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에는

박기눙 소설가 / 기사승인 : 2019-07-31 09: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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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어떤 그릇을 쓸 때면 특별히 생각나는 이가 있다. 잊고 지내다가 문득 특정한 그릇을 꺼내 쓰면 불현듯 생각나는 사람, 상황,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그릇이 무슨 주술을 부리듯 시공간을 넘는다. 초록빛 컵과 냄비 세트를 쓸 때 생각나는 이는 어김없이 그녀다. 


그녀와 나는 에어로빅 운동하는 곳에서 처음 만났다. 거기는 아파트 단지 내 지하 공간을 운동 시설로 바꾼, 벽면 한쪽이 전부 거울인, 오전 시간에 틈을 내 운동할 곳으로 제격인 곳이었다. 경쾌한 댄스 음악 위주의 선곡과 에어로빅 전문 강사의 우렁찬 구령에 맞춰 우리는 몸을 움직였다. 이 주일 간격으로 유행하는 음악에 맞춰 안무를 외워야 했는데 쉽지는 않았다. 안무를 외우는 실력에 따라 운동하는 자리가 달랐다. 그녀는 맨 앞줄이나 두 번째 줄, 나는 늘 그녀의 뒷자리에 서서 운동했다. 그녀가 안무를 틀리면 어김없이 나도 틀린다. 앞쪽 벽면 거울 속에서 우리의 눈빛이 마주친다. 무언의 민망함은 어색함에 섞이고, 미안함이 섞인 웃음은 이내 다음 동작에 밀려 묻힌다. 잠깐씩 키득거리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그 시절,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여 함께 밥을 먹었다. 메뉴를 정하고 재료를 가져와서 즉석에서 요리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부침개 재료를 주문했다. 나름대로 준비한 재료를 보고 그녀가 탄성을 질렀다. 그저 오징어 몇 마리를 넣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날 오징어 부추전의 인기는 순전히 솜씨 좋게 부쳐 낸 그녀의 몫이었다.


운동이 끝난 후 우리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간이 운동 시설이라 샤워장이 없었는데 땀내 나는 몸으로 우르르 몰려가 이야기를 나누다 들쩍지근하고 시큼한 땀 냄새에 코를 돌리던 시절, 그녀의 집은 우리의 단골 아지트였다.


그녀의 집에는 예쁜 그릇이 많았다. 초록빛 컵도 그때 봤다. 생긴 모습도 그렇고 초록색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 맞은 그릇이었다. 근처 마트에서 샀다는 그녀의 말에 당장 그날 마트로 달려가 샀다. 


초록빛 컵은 밑바닥의 원주는 작고 입을 대는 곳의 원주는 넓은, 흡사 원뿔 모양을 위아래로 두 군데 자른 형태의 컵이다. 반투명과 투명의 둥근 무늬가 어우러진 컵이다. 밑바닥은 두꺼운데 위로 올라갈수록 얇은, 크리스털을 닮은 유리잔이다. 그러다 보니 쓸 때마다 조심스럽다. 입술과 이에 닿는 촉감이 꽤 좋은 편이다.


초록빛 컵은 과일 주스를 담을 때 가장 예쁜 빛이 난다. 초록빛은 색색의 과일이 나무에 달릴 때 함께 붙었던 이파리처럼 보인다. 오렌지 주스도, 토마토 주스도, 당근 주스도 이 컵에 따르면 갓 딴 과일처럼 상큼하고 싱그럽다. 특히 무덥고 후텁지근한 요즘, 얼음 몇 알 동동 띄워 마시면 더할 나위 없다.


그때 함께 산 그릇 중에 냄비 세트도 있다. 평소 갖고 싶던 그릇이었고, 마침 할인 판매 중이었다. 마감 세일하는 날이라 그런지 새 상품은 다 팔리고, 진열상품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간 크기의 냄비 바닥은 시커멓게 긁힌 자국도 보였다. 몇 번을 들었다 놨다 망설이는 내게 그녀는 그릇은 눈에 띄고 사고 싶을 때 사는 거라 말하며 냄비 세트를 덥석 집어 내 카트에 담아주었다. 이후 냄비는 우리 집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그릇이 되었다. 긁힌 자국은 닦아도 깔끔하게 없어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 자국은 불현듯 그녀를 생각나게 하는 흔적이 되었다. 휘뚜루마뚜루 쓰기에 좋은, 깨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며 광고하는 그 냄비는 이후 단종이 돼 더는 살 수 없는 제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그녀는 나보다 먼저 이사를 했다. 몇 차례 통화가 오갔지만, 그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집 전화번호는 없고, 휴대전화 번호는 변경된 지 오래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아쉽고 안타까운 인연이다.


햇살이 비치는 오후, 선반 위 초록빛 컵이 투명하다. 컵을 잡은 내 손바닥에 초록이 지천이다. 몇 알의 얼음을 먼저 채우고 주스를 따른다. 네모 얼음 알갱이 속에 그녀의 복숭앗빛 얼굴이 떠오른다.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행동하던 그녀, 지금도 잘살고 있을 게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고 싶다. 그날 그 자리에 초록빛 컵과 냄비도 함께하리라.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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