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울산교육 독립운동

김용 울산현대고 교사 / 기사승인 : 2019-12-27 09: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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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교육 독립운동

지난 12월 12일 울산시교육청 외솔회의실에서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 역사포럼이 열렸다. 울산시교육청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일제강점기 울산 교육현장에서 이뤄진 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발굴하고 기념하는 사업을 벌여왔다. 이를 위해 울산교육 독립운동연구회를 구성하고, 2월 27일 중구 병영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울산교육청, 울산초등학교, 울산노동역사관, 보성학교 터, 언양초등학교에 울산교육 독립운동 모바일 페이지로 연결하는 QR코드 현판을 설치했다. 역사포럼은 1년 동안 진행해온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성과를 공유하고 과제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병길 양산 보광중학교 교사의 ‘언양 공립보통학교 출신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가’, 이현호 우신고 교사의 ‘근대 울산지역 교육 상황 연구’, 김용 울산현대고 교사의 ‘일제강점기 울산교육 독립운동’, 원영미 울산대학교 강사의 ‘1910년대 울산지역 학생의 인적 구성과 식민지 교육’, 김정숙 무룡고 교사의 ‘울산교육 독립운동사를 활용한 지역사 현장 체험학습 방안 모색’,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의 ‘3.1운동 100주년 기념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을 QR코드로 연결하다’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이 가운데 김용 울산현대고 역사교사의 ‘일제강점기 울산교육 독립운동’을 지면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열악했던 일제강점기 울산 교육환경

울산의 근대 교육은 1900년대 이후 사립학교로 울산읍 개진학교, 언양 영명학교, 병영 일신학교, 동면 개운학교, 일산 보성학교가 세워지면서 시작됐다. 개진학교는 학성도호부 객사 학성관을 사용하며 1907년 울산공립보통학교로, 영명학교는 언양 양사재에서 시작해 1913년 언양공립보통학교로, 일신학교는 경상좌병영 제남관에서 1919년 학성공립보통학교로, 개운학교는 목장 폐지 후 남목 관아 건물에서 1920년 동면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됐고, 보성학교는 1912년경 없어졌다. 1920년 보성강습소(보성학교)가 개설된다. 1919년 <울산군군세일반>을 보면 서당이 94개 1382명으로 가장 많았고, 야학교는 1910년 개운학교 부설 동면 당천리 대창야학교와 1917년 중남면 신화리 노동야학교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울산의 교육 환경은 다른 지역에 비해 열악했다. 1924년 경상남도 <대정십일년도도세일람>를 보면 경상남도는 공립보통학교 98개교지만 울산은 6개교로 인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교 수가 적었다. 1933년 기준 14만5904명 중 문맹자는 11만9998명 82.2%, 한글 가능자는 1만4555명 10%, 일본어 가능자는 2644명 1.8%, 일본어와 한글 가능한 자는 8707명 6%로 경상남도 전체 비율과 비교해도 조금 떨어졌다. 중등학교는 1926년 2년제 울산농업보습학교, 1937년 5년제 울산공립농업학교가 있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울산 이외 다른 곳으로 가야 했고,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출세의 길로 면서기나 순사시험을 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 다른 곳에서 울산을 순사 소재지로 부르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곳곳에서 등장한 청년회와 소년회는 울산지역 여러 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됐고, 학교나 야학교에서 열리는 운동회와 강연회, 학예회, 음악회, 소인극 등 행사는 다양한 연령층과 계급 통합의 장이 됐다, 청년회에게 교육은 ‘해방운동의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기회분자를 근본적으로 박멸, 전통적 인습과 미신을 타파하고 과학적 사상을 보급케 하며, 지방문화를 향상’하기 위해 독립운동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아동이나 농민, 노동자, 여성들에게 사설강습소와 100여 곳이 넘는 야학교를 중심으로 실력 양성을 통한 민중계몽과 의식 각성이 추진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된 후 학교와 교육환경은 전시체제에 맞게 재편된다. 학생들은 신사 참배, 군사훈련이나 울산비행장 노역 등에 동원되고, 학교 운동장은 ‘군대의 점호연습’, ‘군국기분 농후한 천진한 딴쓰와 유희’, ‘내선인간 총참가’, ‘애국부인 울산회 총회’, 울산경방단, 교남자경단 결성 등의 장소가 됐다. 학예회에서는 ‘비상시국을 반영한 노래와 춤’ 등이 공연됐고, 국방헌금이 미담으로 소개됐다. 울산군 유도회는 진충보국, 울산포교당은 황군위령제를 주장했으며, 울산 출신의 김성수, 김석우, 권환덕이 지원병에 신청한다.


일제강점기 울산의 교육 독립운동에 대해 학성공보와 울산공보, 언양공보, 보성학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학성공보는 학교 안에서 3.1운동이 전개된 후 학생들에 대한 처벌과 학교 운영 갈등에 대해, 울산공보는 주변 지역과 관련해 울산지역 여러 운동의 구심력으로 작용한 곳이다. 언양공보에서는 1928년 언양 만세문,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언양 1차 격문사건, 1932년 언양 2차 격문사건이 발생했으며, 보성학교는 사립학교로 이웃 방어진의 일본인 거주지와 문화적으로 가장 대립한 곳으로 방어진 주재소 편지 전달과 1934년, 1935년 메이데이 격문, 1935년 울산 혁명적 비밀결사 사건 등 활발한 활동이 전개된 곳이다.
 

▲ 옛 병영초등학교(일신학교, 학성공립보통학교) 모습


학성공보 만세운동 후 학생 처벌과 학교 운영 갈등

병영 일신학교는 1906년 옛 경상좌병영 안에 설립됐다. 1895년 지방군제 개편으로 경상좌병영이 해체된 이후 진위대가 주둔했고, 진위대의 규모도 지속적으로 축소되다가 1907년 8월 17일 울산에 남아있던 위관 2명이 이끄는 100명의 군대가 해산됐다. 일제의 침략이 진전되면서 국방력이 해체되는 과정이었다.


1919년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소식을 일신학교 졸업생들이 전하면서, 양석룡, 이종룡, 최현구, 박영하 등 일신학교 출신 병영청년회가 주도해 4월 4일 학성공보 운동장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청년회 5인의 간부가 교무실로 가서 독립 만세운동에 학생을 참여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수업 중이라 거부한 교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생들을 동원해 태극기를 나눠주며 운동장에서 병영 시가지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1919년 학성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지만, 당시 학생들은 사립 일신학교로 입학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청년회원들은 이들에게 선배였다.


1919년 학성공보에 다녔던 학생 중 정학, 전학 등이 다수 있고, 학년 승급도 많아 정확한 인원은 추정하기 힘들지만, 일신학교 관련된 사람을 조사하면 1회(1920년 3월 졸업) 9명 중 7명 78%, 2회 22명 중 17명 77%, 3회 43명 중 14명 33%, 4회 23명 중 8명 35%, 5회 14명 중 1명 7%이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만세시위 참가 학생들에게 규율을 엄격하게 지켜 불량 생도에 대해서는 단호한 처치를 채택할 것’을 지시했는데, 1920년 3월 정급(停級, 유급)에 처해진 학생들이 많다.


2번 이상 정학 대상인 우사남은 1911년에 태어나 재학 중 5학년에 91일의 병결이 있어 임시 퇴학과 재입학을 했고, 신분이는 1915년에 태어나 1학년 때 병결 14일이 있어 건강상의 이유로 볼 수 있지만, 김문호의 경우는 특별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 일제강점기 1917년 병영 지도


3.1운동 이후 학성공보가 울산에서 다시 화제가 된 것은 일본인 교장 미야자키 히사시(宮崎粲)와 관련이 있다. 미야자키는 1912년 장자공립심상소학교에서 훈도 10관등으로 교직을 시작해 1941년 하도농업실수학교 교유(敎諭) 3관등까지 30년을 교직에서 근무한 대표적인 일본인으로, 1923년 학성공보에 부임한 이후 1929년까지 7년 간 교장으로 지냈다. 일제강점기 학교는 교장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인 명령과 감독의 위계제가 확립돼 있었고, 교장은 학교의 교과, 수업 운영 등에 대한 일체의 권한과 교직원 감독권이 있었으며 지역사회에서 발언권도 컸다.


1925년 8월 15일 제3회 학성공보 동창회는 40여 명이 참석해 졸업생이자 학성공보 교사인 이규대의 사회로 교원들의 비행에 대해 세밀한 조사와 구체적인 선후책을 강구하기 위해 사회 단체와 협동하기로 하고, 이석호, 김광해, 박기조, 김용호, 손진줄을 교섭위원으로 선출했다. 미야자키 교장과 관련된 일로는 ‘생도에게 일상적으로 망언 욕설을 하고, 학교 비품을 자기 집에 두고 임의로 사용해 소사(小使)와 다툼하며, 기생집과 술집에 너무 자주 출입하는 일, 어린 학생에게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낳는다며 괴상한 음담으로 희롱하는 일’, 훈도인 유키자네 시게요시(行實重義)는 ‘수업시간을 지키지 않고 학생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는 일, 여자 졸업생에게 기생 노릇을 권함’이 문제로 대두했다. 이와 비슷한 문제로 1920년대 교원 배척과 관련된 동맹휴학은 보통학교의 경우 1925년 38건, 1926년 32건, 1927년 38건이 발생했다.


동창회에서 선출된 교섭위원 이석호와 김용호는 1회, 손진줄은 3회 졸업생이고, 김광해는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다. 교섭위원은 회원으로부터 적발한 선생의 비행을 일일이 종합한 후 처치 방책의 일체를 8월 21일 설령 등 5명의 학성공보 학무위원회에 맡겼다. 8월 24일 학무위원회의 학교 방문에 미야자키 교장은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교섭위원을 상대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소송을 제기해 참형에 처할 것이라 위협했다. 학무위원회는 무사안일한 자세로 동창회의 과실을 주장했다.


하지만 교섭위원들이 충분한 조사를 하고 8월 28일 방문해 사실관계를 일일이 질문하자 교장과 훈도(교사)는 자신들의 죄상을 전부 자백하며 백배사죄했고, 이에 비행은닉에 동조한 학무위원들에게도 비난이 쏟아졌다.


학성공보 교원 비행 사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마무리됐다. 2학기인 9월 학무당국인 울산군청은 김영진을 의령으로 전근시키고, 교장과 훈도에 대한 내용은 근거 없는 떠도는 이야기로 결론지었다. 1926년 이규대는 신설된 농소공보, 유키자네는 남해보통학교로 전근됐다.


미야자키와 관련된 내용은 이 외에도 1925년 11월 이종진 퇴학 사건이 있다. 수첩을 발견해 담임교사 최영해에게 알린 이종진을 교장은 수첩을 훔쳤다는 혐의로 무수히 난타, 주판 위에 앉히기도 하고, 최면술을 시켜 사실을 조사한다며 여러 교실을 다녔고, 담임 최영해는 감언이설로 혐의만 인정하면 처벌을 면해주겠다고 꾀어 인정하게 했다. 하지만 다음 날 교장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무수히 구타하고, 담임은 이종진 부모에게 교장 접대를 권유해 일본 청주와 과자 등을 줬지만, 일주일 후 퇴학 명령을 내렸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승하한 후 5월 1일 병영청년회와 유지의 발의로 학성공보에 3000여 명이 모여 30분간 망곡을 했다. 학성공보 학생들은 학교에 휴학을 요청했으나 응하지 않자 학생들은 분개해 4, 5, 6학년생 300여 명이 5월 2일부터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이에 미야자키 교장이 5월 4일 동맹휴학 중인 생도를 소집해 자신의 실책을 말하고 학생들을 설득해 5월 5일부터 등교했으며, 6월 10일 병영에 있는 각 영업자들이 모두 문을 닫고 학성공보에서 수백 명이 모여 봉결식을 거행한다. 순종 승하와 관련해 울산공보에서도 휴학 요청을 했지만 학교가 응하지 않아 일주일간 동맹휴학을 했다.


1928년 7월 신간회 울산지회의 총무간사회에서 다룬 안건을 보면 미야자키 학성공보 교장과 소사(小使)간 투쟁사건의 진상조사건이 다시 등장한다. 미야자키는 일본인 교원의 권위적이고 오만한 대표적인 인물 사례다.


김용 울산현대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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