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오영애 울산환경과학교육연구소 대표 / 기사승인 : 2020-09-03 10: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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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J.M.쿳시 지음 / 동아일보사

 

<추락>은 아프리카에서 백인정권이 종식되고 흑인에게 정권이 이양된 남아프리카가 무대이다.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행한 참혹한 식민사, 인종과 언어문제, 성과 결혼 문제 등이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압축돼 있다. 이야기는 교수인 주인공이 대학의 성폭력대책위원회에 고발당하는 사건과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교수의 딸이 농장을 찾아 온 흑인 세 명에게 윤간을 당한 후의 심리와 태도를 다룬다. 


루리 교수가 제자인 멜라니에게 매혹돼 제자를 집으로 데리고 와 잠자리를 하는 과정을 “그는 거실 바닥에서,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에 맞춰, 그녀와 사랑을 한다. 그녀의 몸은 깨끗하고 단순하고, 그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다. 그녀는 내내 수동적이지만, 그는 그 행위에서 만족감을 느낀다”라고 묘사한다. 필자는 교수가 위원회에 고발되기 전에 ‘아, 이건 성추행이구나’라고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교수의 딸이 흑인에게 윤간을 당하고도 그들을 경찰에 고발하지 않고, 윤간 후 생긴 아이를 낳아 기를 결심을 하게 하는 전개 역시 놀라웠다. <추락>은 박범신의 소설 <은교>, 도스토엡스키의 <죄와 벌>이 연상되고, 삶의 부조리한 현실을 그리고 있어 프란츠 카프카도 떠오르는 소설이다. 


루리 교수는 위원회에 고발된 후 유죄를 인정하지만 카운셀링은 거부한다. “기질과 두개골은 몸에서 가장 딱딱한 두 부분이다”라는 책속의 표현처럼 완고했다. “그것은 나한테는 모택동 시절의 중국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것 같더라. 자기주장의 철회, 자아비판, 공개적인 사과, 나는 구세대라서, 차라리 벽에 세워져 총살을 당하는 게 낫다. 그렇게 끝났다.” “지금은 청교도적인 시대야. 사생활은 공적인 것이 되지. 사람들은 성적인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거야. 그들은 가슴을 쥐어뜯고, 뉘우치고, 가능하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구경하기 원했지. 사실상 TV쇼를 원한 거지. 나는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으려 했고.” 


이렇게 생각하던 루리 교수가 소설 후반부 멜라니의 가족들에게 말한다. “당신의 딸이 내 안에 지핀 것은 그런 종류의 불이었어요. 나를 다 태워버릴 정도로 뜨겁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진정한 불이었어요.” 


멜라니의 아버지는 교수의 고백을 자기변호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그를 가족 식사에 초대해 교수의 진정한 참회를 이끌어낸다. “나는 나와 당신의 딸 사이에 있었던 일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수치스러운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거기서 나를 건져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거부했던 것은 처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반대로, 나는 날이면 날마다 그것에 입각해 살아가며, 수치를 나의 존재 상황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시골 동물보호소에서 유기견의 안락사를 도우며 사는 루리 교수, 그리고 윤간으로 임신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까지 농장을 지키려고 하는 딸에게서 화해와 공존이란 그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폭력으로 참혹한 식민지 시절을 보낸 남아프리카 흑인들의 삶과 그 흑인들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딸, 지난 날 위력으로 제자를 가지려고 했던 루리 교수가 현재적 상황, 현재적 인물이라는 점도. 


오영애 울산환경과학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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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애 울산환경과학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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