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다 되도록 발포명령자 누군지도 못 밝히고...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이종호 기자 / 기사승인 : 2019-05-17 09: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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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39주년>
39년 전 숨죽인 광주를 울린 목소리의 주인공
박영순 5월민주여성회 부회장
▲1980년 5월 27일 새벽 마지막 시민방송을 했던 박영순 씨가 옛 전남도청 1층 상황실 자리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종호 기자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애절한 목소리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진입으로 잔뜩 숨죽인 광주시내 곳곳에 울려 퍼졌다. 여성의 절박한 목소리는 전남도청 옥상에 설치된 민방위 훈련용 대형 스피커를 통해 세 차례 이어졌다. 얼마 뒤 정전과 함께 총격이 시작됐고 시민군이 있던 도청은 계엄군에 진압됐다.

 

지난 4월 30일 광주시 옛 전남도청 앞에서 39년 전 5월 27일 새벽 광주시민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 박영순(60) 씨(5월민주여성회 부회장)를 만났다. 이날 박 씨의 증언 자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5.18 역사 바로 보기’ 현장연수를 주관한 한국언론진흥재단 광주지사에서 마련했다. 박영순 씨는 1980년 당시 21세로 송원전문대학교 유아교육학과 2학년 학생이었다. 

 

“26일 밤에 방송실로 들어갔죠. 방송실엔 저만 있었던 게 아니고 여중생, 또 남학생 그렇게 앉아 있었어요. 설마 우리를 다 총으로 쏴서 죽이지는 않겠지, 어서 날이 새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있었죠. 새벽 2시가 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 김종배 씨가 에이4 용지 4분의 1 정도 되는 메모지에 방송 내용을 써서 들고 왔어요. 다급하게 썼다 하더라고요. 제가 그걸 보는데 ‘아, 이제는 죽었구나’ 그랬어요.”

 

당시 전남도청 1층 상황실 한편 방송실(지금 엘리베이터 자리)에는 캐비넷과 조그만 책상이 하나 있었고, 책상 위에 앉은뱅이 방송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책상 앞에 앉은 박영순 씨는 마이크를 옥외방송용으로 돌리려고 조절기에 손을 댔다. 하지만 손이 떨려 손잡이를 돌릴 수 없었다. 옆에 있던 남학생이 대신 손잡이를 돌려 옥외방송으로 바꾸고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이제 죽었다는 생각 때문에 거의 울면서 방송을 했어요. 광주시민이 다 나와야 우리가 살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세 번 정도 방송을 되풀이했어요. 더 이상 못 하고 마이크만 잡고 있는데 불이 가버리는 거예요. 완전히 정전이 돼버린 거죠.”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총부리를 앞세운 계엄군은 정전돼 깜깜한 도청에 들이닥쳤다. 방송실에 있던 박영순 씨도 계엄군에 붙들려 끌려 나왔다.

 

“불이 나가자마자 막 우레와 같은 총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아, 이제 죽었다’, 총소리가 막 울려 퍼지면서 앞에까지 막, 얼마나...(침묵) 저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잖아요. 정말 폭탄 소리보다 더 큰 총소리가 나더니 방송실 문이 열리면서 총을 들이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소리를 질렀어요. ‘저 여학생입니다. 여학생이에요. 살려주세요. 여기 여학생이 있으니까 살려주세요.’ 그러니까 ‘기어서 나오라’는 거예요. 기어서 나오는데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고 군홧발에 밟혀버리니까 어떻게 기어서 나왔는지 기억이 없어요. 눈을 떠보니까 도청 분수대 앞인데 ‘새벽 방송한 년 나오라’고, ‘옷을 벗겨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 듣고 다시 기절해버렸어요.”

 

날이 샜다. 어떻게 끌려갔는지 기억이 없지만 눈을 뜨니 상무대 운동장이었다. 가혹한 취조와 수사가 이어졌다. 박영순 씨는 그때 받은 수사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몇십 년 동안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낮에 수사를 많이 받았는데 저는 밤에 항상 끌려다녔어요. 수사 고문실이 있어요. 따로 준비해 놓은 데가. 거기서 수사를 저 혼자만 받는 게 아니고 좌석이 몇 개 있어서 남학생들하고 같이 받았어요. 남학생들 수사를 받는데 토씨 하나만 잘못 말해도 정말 짐승만도 못하게 때려요. 악악 소리를 지르는데, 쓰러지면 질질 끌려서 나가요. 그걸 보면 제가 아픈 건 생각도 못 해요. 지금도 40년이 다 돼 가지만 공포스러웠던 그 장면이 지워지질 않아요.”

 

수사를 받고 광산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박영순 씨는 몸 상태가 나빠져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 한 달가량 치료를 받은 뒤 광주교도소로 옮겨졌다.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박영순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박 씨는 1980년 10월 징역 1년을 최종 선고받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박영순 씨는 35년 뒤 재심을 청구했고, 광주지법은 2015년 6월 5일 무죄를 선고했다.

 

박영순 씨는 1980년 5월 21일 거리에서 남학생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방송을 해달라는 시위대의 요구에 우연히 거리방송을 시작했다. “학생, 학생, 방송 좀 해달라고, 지금 사람들이 죽어가니까 방송 좀 해달라고 그래가지고 뭣 모르고 그냥 차에 올라 타버렸어요. 그게 계기가 된 거죠.” 광주시내 전역을 돌아다니며 차량 거리방송을 했던 전옥주 씨와 차명숙 씨가 붙잡히면서 5월 25일부터 거리방송은 박영순 씨가 도맡아 했다. “25일부터는 방송차량을 타고 거리방송을 하는 여학생들이 없었어요. 저 외에. 제가 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21일부터 26일까지 계속 방송을 하다 보니까 많이 지쳤어요.”

 

운명의 27일 전야. “어둑어둑해서 도청에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다른 날하고 다른 거예요. 복도에 흰 나무의자가 있었어요. 의자에 앉아 있던 여중생이 ‘오늘 밤에 계엄군들이 들어온다고 한다’고 울면서 얘기해요. 여중생을 집에 데려다 줘야겠다고 했더니 방송차량이 다 순찰차로 나가 버린 거예요. 외곽지로. 또 그날은 이상하게 종일 굶었어요. 취사실에서 달걀을 쪄와서 먹고 있는데 막 술렁술렁하는 거예요. 지하에 폭탄이 저장돼 있고, 누가 군 프락치한테 독침을 맞아서 병원으로 이송 중이다, 소문이 쫙 퍼졌어요. 그 말을 들으니까 막 벌벌 떨리는 거예요.” 침묵과 정적이 무겁게 흐르는 도청 안, 박영순 씨는 ‘무서운 독침’을 피해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1층 방송실로 들어갔다. 

 

“39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발포 명령자는 없고, 수없이 죽었던 사람들, 총에 맞고, 고문당하고... 이런 게 진상규명이 안 되고 있는 현실은 저희들한테는 아주 슬픈 상처죠. 지금까지도 5.18 이러면 먹먹해요. 어떨 때는 뇌리에서 5.18을 지우고 싶은 생각이 많이 생겨요. 전에는 5.18이라는 말만 나와도 몸을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했어요. 그 정도로 지금도 아픔이 굉장히 크거든요. 40년이 다 돼가는 마당에 진상규명이 안 되고 있다는 건 우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박영순 씨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우선돼야 할 것은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광주학살을 총지휘한 자가 누구인지 5.18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마다 5월 27일 새벽 6시면 1980년 그날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생존자들이 옛 전남도청 앞에 모인다. 생존자들은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리는 축문을 읽고 술을 올린다. 나의갑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은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한반도 전역에서 입이 닳도록 다그쳤지만, 5.18이 서른아홉 살을 먹었는데도 광주의 진실은 커다란 어둠에 갇혀 있다”고 말했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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