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임 벨류(Name Value)

김상천 시인 / 기사승인 : 2020-08-27 10: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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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만리

 

예부터 우리는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고 생사화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데 정성을 기울였고 작명소(作名所)가 성황을 누렸던 것이다. 사람의 이름뿐만 아니라 건물의 이름, 동네의 이름, 산과 강의 이름 등을 작명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여행을 다녀보면 알 수 있다. 요즘은 회사나 업소의 이름도 다양하고 재미가 있다. 이름이 주는 이미지를 경영에 이용하는 것이다. 이름 하나 잘 지어서 광고의 효과를 톡톡히 보는 가게를 많이 본다. 그래서 좋은 이름은 아예 상표 등록을 통해 소유권을 갖는 것이다. 또한 좋은 회사나 좋은 상품은 그 이름의 가치를 더 높인다. 그래서 네임 벨류(Name Value)나 상표의 가치가 천문학적인 것도 있다. 


여행을 즐기는 내가 미리 여행지의 정보를 검색할 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냥 이름이 주는 이미지를 보고 식당이나 찻집 숙소 등을 결정하고 예약하게 되는데 차를 좋아하니 반드시 여행지 근방에 있는 찻집을 찾아본다. 검색하다 보면 관심을 끄는 예쁜 이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실상 가보면 허울뿐인 이름이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빛 좋은 개살구다. 안내판을 따라 이름만 보고 찾아들었는데 막상 들어가면 ‘그것이 아닌 것을’ 어쩌나! 실망감이 이만 저만 아니니 무슨 차 맛이 있겠는가. 아니 찻집에 순전히 차만 마시려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어디 크게 사기 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반면에 안내판도 간판도 없는 찻집에 우연히 들렸는데 그 차실의 분위기와 멋이 주변 환경과 어울려 조화롭고 편안한 곳도 있다. 이름도 없는데 말이다. 다시 찾고 싶은 마음에 뒤돌아보게 된다.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 전라남도 담양을 여행하게 됐다. 에로 영화에 자주 보이는 메타세쿼이아길과 죽녹원(竹綠園) 그리고 소쇄원(瀟灑園)과 가사문학관(歌辭文學館)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한국 전통 정원(庭園)의 대명사 소쇄원 정자에 앉는 순간 차 한 잔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음 목적지 가사문학관에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장맛비에 온통 푸르게 물든 가사문학관은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순간 내 시선을 사로잡는 안내판이 보이는데 ‘달빛 한잔 찻집’이다. 대(竹) 바람 일렁이는 달빛 한 잔… 가사문학관을 얼른 둘러보고는 함께한 지인들을 설득해 달빛 찻집으로 들어갔다. 이름만 보고는 그 찻집에서 찻자리는 대나무로 만든 찻상에 그리 멀지 않은 강진에서 만든 청자 다기를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달빛에 물들어 신비감이 배어나는 한복을 입은 여인이 맞이할 것 같았다. 벽에는 그 흔한 달빛을 노래한 시 한 수가 걸려있고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타이스의 명상곡’이 바이올린 연주곡으로 흘러나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 찻집은 이름과는 전혀 맞지 않은 공간과 분위기, 사람뿐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달빛 한 잔은 없고 대(竹) 바람은 일렁이지 않았다.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한 자리다. 여느 시골 다방이다. 쌍화탕을 시켰지만 다들 먹는 둥 마는 둥이다. 이름이 주는 이미지는 없었다. 


경주의 어느 서원(書院) 옆에 있는 찻집은 간판도 이름도 없지만 근래 내가 찾은 최고의 찻집이요 찻자리라 칭한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건물이며 물소리 새 소리가 들리고 계곡이 한 눈에 들오는 넓은 대청 같은 차실 그리고 소박하고 절제된 실내 장식과 고요함이 달빛 한 잔을 담아내기에 딱 맞는 찻집인 것이다.
담양에서 본 좋은 이름을 나는 그곳에 걸어주고 싶다. 내가 그 찻집의 소재를 밝히지 않는 것은 가을 밤 달빛이 고즈넉이 내릴 때 그 찻집 차실에서 달빛 한 잔 마셔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김상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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