이 불면 제 맘대로 뒤척이는 나뭇잎처럼 너를 기다렸던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뒤척이며 출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날들 / 오래전 그때처럼 네가 내게로 돌아온다면 근육 도드라진 팔뚝으로 힘차게 노 저어 나를 저 강물 위에 띄워 준다면 / 노을빛 풀어놓은 강물 위에서 뜨겁게 너를 안고 흔들려야지

한 편의 시가 폭염과 맞서 걷는 길손들 마음을 어루만진다. 지역이 가진 장소성은 어울리는 이런 시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문산나루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만난다. 이 문산나루터 근처에는 영벽정(映碧亭)이 있고 낙동대교를 만들기 전에는 사문진 나루터, 박석진 나루터와 함께 근방 고령장, 다끼장(고령 다산면), 동곡장, 왜관장, 선남장을 오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예전 문산나루터는 드넓은 금빛 모래밭과 주변 농경지로 겨울에 기러기들이 무리지어 나는 낙조가 장관이었다는데 4대강 개발로 많이 훼손되었다. 낙동강은 하빈면 동곡리를 타고 삥 돌아간다. 강둑길과 접한 곳곳에 연 농사를 짓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드문드문 핀 큰 꽃이며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물을 맑게 할 것이다.


강변을 내려가자 물속에 잠겨 죽은 버드나무들이 원시 늪 같은 신비로움을 연출하고 있다.
빨리 자라고 물속에 4~5일을 잠기면 바로 죽어버려 버드나무 생들은 아주 역동적이다. 강변의 삷, 경계의 삶들이 다 그러할 것 같았다. 쭉 뻗는 길을 폭염에 허덕이며 걸어가니 성주대교가 나오고 붉은 배롱나무에 뒤덮여 있는 하목정(霞鶩亭)이 나온다.


배롱나무 한창인 하목정은 사람들로 그득하다. 대부분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있어 모두 인생의 샷을 얻으려고 단단히 준비하고 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대장이 원래 사람이 살고 있는 정자인데 오늘은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귀뜸한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선 이종문(李宗文)이 1604년에 건립한 것으로 원래는 제택(第宅)의 사랑채였으나 안채가 없어진 후 정자로 사용하고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인조가 이 집에 머문 적이 있는데 하목정이란 당호는 그 때 직접 썼다고 알려졌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북쪽에는 하옹(霞翁) 이익필(利益馝, 1675~1751)의 불천위(죽은 사람의 신주를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사당이 모셔져 있다. 배롱나무는 의병의 붉은 열정을 담아내고도 남았다.

 

곳이어 도착한 곳이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순천 박씨 집성촌인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과 이웃한 파회마을이다. 삼가헌(三可軒은 선비로서 갖춰야할 3가지 덕목을 담은 건물로 천하와 나라를 바르게 할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삶. 부속건물인 하엽정(荷葉亭)은 마당에 사각 연못을 만들었는데 마침 때를 잘 맞춰 배롱나무꽃과 연꽃을 동시에 보는 호사를 누렸다.
박팽년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그 당시 둘째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고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어명에 사실 아들을 낳았지만 마침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 서로 아이를 바꿔 목숨을 살렸다고 한다. 이렇게 살아남은 박팽년 7대손인 박숭고가 조선 인조 22년(1644), 묘리(묘골마을)에 별당을 지었다. 그 후 충효당으로 고쳐 청년에게는 충과 효, 예와 악을 가르치고 활쏘기, 말몰기 등을 실습시키고, 부녀자에는 가정 법도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바꾼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이다.


마실 물도 바닥날 즈음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가실(佳室)성당에 오후 4시쯤 도착했다. 파란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솟은 붉은 성당. 1895년 파리외방선교회 가밀로 신부는 한국에 입국, 옛날 조선시대에는 가실 나루터와 강창 나루터가 있어 대구, 안동, 부산 방면으로 오갈 수 있는 칠곡 지천면 신나무골 근처에 천주교회를 세운다. 이곳에 우리나라 천주교 조선교구로서는 11번째, 대구교구에서는 계산성당 다음이다. 모두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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