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문예부흥의 은인 못다 한 귀향(2)

이기우 사단법인 해돋이관광협의회 이사장 / 기사승인 : 2020-07-17 10: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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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K寶庫 큐레이팅하다

방어나루 풍운아 천재동

<남매의 비극>, 세계사적인 탈식민지 문화교육의 모델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을 시작으로 일본이 그토록 숨기고 발뺌하던 일본군이 조직적이고 악의적으로 공출여성을 대상으로 위안소를 관리해 나갔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남태평양 트럭섬을 비롯한 팔라우섬, 나우르섬 등 곳곳에 종군 위안소를 차렸던 그들의 만행과 종군위안소 출입증 발급의 실체가 드러났다. 


1946년 천재동은 원양어선을 타는 김삭부로부터 남태평양 어느 섬에서의 실화를 듣게 된다. 희곡 <남매의 비극>의 제작 배경이다. 김삭부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태평양 이름 모를 섬에 정신대 위안부가 왔었다. 이게 무슨 운명인지 뜻밖에도 누이 동생이었다. 이 비참한 현실 앞에 격분한 나머지 그 병사는 총을 난사해 두 남매가 자결했다.” 공연을 앞둔 8월 20일 이름 모를 큰 태풍이 왔다. 이때 바닷가에 떠밀려온 목재를 건져 올려 극단 운영비에 보탰다. 공연은 성공적으로 치렀다.


항일예술가 천재동의 시대적 면모를 드러내는 대표 희곡 <남매의 비극>은 일본군의 조선인 공출여성 위안소 문제를 다뤘다. 1990대 이후 연극을 필두로 2000년에 이르러 뮤지컬‧영화가 본격적으로 이슈화됐다. 위안부를 다룬 연극 <낭자군>이 1992년 제4회 전국대학연극제 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한국 최초의 위안부 연극으로 각인됐지만, 1946년 올려졌던 천재동의 <남매의 비극>이 그 효시다. 


천재동은 <남매의 비극>을 통해 일본 식민지 치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했다. 감히 드러낼 수 없었던 시대에 치욕적이고 수치스런 삶을 살았던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며 함께 극복하고자 했다.
 

▲ 평화의 소녀상, 김운성 작, 2011년

 

▲ 연극 <증곡 천재동> 극단 푸른가시


젊은 처용의 영웅담을 그린 <바다를 건너가는 처용무>

천재동은 친척 변동조 아저씨로부터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처용의 이야기를 토대로 극화했다. “처용랑은 웅장한 풍채에 병을 잘 고치고, 노래와 춤에 지‧덕‧체를 겸비했다. 16세의 처용이 울산을 침범한 왜장 ‘이와’와의 담판을 통해 평화협상을 이끌어냈으며, 그들에게 춤을 가르쳐서 돌려보냈다”는 이야기였다. 촌장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처용은 재산보다 생명이 중요하다며, 침략해온 왜구의 관점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인격적인 대상으로 삼아 갖은 정성을 쏟는다. 이에 처용을 흠모한 왜장은 평화의 징표로 처용의 화상이나 이름자가 있는 곳에는 침범하지 않겠다고 언약한다. 처용을 가상 인물이거나 아라비아인도 아니고 설화나 전설의 인물이 아닌 울산 세죽마을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로 보았다. 


1막 5장으로 구성된 미발표 희곡 <바다를 건너가는 처용무>의 시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대이고, 그 배경은 개운포, 세죽리, 처용리 일원이다. 1장에는 세죽마을의 역사성과 시대상을 그렸다. 개운포 마을 앞 바다 바위섬이 배경이다. 2장에는 바위섬을 끼고 청룡, 황룡, 용왕, 궁녀가 군무하는 장면이 펼쳐지며 말몰이 탈춤꾼이 등장하는 몽환적인 광경으로 진행된다. 3장에는 왜선 20척이 동원된 전쟁을 그렸다. 울산의 함락은 곧 서라벌의 수성에도 심각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위기상황이다. 남산에서 처용무를 연마하던 처용랑이 이 소식을 접하고 마을 촌장들에게 위기관리 전권을 요청한다. 4장에는 왜구 수령 이와와 평화를 담보로 벌이는 처용랑의 활약상을 그렸다. 5장에서 이와는 처용랑으로부터 배운 춤을 징표로 여기고,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작별을 고하며, 처용에게 처용무를 청한다.
 

▲ 처용암 처용문화제 처용맞이


참여형 전인교육으로 이끈 전교생 동시수업

광복으로 일본인들의 방어진심상학교는 한국인 교사로 대체됐다. 천재동 교사는 교육당국으로부터 우선 학교를 지켜 달라는 요청에 애향심과 사명감으로 응하게 된다. 천재동은 늦은 밤 집에 들이닥친 사람들로부터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갔다. 눈을 뜨니 방어진삼거리였다. 무릎을 꿇리고 보니 죽창을 든 좌익계 청년들이 둘러 서 있었다. 죽창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발길로 차이며 “인민교육을 시켜라, 오장육부가 썩어 빠진 놈!”하며 협박을 받았다. 긴장 속에서도 “이념교육에 앞서 한글이 먼저다. 교육당국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한 차례의 위협이 있었다. “자네하고 손만 잡으면 우리 천지가 되니 나하고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인민교육은 모른다. 문맹퇴치를 위해 한글부터 가르쳐야 인민교육도, 민주교육도 할 것 아니냐?” 이에 K선생은 여섯 개의 총알을 책상 위에 쏟아 부어 놓고, 마른 수건으로 권총을 닦는 듯 총구를 겨냥하기도 했다. 천재동의 확고한 교육관을 확인한 그는 천재동을 돌려보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사회주의 활동을 한 방어진초등학교 교사들이 연행된 후 교사 직위에서 해임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남아 있던 교사는 천재동을 포함한 2명이었다. 이에 대해 천재동은 “전교생이 한꺼번에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소운동회, 학급별 학예회, 사생대회, 야외행진 등’ 2개월간 이상 없이 학교를 운영했다고 술회했다. 200여 명의 아동들에게 창의인성교육을 펼쳐 학부모들로부터 호평도 받았다.
 

▲ 천재동, 김병희 박사의 화해(장세동 소장 주선)

 


꽃의 시인 김춘수와 천재동의 탈 해프닝

한국의 명시 ‘꽃’을 발표한 김춘수 시인은 천재동의 탈을 보고 “절망, 고통마저 웃음으로 만든 한국인의 표정을 현대에 되살려내었다”라고 평했다. 1970년대 대중잡지 <샘터>에 ‘절대로 절대로’가 소개됐다. 


절대로 절대로// 큰 바가지는 엎어져서 엉둥이를 하늘을 보고 있다./ 작은 바가지는 나동그라져서 배때지가 하늘을 보고 있다./ 밝은 날도 흐린 날도 큰 바가지는 엎어져서 엉둥이가 웃고 있다./ 작은 바가지는 나동그라져서 배때지가 웃고 있다./ 천재동의 바가지가 그렇듯이/ 밝은 날도 흐린 날도 큰 바가지는 눈이 엉둥이에 가 있고/ 작은 바가지는 눈이 배때지에 가 있고/
큰 바가지는 엉둥이로 웃고 작은 바가지는 배때지로 웃고 있다./ 천재동의 바가지가 그렇듯이
밝은 날도 흐린 날도 절대로 절대로 울지 않는다.


천재동은 이 시가 실렸을 때 “내 바가지탈을 주제로 한 시가 어쩌면 그렇게 나의 심중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인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탈 제작가 천재동의 인지도가 높았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 동래야류 말뚝이탈, 1930년대 김용우 작, 원형탈, 천재동 복원 탈, 눈이 막힌 탈


역사덩어리 토우는 고향의 노래

천재동은 신라의 유산인 토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에 착안했다. 천재동의 외가였던 경주에서 본 옛 조상들의 천년 토우에 대한 여운이 오래갔다. 화합의 두레 정신을 아름답게 이어 내려온 고향의 삶을 소박하게 빚었다. 자신이 자라던 시절을 흙으로 빚어 역사의 생명을 넣어 후세들에게 보여주고 조상의 얼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는 신라 토우에 대해 민중의 삶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표현된 하나의 역사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훗날 인체화 공부를 결심하게 된 배경이 됐다. 


이렇듯 천재동은 고향사람들의 모습을 흙으로 빚어낸 토우들을 그의 탈 작품과 함께 선보였다. 한국 최초의 창작 토우 전시회였다는 것은 국제신문(1968.4.28) 기사 ‘천재동 민속공예전’을 근거로 했다. 


그의 토우 작품들은 늘 친근하기만 하다. 그의 한국적 정서와 손길이 빚어낸 작품 제목만으로도 정겹다. ‘그네뛰기’, ‘추위노래’, ‘자장노래’, ‘사랑노래’, ‘부모노래’, ‘우리형제’, ‘어깨동무’, ‘숨바꼭질’, ‘방귀 꿔주리’, ‘오줌싸개’, ‘지게노래’, ‘먼 산 보기’, ‘해 노래’, ‘잠자리 잡기’, ‘뻐꾹새’, ‘새 쫓기’, ‘나물노래’, ‘우물노래’ 등 해학미가 넘치는 특성이 있다. 


동요민속화가 평면적 표현이라면 토우는 입체적 표현이다. 홀로 있는 모습보다는 둘이나 셋, 또는 다수가 작품의 대상이다. 더불어 사는 인간사회를 근원으로 하는 한국근대의 생활상과 동요를 입체로 표출했다.
 

▲ 창작토우 ‘봄노래’, ‘장보기’


부산 동래 교류, 통영 윤이상, 제주도 이중섭 사례

천재동이 광복과 전쟁 후의 가난했던 시절 울산과 부산에서 척박했던 문화기반을 극복하고 그 꽃을 피웠다는 것은 지역성을 넘는 문화 확대를 이룩한 메신저라는 점에서 울산광역시 동구와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자매결연을 통한 문화교류 협력을 주창한다.


음악가 윤이상을 정점으로 국제음악도시를 추진한 통영시 사례와 제주시의 서귀포에 1년 남짓 화가활동을 했던 이중섭을 내세워 착안한 도립미술관의 설립과 활용 사례들에서 혜안을 가져야 한다. 


울산광역시는 천재동에 대한 학술 심포지엄과 그의 콘텐츠의 보존‧유지 및 확장성을 위해 구심점 역할을 다해야 한다. 천재동이 소극장 운동을 펼쳤고 전람회를 했던 고향 울산은 문예부흥의 근거지다. 공공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동구지역의 문예부흥과 산업문화 관광 활성화를 위한 동구예술의전당 조성, 천재동 기념관 건립이 필요하다. 


융복합 콘텐츠 ‘천재동 탈·토우·동요나라 예술제’는 문화예술 향유에 기여한다고 본다. 천재동의 탈‧토우‧동요 소재와 예술적 행로의 뮤지컬화, 천재동이 고려장을 기반으로 만든 지게목발장단놀이에 탈과 넌버벌 요소를 융합해 문화도시로의 콘텐츠를 확보해야 한다. 나아가 천재동의 다양한 예술적 일화에 IT를 접목한 홀로그램, 애니메이션, 웹툰, 웹드라마, 혼합현실(증강현실, 가상현실) 등 다양한 천재동 콘텐츠의 확장이 지역관광산업에 효과적이다. 다크 투어리즘 차원의 적산가옥 복원에 앞서 천재동의 예술적 태동과 청년기 활동상, 창의적인 상상력과 발자취를 연계한 창의예술가 천재동 콘텐츠 체험 관광자원화가 도시재생의 주축이 돼야 한다. 

 


공연예술 뮤지컬 <로맨스 파파>

천재동의 예술 행로를 소재로 한 뮤지컬 넘버로 구성했다. (넘버1)후덕한 천호방네, 예술과객의 노래, (넘버2)히나세 거리의 축제 뱃놀이, (넘버3)화가 아니면 배우가 꿈, 재동의 노래, (넘버4)좋았어! 그대로 해! 경상도 표준어, 서울지방 사투리, (넘버5)조선의 손님, 연출가, 무대미술, (넘버6)그리운 아버지, 그분은 독립투사였네, (넘버7)결혼의 노래, (넘버8)방어진 얼룩 호랑이팀 거기에 제비가 있었네, (넘버9)무엇을 가르칠까? 페스탈로치는 나의 롤모델, (넘버10)창작은 손끝에서, 의상은 부인이! 여긴 예술창작소, (넘버11)공개시범 수업은 나의 몫, 잘 부탁합니더 로맨스 파파, (넘버12)한글을 먼저, 이념교육을 먼저, (넘버13)아동극단 창단과 청년소극장 운동, (넘버14)마당놀이에서 연극, 전시로, 창작탈 제작의 명인, (넘버15)절대로 절대로 울지 않는다. (넘버16)누룽지의 노래, (넘버17)탈이야! 프랑스, 독일, 호주 고고싱, 미국과 일본은 글쎄, (넘버18)토우는 타임캡슐, 고향의 노래, 연탄불은 창작 가마, (넘버19)내가 말했네 그가 맡으면 해결해 낸다네, (넘버20)그에게 반했네 그가 처용랑, 눈부신 그대, (넘버21)그 탈이네, 눈이 뚫려있어 세상을 바라보던 그 탈이야!


울산광역시는 증곡 천재동의 생몰지역에서 체험형 예술문화교육의 새로운 아이콘이 될 천재동 예술관과 천재동 문화거리 조성을 위한 로드맵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예술문화교육자로서 천재동이라는 한 예술가의 문화예술혼을 복원 계승, 발전시켜나갈 기념사업회에 시민들의 참여로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 2015년 현대예술관 미술관에서 열린 증곡 천재동 전


이기우 사단법인 해돋이관광협의회 이사장, 문화예술관광진흥연구소 대표, 천재동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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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우 사단법인 해돋이관광협의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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