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눈물

조숙향 시인 / 기사승인 : 2019-05-29 1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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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친정어머니가 내게 보인 눈물은 크게 세 번이었다. “네 공부는 시키고 싶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야간고등학교가 있다는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밤이었다. 배추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통금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마음이 초조해지고 더욱 불안해졌다. 동생들을 재우고 어머니를 찾아 조심조심 골목길을 나섰다. 저만치 동네 어귀 구멍가게 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였다.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평소 우리 형제들 앞에서 잘 울지 않던 어머니가 그날은 내 앞에서 통곡을 하며 하던 말이었다.


어머니의 안중에는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곱 딸 중 넷째였기에 형제들 사이에서 위아래 이리저리 치였다. 언니와 싸우면 동생인 네가 언니한테 그러면 안 된다하고 동생하고 싸우면 언니 노릇 못한다고 혼나기 일쑤였다. 새 옷은 받아본 기억이 없다. 언니들이 입던 낡은 옷을 얻어 입으면 그만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나는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 밑에 동생은 몸이 약해 자주 앓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어디선가 과일통조림이나 바나나를 구해다 동생에게 먹였다. 그때 내 소원은 딱 한 번만이라도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소학교를 졸업했다. 소위 조금 사는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제일 예쁘고 마음씨도 착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랑 결혼을 못 하면 절대로 장가를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할아버지한테 엄포 아닌 엄포를 놓았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리게 됐는데, 그날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가마꾼이 미끄러졌다고 했다. 가마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새색시가 곤혹을 치렀단다. 어머니는 그 사건이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해 무슨 징조 같았다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의 불행은 줄줄이 딸을 낳는 데서 비롯되었다. 집안에서는 장손인 아버지의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무려 일곱 명의 딸을 낳고 말았다. 할아버지를 선두로 집안 어른들은 한결같이 딸들이 태어난 것을 어머니의 탓으로 몰고 갔다. 그나마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아버지도 남의 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 가산은 아버지에 의해 깨끗이 탕진됐다. 그 후로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시장통이나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배추장사꾼이 되었다. 말이 장사꾼이지 어머니는 어수룩한 시골 아낙이었다.


어머니는 우리들 앞에서 절대로 아버지의 흉도 보지 않았다. 어쩌다가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서 싫은 소리를 하면 오히려 우리를 혼내곤 했다. 그러던 어머니가 울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겨울이었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술이 많이 취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낮에 시장에서 가까운 친척을 만났단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모른 체하고 그냥 지나치더라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취한 목소리에 묻어있던 아픔이 내 가슴에 박혔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우리들이 모두 잠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아랫방에서 어머니가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흐느끼며 아버지를 탓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 구슬픈 소리였다.


그 후로 어머니는 내 앞에서 두 번을 더 울었다. 그 한번은 내 미래를 앞에 두고 울었던 것이고, 두 번째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다. 강릉 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있을 때였다. 산소호흡기로 연명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어머니의 귀에 대고 “장모님 저 왔습니다. 얼른 일어나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어머니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마지막 눈물을 내 앞에 내려놓으셨다.


조숙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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