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동학 교단 재건 시작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7-19 09: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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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해월을 보호하기 위한 제자들의 헌신

동학혁명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동학도를 중심으로 일으킨 의거였다. 하지만 동학혁명이 실패로 막을 내리자 동학 교단의 최고 책임자인 해월이 받은 충격은 극심했다. 관에서는 동학 교단의 최고 책임자인 해월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이렇게 지목이 심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해월은 인제 느릅정 최영서의 뒷방에 조용히 은거하면서 시국을 살폈다. 그러나 최영서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아서 오랜 기간 머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를 감지하고 있던 손병희는 날이 풀리자 동생 병흠을 데리고 장삿길에 나섰다. 이 둘은 인제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간성(杆城)의 도인 최순서(崔淳瑞)의 집을 거쳐 원산(元山) 방면으로 향했다. 손병희는 자신이 갖고 있던 안경을 팔아 담뱃대를 수십 개 사서 시골로 돌아다니며 장사를 해 본전의 배가 되는 이익을 남겼다. 손병희는 원금은 장사 밑천으로 쓰기로 하고 우선 이익금 50량을 최우범에게 보내 해월의 은거 자금으로 쓰게 했다. 또 이종훈은 해월이 어려움에 부닥치자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전답 10두락을 팔아 그 돈을 갖고 해월의 은신 경비를 댔다. 


손병희는 다시 장삿길에 나서 평안도의 강계(江界)와 후창(厚昌), 자성(慈城)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 압록강 연변 일대와 함경도의 장진(長津) 등 조선과 청, 러시아의 국경지방까지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해 큰 수익을 올렸다. 손병희는 장사를 하면서 한편으로 은밀히 동학을 전하기도 했다. 손병희는 장사를 통해 5~6명이 1년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마련할 수 있는 돈을 모았다. 손병희와 동생 병흠의 노력, 이종훈의 정성으로 해월 등 동학 지도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동학혁명 이후 곤경에 처한 해월을 위해 제자들이 헌신했다.

동학혁명은 천명(天命)으로 이루어진 일

여름이 되자 정국은 소용돌이쳤다. 조정에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러시아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막대한 양의 배상금과 함께 청으로부터 받은 랴오둥반도에 대한 할양을 다시 청국으로 돌려주는 삼국간섭을 성사시켜 동아시아의 새로운 실력자도 등장했다. 조정에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교류를 강화했다. 이렇게 국정이 어수선해지자 동학에 대한 탄압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해월은 이 틈을 타서 조심스레 교단 수습에 나섰다. 6월이 돼 해월은 더는 최영서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수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해월은 인제로 들어오기 이전에 잠시 숨었던 홍천 높은 터 최우범(崔禹範)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해월이 이곳에서 여름을 나는 동안 출타했던 손병희가 소득을 얻어 돌아와 해월은 큰 도움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시국이 어수선해져 동학에 대한 지목도 다소 느슨해지자 해월은 은밀히 교단 수습에 나섰다. 우선 해월은 손병희, 임학선, 이종훈 등을 삼남 지방으로 보내 동학혁명 이후 교인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해월의 수습책으로 끊겼던 삼남 지방의 동학교도들과 연결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해월이 강원도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소수에게만 전했다. 이때 소식을 접한 호남의 두목 이병춘(李炳春)이 최우범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병춘은 해월과 그간의 어려웠던 상황을 나누며 동학혁명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이병춘이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 등의 잘못을 말하자 해월은 “동학혁명은 천명(天命)으로 이루어진 일이니 일체 사사로운 원한을 갖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해월은 동학혁명이 인위(人爲)가 아닌 천명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전봉준 등에 대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해월이 이렇게 잘라 말한 것은 동학혁명에 관해 서로의 잘잘못을 비방하는 행태를 잠재워 교단을 하나로 묶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어쩌면 해월의 입장에서는 전봉준 등 동학혁명을 일으킨 제자들이 가장 원망스러울 수도 있었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혁명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교단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고, 해월도 위험에 빠지게 됐다. 


그러나 해월은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동학혁명이 끝나고 제자들 사이에 호남의 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이 있었다. 호남 도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반목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자 해월은 동학혁명이 사사로운 욕심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세상을 바르게 만들려는 숭고한 마음에서 기포했다고 하면서 제자들을 다독여 도인들이 서로 갈라서지 않도록 했다. 해월이 교인들을 통합하기 위해 꺼낸 든 것이 천명(天命)이었다. 이는 신택우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택우(申澤雨) 묻기를 “갑오전란(甲午戰亂, 동학혁명)으로 인하여 우리 도를 비방하여 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떤 방책으로 능히 이 원성(怨聲)을 면할 수 있습니까?” 신사(神師, 해월) 대답하시기를 “갑오(甲午) 일로 말하면 인사(人事)로 된 것이 아니요, 천명(天命)으로 된 일이니, 사람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나 이후부터는 하늘이 귀화하는 것을 보이어 원성이 없어지고 도리어 찬성하리라. 갑오년과 같은 때가 되어 갑오년과 같은 일을 하면, 우리나라 일이 이로 말미암아 빛나게 되어 세계 인민의 정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니라.

해월은 동학혁명을 천명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규정하고 도인들이 일치단결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해월은 동학혁명이 비록 실패해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비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세상 사람들이 동학혁명을 다 칭송할 것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해서 도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이는 동학혁명으로 침체한 도인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려는 의도도 담고 있었다. 이렇게 해월은 동학혁명의 의미를 부여하고 동학혁명 이후의 활로를 모색했다. 이러한 점이 해월의 종교 지도자로서의 위대성이라고 하겠다.

치악산 수레너미로 숨어든 해월

손병희는 해월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은신시키기 위해 강원도 일대의 도인들과 함께 여러 곳을 살피고 다녔다. 이렇게 해서 찾은 곳이 치악산의 수레너미(강원도 횡성시 강림면 강림리)였다. 수레너미 마을은 치악산 줄기인 천지산과 매화산 사이 골짜기에 있다. 수레너미라는 이름은 조선을 건국한 태종이 자신의 스승 원천석을 모시려고 수레를 타고 이곳의 재를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월은 1895년 12월 눈이 쌓인 수레너미의 은신처로 숨었다. 수레너미를 소개한 이는 여주도인 임학선(林學善)이었다. 임학선의 소개로 수레너미를 둘러본 손병희는 초가 하나를 구입해 해월을 모셨다. 동학혁명의 여파로 해월은 1895년 한 해를 인제와 홍천, 원주 등 강원도의 깊은 산중에 몸을 숨긴 채 은밀하게 교단을 수습하고 있었다. 당시 수레너미 마을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정감록 신봉자들이 30여 호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마을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100여 채의 집이 있을 정도로 북적댔다. 그러나 지금은 10여 호만이 수레너미 마을을 지키고 있다. 


해월이 수레너미에서 은거하자 제자들도 이곳으로 들어왔다. 당시 연로한 해월을 보호하기 위해 제자들이 늘 가까이에 있었다. 수레너미로 들어온 제자는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손병흠, 임학선 등이었다. 이들은 동학혁명의 피난길을 함께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긴 사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가족보다도 더 끈끈해졌다. 해월은 수레너미에 들어와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백일기도에 들어가기 위해 임학선에게 식량을 준비시켰다. 당시 해월은 가족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손병희의 부인 홍씨가 이들의 식사를 만들었다.
 

▲ 수레너미 입구. 해월은 1895년 12월에 수레너미로 들어와 후계 구도를 마련했다. 해월은 이듬해 벽두 손병희, 손천민, 김연국 등 3인의 집단지도체제로 교단을 운영하도록 시켰다.


손병희·손천민·김연국을 교단의 전면에 내세워

1896년을 맞이하자 해월의 나이가 70세가 됐다. 동학에 입도한지 35년째였고 동학의 최고 책임자가 된 지도 33년째를 맞았다. 동학에 입도할 당시 중년이었던 해월도 어느덧 노령이 되었다. 70세를 맞이한 해월은 후계 구도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동학혁명의 피신 과정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해월로서는 자신 이후의 교단을 늘 걱정하고 있었다. 

 

▲ 중년의 손병희, 손병희는 동학혁명 당시 통령으로 참여했고 이후 해월의 강원도 피난 과정을 함께 하며 동학 교단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했다. 1899년 1월 손병희는 손천민, 김연국과 함께 교단 운영의 책임을 맡았다. 사진은 1900년을 전후해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후계 구도를 구상하고 있던 해월은 일단 젊은 지도자들에게 교단 운영을 맡아보게 했다. 1895년의 벽두인 1월 5일 해월은 손병희(孫秉熙)를 불러 “그대의 절의(節義)는 천하(天下)에 미칠 자(者)가 없다”라고 말하며 의암(義菴)이라는 도호(道號)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월 11일 손천민(孫天民)에게는 송암(松菴), 김연국(金演國)에게는 구암(龜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만들어 주었다. 이날 해월은 도호를 준 손병희, 손천민, 김연국의 도호에 모두 암(菴)자가 있다고 해서 3암(三菴)이라고 말하며, 3인 중 손천민(孫天民)에게 붓을 잡게 하고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글을 받아쓰게 했다.

荷蒙薰陶傳鉢恩(하몽훈도전발은) 훈도 전발의 은혜를 입었고,
守心薰陶傳鉢恩(수심훈도전발은) 마음으로 훈도 전발의 은혜를 지킨다.


이 시는 해월이 동학에 입도해 수운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마침내 도통을 전수받았으며, 도통을 전수받은 이후 30년간 어려운 가운데에서 도맥(道脈)을 유지해 왔다는 뜻이다. 즉 해월은 이 시를 통해 자신이 이어온 동학의 도맥을 세 사람이 이어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전해 준 것이었다. 그래서 해월은 이 시의 뜻을 설명하며 “이것은 나의 사의(私意)가 아니요, 천의(天意)에 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면서 “너희들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천하(天下)가 이 도를 흔들고자 할지라도 어찌하지 못하리라”라고 했다. 해월은 세 사람에게 공동으로 교단의 책임을 맡기게 하는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해 운영하라고 하였다. 교단의 문서도 3인의 이름으로 발부하게 했다. 

 

▲ 이병춘. 전라북도 임실 출신으로 호남 동학의 대두목이었던 이병춘은 교조신원운동과 동학혁명에도 참여했으며, 일제강점기 최대 민족운동인 3·1독립만세운동의 전라북도 지역 총책으로서 거사 계획 및 준비를 하다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 상해 임시정부로 군자금을 보내다가 적발돼 다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교단의 후계 구도가 만들어지자 해월은 본격적으로 3암을 삼남 지방으로 보내 도인(道人)의 동정 및 향배를 살피게 했다. 동학혁명에서 살아남아 숨죽이던 도인들은 해월이 살아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도심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직접 해월을 만나보기 위해 동학혁명에서 살아남은 호남의 도인 박치경(朴致景)·허진(許鎭)·장경화(長景化)·조동현(趙東賢)·양기용(梁琦容) 등이 강원도로 올라왔다. 이들과 해월은 그간의 회포를 풀고 교단의 수습을 위해 힘쓸 것을 다짐했다. 이후 각지의 도인(道人)들도 점차 해월을 찾게 돼 교세(敎勢)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때 충청도를 순회하던 손병희는 보은에서 해월의 가족을 수습해 같이 수레너미로 돌아왔다. 이로써 해월은 동학혁명으로 헤어진 가족과 3년 만에 재회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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