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 동학농민군 보은 북실에서 관군에 대패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7-05 10: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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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용산전투에서 호서 동학농민군 승리

12월 12일 아침에 전직 군수 박정빈이 주도하는 옥천의 민보군과 청주병이 다시 상용산리 동북쪽에서 동학농민군을 공격해왔다. 동학농민군은 산 위로 올라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호서 동학농민군이 이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상주 소모영에서 정탐을 보내 상황을 알아본즉 관군이 퇴각한다는 전황을 듣고 공격을 전개하지 못했다. 김석중의 상주 소모영군은 퇴각해 일본군과 합세했다. 탄환이 떨어진 청주병과 옥천 민보군은 밤재를 넘어 청산 방면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호서 동학농민군은 이들을 쫓아 청산 관아까지 점령했다. 


동학농민군이 승리한 용산전투에 관해 <순무선봉진등록>에는 상수 소모영 김석중의 지원으로 크게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용산전투는 동학농민군의 승리였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에는 “지금 충청 병사의 보고를 보니, 이달 13일에 영동의 전투에서 불리해져 참모관 이윤철과 병정들이 목숨을 잃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 진실로 사태에 능숙하게 대처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라고 질책하면서 대죄(戴罪, 죄를 지은 관리가 벌을 받기 전에 공을 세워 죄를 상쇄함)하라고 독려한 내용을 보면 동학농민군이 승리했음을 알 수 있다. 


관군은 동학농민군이 용산의 골짜기에서 조직적이고 막강해 대열이 흩어지지 않고 서서히 후퇴했다가 다시 포위 공격하는 전략을 써서 이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 동학농민군은 9월 18일의 총기포 이후 용산전투 이전까지 공주공방전을 포함해 17차례의 전투 경험이 있는 노련한 부대였다. 용산전투에서 관군은 충청감영의 참모관 이윤철 등 3명이 전사하고, 다수의 낙오병이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봤다.
 

▲ 황간 출신 조재벽 관련 문서. 1896년 1월 동학본부에서 발송한 문서로 3줄부터 구암(龜菴) 김연국(金演局),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경암(敬菴) 조재벽(趙在壁), 송암(松菴) 손사문(孫思文, 손천민), 신암(信菴) 김학종(金學鐘)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은 동학혁명에 참가했다 살아남아 동학교단의 재건에 동참했던 인물들이다. 황간 출신인 조재벽은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의 포덕에 앞장섰던 인물로 1897년 환원했다.

해월을 잡기 위해 관군과 일본군 종곡리 기습

해월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청주병을 추격해 12월 13일 청산 관아를 점령하고 15일까지 머물렀다. 청산에서 정비를 마친 호서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이 추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16일에 보은으로 향했다. 청산에서 원암을 거쳐 보은에 들어온 호서 동학농민군은 읍내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인 17일 북실로 들어갔다. 관군의 기록에 의하면 해월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은 12월 16일 보은에 들어온 동학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하고 관아건물을 불 질러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동학농민군이 보은 관아를 불 지른 것은 이두황이 보은 장내리를 파괴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보은으로 동학농민군이 지나갈 것을 예견한 관에서는 이들의 토벌을 위해 군대를 보은에 집결시켰다. 관군은 대관 김명환의 금영군 70여 명, 상주 소모영군 200명, 용궁현의 포수 20명, 함창 표수 19명 등이었고 민보군 수백 명이 가세했다. 일본군은 낙동의 병참군 1개 분대, 대구의 1개 분대, 금산의 군로실측대 등 50여 명이었다.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관군과 일본군은 속속 보은으로 집결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수적으로 많은 동학농민군을 공략하기 위해 야간 공격을 준비했다. 


<소모사실(召募事實)>에는 당시 일본군과 민보군이 종곡리 입구에서 파수(把守) 4명을 잡아 동학농민군의 실태를 파악한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 해월이 호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있다고 파수들이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거괴(巨魁, 우두머리) 최시형은 저녁 전까지 본촌(종곡리) 김소촌 가에 있었으나 그사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차괴(次魁) 임국호(임규호), 정대춘, 이국빈(이관영), 손응구(손병희)가 같이 그 집에 있었다. 방금 밥을 지어 먹으며 술과 떡을 먹으려 한다. 나머지 무리들도 집에 가득하며 이 마을 남녀들은 모두 다른 마을로 달아나 숨었다.

동학 교단의 최고 책임자가 이곳에 있다는 정보를 탐지한 일본군과 관군은 12월 17일 밤 종곡리 김소촌의 집에 집중 사격을 가했으나 동학도 5명만 살해했을 뿐 지도자급은 1명도 사살하거나 생포하지 못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사격 소리에 동학농민군은 전투 대세를 갖추고 대응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포위하고 새벽까지 치열하게 전투가 전개됐다.

북실 전투에서 화력의 열세로 패배

본격적인 전투는 다음 날인 12월 18일에 북실 일대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날이 밝자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확인하고 관군과 일본군을 밀어붙였다. 동학군의 기세에 눌린 일본군이 철수를 고려하자 관군이 일본군이 철수하면 관군도 다 죽는다고 하며 같이 항전하자고 독려할 정도였다. 일본군은 200미터 뒤로 밀렸고, 관군도 동학농민군에 포위돼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아침에 시작된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의 공세로 점심때까지 이어졌다.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진지 수십 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동학농민군의 포위망에 빠져있던 관군과 일본군은 후퇴를 준비하면서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막고 있었는데, 정오를 지나자 동학농민군의 공세가 약화하더니 동학농민군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수세에 밀렸던 관군은 군복을 벗고 평복으로 옷을 바꿔 입고 후퇴하는 동학농민군 속으로 들어가 산 정상을 차지하고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동학농민군은 무방비 상태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고 수백 명이 희생당했다. 해월과 의암은 관군의 추격을 벗어나 청주 방향으로 급히 도주했다. 북실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공세임에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화약과 탄약의 부족 때문이었다. 17일 밤과 18일 오전에 동학농민군은 갖고 있던 화약과 탄약을 모두 소비해 더 이상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관군은 이 틈을 노려 동학농민군을 공략해 승리했다.
 

▲ 청산현지도(1872년 지방도). 동학농민군은 지도 아래 가운데의 영동 밤재를 넘어 청산으로 들어와 청산관아(사진 가운데 점선의 원)를 점령했다. 해월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청산에서 정비를 하던 중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 정보를 듣고 지도의 오른쪽 위 길을 타고 보은으로 들어갔다.

일본군과 관군, 숨은 동학농민군 찾아 무참히 학살

북실 전투 전사자의 수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학살한 동학농민군이 300여 명이라고 했다. <소모일기(召募日記)>는 395명, <토비대략(討匪大略)>은 야간 전투에서 살해된 수는 393명이고 총으로 죽임을 당한 수가 2200여 명에 달했다고 했다. 전투 중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은 300~400명이었다. <토비대략>의 2200여 명은 북실 전투 이후 보은 일대에서 자행된 관군과 민보군의 동학농민군 소탕으로 인해 희생된 수로 보인다. 


일본군과 관군은 북실 전투를 마치고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숨어든 동학농민군을 찾아 사살했다. 보은에서 보은취회 활동을 하는 조정미는 보은의 마을을 다니며 동학혁명에 관한 내용을 구술했는데 북암2리에서 황규하 씨로부터 “북실 전투 후 10여 명이 수철령 고개 너머 마을로 들어와 농바위에서 대치했다. 일본군이 말티재로 말을 타고 넘어와서 7명을 죽이고 2~3명만 살아남았다. 마을에서는 죽은 7명을 이병골에 묻어주었다. 이때 조부(황규백)의 집에는 하판리에 살던 안성국 씨가 숨어들었는데 조부(황규백)와는 서로 아는 사이였다. 일본군이 안성국 씨를 붙잡아 누구냐고 묻자 조부께서 자기 집 일꾼이라고 말을 해서 살아났다”는 내용을 들었다고 필자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이후 인성국 씨는 명절 때 황규백 씨를 찾아 고마움을 전했고, 죽을 때 후손들에게도 우리 가문을 살려준 분이니 명절에는 찾아가 인사를 드리라고 유언해 지금까지도 두 집안은 끈끈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동학혁명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북실 전투 이후 관군과 일본군은 숨어 있는 동학농민군을 찾아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렇게 살해된 동학농민군이 2200여 명에 달했다. <토비대략>의 학살자 수가 과장이 아님을 주민들의 구술로 확인할 수 있었다.
 

▲ 보은군 지도(1872년 지방도). 보은군 지도에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됐던 장안의 장내리(아래 가운데의 원)과 동학혁명 당시 3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북실(가운데 중앙 부분의 네모)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되자니 전투를 마지막으로 호서 동학농민군도 해산

보은의 북실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가까스로 몸을 피한 해월과 동학농민군은 청주의 화양동을 지나 충주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12월 21일 충주 외서촌(음성군 금왕읍)의 되자니(도청리)로 숨어들었다. 되자니는 충의포 도소가 있던 황산에서 불과 20리 동남 쪽에 위치한 곳으로 신재련 접주의 집이 있었다. 해월 등 동학 교단의 지도부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3일간 도전리에 숨어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주민이 이를 관에 알려 12월 24일 이곳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표영삼은 도청리를 찾아 1907년 전교를 역임한 정조헌으로부터 “동학군이 남쪽에서 올라와 3일간 체류하면서 식량과 의복을 조달했다. 이곳 주민이 청주병영에 연락해서 관군과 일본군이 출동해 무극 방면에서 협공해 왔다. 지세가 불리한 동학군은 건너편 능선으로 이동해 한나절 응전했다. 끝내 탄환이 떨어져 패주했다”고 되자니 전투에 대해 들었다. 일본군은 이미 동학군이 음죽 일대를 지나갈 것을 예상하고 12월 18일 가흥수비병을 장호원과 음죽 사이에 정찰대로 파견했다. 12월 24일의 되자니 전투는 정찰대였던 가흥수비대와 일본군 본진은 제18대대와의 전투여서 동학농민군은 적지 않은 희생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수십 명이 전사했는데 일본군은 1명만 부상당했다. 필자도 작년에 도청리를 찾아 한교원(89세)으로부터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는데 되자니 전투에서 일본군이 1명 부상당해 아래 되자니의 청년 2명이 부상병을 일본군 병영으로 부축해 주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해월은 되자니 전투에서 패한 직후인 12월 24일 호서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결정했다. 12월 2일 전봉준이 체포됐고, 이를 전후해 김개남, 손화중 등 남접의 동학군 지도부가 체포된 상황에서 관군과 일본군은 남은 호서 동학농민군의 소탕에 혈안이 돼 있었다. 해월은 임실에서 호서 동학농민군과 함께 이동했는데 갈수록 인원이 증가해 피신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피신 과정에서 용산전투를 제외하고는 일본군과 관군에 연패하면서 더 이상 대규모로 활동할 수 없어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서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12월 24일을 끝으로 해산했다.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후 한 달 동안 호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저항하며 동학혁명을 이어나갔다. 

 

▲ 보은 북실 동학공원의 동학혁명군 위령비. 20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북실 일대에 동학혁명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전국의 동학혁명 관련 조형물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졌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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