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임실에서 손병희와 재회한 후 호남 탈출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6-21 09: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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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총기포 이후 관에서 해월 체포에 혈안

9월 18일 총기포로 호서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으로 향할 때 해월은 동행하지 않고 청산 문바위골에 남아있었다. 청산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문바위골에 모여들자 해월의 은신처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총기포령으로 이 지역 동학농민군 대부분이 논산으로 합류하기 위해 떠나자 해월을 보호하는 인원도 부족해져서 관군과 민보군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호서 동학농민군의 주 무대였던 보은과 옥천, 영동 일대는 경군과 일본군, 민보군이 번갈아 가며 동학농민군의 최고지도자인 해월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 해월의 은신처인 문바위골도 언제 관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은 보은 외속리면 장내리로 들어가 마을 전체를 불 질러버렸고, 후비보병제19대대 대대장인 미나미 코지로는 중로군과 경군 교도중대 이진호를 파견해 동학의 거점을 수색했다. 옥천 안내면에서는 박정빈(朴正彬)과 육상필(陸相弼)이 민보군을 조직해 주변의 군현을 찾아다니면서 동학 조직을 위협했다. 또 상주 소모사 정의묵(鄭宜默)도 소모영 유격대를 파견해 해월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우금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한 이후 해월에 대한 체포에 더욱 열을 올렸다. 이는 동학의 우두머리인 해월을 잡아 동학의 뿌리를 뽑으려는 의도였다.


이중 상주 소모영 유격병의 활동은 집요했다. 상주 소모영 유격장 김석중은 11월 27일 경상도의 경계를 넘어 충청도로 들어와 보은 마로면 현면상의 집, 청산 대사동 원씨의 집, 월남 박해수의 집, 내산면 저동 이씨의 집 등 네 곳의 동학도 집을 급습해 해월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이곳들은 상주 소모영에서 파악한 해월의 은신처였다. 김석중은 새벽에 기습해 해월을 사로잡으면 총을 연달아 세 번, 두목을 잡으면 두 번, 잡지 못하면 한 번 쏘기로 약속을 정할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이들이 급습했을 때는 이미 해월이 지나간 뒤였다.


옥천의 민보군이 해월에게는 가장 위협적이었다. 해월은 보은의 도소를 폐쇄하고 청산의 문바위골에 있었는데 이곳은 옥천이 생활권이라 옥천의 민보군은 이 지역을 손바닥 보듯이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이렇게 옥천에서 민보군이 조직돼 해월을 찾아다니자 더는 문바위골에 숨어있을 수 없어 잠적했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했던 해월의 딸과 대접주 임규호의 처, 그리고 남아있던 신성열 등 5명이 민보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임실로 잠입한 해월 최시형

해월이 청산을 떠난 것은 11월 중순이었다. 그는 김연국을 대동하고 11월 13일 임실로 향했다. 해월이 임실로 향한 이유는 임실이 전라도 지역 중 동학이 가장 강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임실의 동학은 1873년 해월의 포덕으로 최봉성(崔鳳成)이 입교하면서 시작됐다고 전한다. 이후 1880년 운암면 선거리의 김학원(金學遠)과 청웅면 새목터의 허선(許善) 등이 입도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포덕은 1884년 해월의 익산 사자암 피신 때부터 이루어졌다. 이후 1887년에 이병춘(李炳春)이, 그리고 1889년에 김영원(金永遠)이 입도하면서 임실의 동학은 급격히 성장했다. 당시 임실의 동학을 이끌던 지도자는 이병춘과 김영원, 박준승(朴準承)이었다. 동학혁명에 가담했던 박준승은 3.1운동의 민족대표로도 활동했다.


동학혁명 당시 임실에는 6개의 포, 31명의 접주가 있었을 정도로 동학 교세가 강력했다. 이렇게 임실에서 동학 교세가 성장한 것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소식이 전해진 이후였다. 임실의 전주 이씨 문중도 동학에 입도했고 현감 민충식(閔忠植)도 입도해 임실은 군민 대부분이 동학도가 되었다. 임실군 전체가 동학의 세상이 되자 해월은 안심하고 임실로 숨어들었다. 임실로 들어온 해월은 이병춘(李炳春)의 집에서 9일간 유숙하고 나서 조항리(鳥項里, 현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조항마을로 일명 새목터) 조석걸(趙錫傑)의 집으로 가서 머물다가 허선의 집에서 기거했다.


새목터는 해월이 1873년 처음으로 임실에 와서 포덕을 시작한 허선의 집이 있는 마을이었다. 해월은 늘 뒤에 높은 산이 있는 맨 안쪽의 마을에 피신처를 잡았는데 이는 관군의 추격을 받아도 산속으로 숨어 은신에 쉬웠기 때문이었다. 새목터도 마을 뒤로 올라가면 해발 603m의 원통산과 571m의 지초봉으로 이어져 쉽게 관군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는 은신처였다. 해월은 동학 세력이 활발해 임실에 은거했지만 만약을 대비해 몇 번 와서 익숙하면서도 피신하기에 용이한 새목터에 은신했다.  

 

▲ 임실 새목터 허선의 집(원). 현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1093번지의 조항마을에 허선의 집이 있었다. 해월은 동학혁명 9월 기포 이후 이곳에 숨어 있다가 의암의 호서 동학농민군과 만나 북행을 시작했다.(사진의 원안은 허선의 집터에 있는 해월 은둔지 표지석)


새목터에서 해월과 손병희 재회

해월은 9월의 총기포 이후 동학농민군과 연락을 주고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손병희가 태인에서 전봉준과 헤어진 후 해월을 만나기 위해 임실로 향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임실에서 해월과 손병희가 만날 때 취했던 기발한 연락 방법이 <임동호 약력>에 실려 있어 소개한다.



정읍(井邑)을 지나 장성(長城)갈재를 너머가다가 해월신사(海月神師)의 경통(敬通)을 남무에 걸어노흔 것을 손송암장(孫松菴丈, 손천민)이 먼저 발견하였는데 … 송암장은 그길로 바로 선진(先陣)으로 떠낫다. 일시(日時)년 11월 회일(晦日, 그믐날)이더라. 그러나 성사(聖師, 손병희)께서 송암장 출발을 딸아 임학선(林學善) 씨(氏)와 상의(相議)하고 후진(後陣)으로 곳 출발하야 무주(戊朱)를 지나서 일주야(一晝夜)에 백십리(百十里)를 행(行)하야 임실(任實) 땅에 숙박(宿泊)하고 익일(翌日)에 동군(同郡) 이병춘(李炳春) 씨댁(氏宅) 근처에 와서 숙박(宿泊)하고 그 야(夜)에 성사(聖師) 송암(松菴) 급(及) 제인(諸人)이 이병춘 씨 댁에 가서 해월신사를 배알(拜謁)하고 곳 못시고 떠나

최시형은 해산 소식을 듣고 손병희를 만나기 위해 사람을 보내 장성갈재의 나무에 동학도만 식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경통을 걸어두었다. 손천민이 이 경통을 찾아 선두에 서고 손병희가 후진으로 출발해 순창을 거쳐 회문산을 돌아 임실의 새목터까지 내달아 해월과 극적으로 만났다. 당시 의암을 따라 임실로 온 동학농민군은 약 1천여 명으로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해월과 손병희의 호서동학군이 만난 날은 12월 1일이었다. 해월은 손병희의 부대를 만나자마자 곧바로 충청도로 북상을 시작했다. 해월은 동학농민군이 추격당하고 있던 상황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해월이 임실을 떠난 12월 1일 일본군과 교도병 그리고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이 임실로 들어왔다.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이두황은 임실에 도착하자마자 본보기로 동학도 7~8명을 참형에 처해 임실 동학도의 기세를 꺾으려 했다.  

 

▲ 삼요정(三樂亭).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에 위치한 삼요정은 임실의 독립운동가 김영원이 1883년경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1921년 일제가 강제로 철거한 것을 2002년에 임실군과 주민들이 복원했다. 김영원은 동학에 입도해 동학혁명과 3.1운동에 참여한 임실의 대표적인 동학도였다. 김영원은 임실의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서 순국했다.

소백산을 타고 북행 결정

해월은 남행이 아닌 북행을 선택했다. 북행을 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남행을 하면 지속적으로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을 받지만, 소백산중으로 들어가 북행을 하면 한두 차례의 접전은 겪더라도 도피에 성공할 확률은 훨씬 높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군과 관군은 패주하는 동학농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생각만 갖고 있었지 북행을 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해월은 이러한 관군과 일본군의 생각을 역이용했다. 그러나 북행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해월의 근거지가 충청도와 강원도였기 때문이다. 해월은 1871년 영해 교조신원운동 이후 줄곧 강원도와 충청도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호남은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고 개방적인 지형조건으로 인해 은신하기가 어려웠다. 해월은 오랜 도피 생활을 통해 호남보다는 산악지대가 많은 강원도와 충청도로 숨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해월은 호서동학군을 이끌고 험준한 산줄기가 잇달아 펼쳐지는 동북쪽의 소백산을 타고 장수로 들어가 읍내를 점령했다. 동학농민군이 읍내로 들어간 이유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1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산에서 추위를 견디기는 쉽지 않았다. 또한 장수에는 김개남군의 일부가 남아있어서 이들과 함께 장수를 점령해 행렬을 수습했다. 동학농민군이 장수 읍내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인근 군현에 알려지자 주변의 관군들은 긴장했다. 해월은 동학농민군이 경상도 산악 지역을 향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관군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동학농민군이 경상도로 올 것이라는 정탐원의 보고에 경상 감영에서는 상주에 병력을 모야 동학농민군의 진출에 대비했다.  

 

▲ 박준승 동상. 청웅면 옥석리 박준승의 생가에 있다. 임실의 대표적 천도교 지도자였던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박준승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고 동학혁명에도 참여했다. 임실군에서는 2013년 박준승의 생가를 복원하고 동상을 건립했다. 박준승의 생가와 허선의 집이 있는 새목터는 그리 멀지 않다.

무주에서 민보군과 전투

경상도로 간다고 소문을 퍼뜨린 해월은 무주로 향했다. 무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무주와 용담 지역의 민보군들이 해월의 부대를 막아서서 전투가 시작됐다. 이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세력에 놀란 민보군이 물러나 싱겁게 끝이 났다. 무주 읍내로 들어간 동학농민군은 무주의 설천면과 영동 남이면 월전리에서 무주의 민보군과 맞닥뜨렸다. 민주지산의 줄기인 이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공주의 대교 전투를 시작으로 경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투 경험이 풍부한 부대였다. 이러한 호서 동학농민군에게 무주의 민보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동학농민군은 무주의 민보군을 간단히 물리쳤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포별로 움직였기 때문에 여러 길을 통해서 이동했다. 이는 관군과 일본군을 속이기 위한 전술이기도 했다. 충청 병사도 호서 동학농민군의 한 부대는 문의로 행군하고, 다른 한 부대는 보은으로 향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영동 읍내에 도착했다고 기록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무주를 지난 동학농민군의 한 부대는 12월 7일 옥천으로 들어갔고, 본진은 12월 9일 충북 영동으로 들어갔다. 호서의 동학농민군은 다양한 작전을 써서 탈출을 시도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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