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孫秉熙), 손천민(孫天民), 김연국(金演局)의 3인 집단지도체제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7-26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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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세 사람의 이름으로 발표한 경통

해월은 동학혁명 이후 교단의 수습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1896년 1월 11일 손병희, 손천민, 김연국 3인의 집단지도체제를 마련했다. 이날 해월은 “너희들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천하(天下)가 이 도를 흔들고자 할지라도 어찌하지 못하리라”하면서 세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마음을 합칠 것을 당부했다. 이들 세 사람은 30대 중반으로 해월을 10년 이상 보좌하였던 중진들이었다. 해월은 자신이 연로한 상황에서 이 세 사람을 전면에 내세워 교단을 중흥하고자 했다. 이후 세 사람은 해월의 가르침을 받아 도인들에게 동학 교단의 공문인 ‘통유문’을 내렸다.

태고(太古)의 천황씨(天皇氏)는 우리 선사(神師, 최제우)께서 스스로 비교한 뜻이요, 산 위에 물이 있다는 것은 우리 교(敎)의 도류(道流)의 연원(淵源)이니, 이 현기(玄機)와 진리(眞理)를 안 다음에라야 개벽(開闢)의 운(運)과 무극(無極)의 도(道)를 알 수 있으리라.
슬프다, 나무는 뿌리가 없는 나무가 없고 물은 근원이 없는 물이 없으니, 만물도 오히려 이와 같거든 하물며 이 고금에 없는 오만년(五萬年) 내려갈 초창(初創)의 도운(道運)이랴. 내가 불민(不敏)한데도 훈도전발(薰陶傳鉢)의 은혜를 힘입어 삼십여 년까지에 온갖 어려움을 맛보고 거듭 곤란과 재액을 겪어서 사문(斯門)의 정맥(正脈)이 거의 흐린 물이 맑아 깨끗함에 돌아오고, 섞인 것을 버리고 순수함에 이르렀으나, 호해풍상(湖海風霜)의 형상과 그림자가 멀고 막혀서, 혹은 중도에 그만두는 일도 있고, 또 한 소쿠리가 부족한 것도 많으니 진심으로 슬프도다. 대개 우리 도가 진행하는 성부(誠否)는 오직 내수도(內修道, 부인)의 잘하고 못하는 데 있느니라. 현전(賢傳)에 이르기를 ‘오직 한울님은 친함이 없는데 극진히 공경하면 친함이 있다’ 또 이르기를 ‘부인을 경계하여 집안과 나라를 다스린다’라고 하였으니, 그런즉 내수도에게 지극히 공경하고 지극히 정성을 드리는 것이 어찌 우리 도의 큰 관건(關鍵)이 아니겠는가.
근일에 교도들이 내정을 경계할 것은 오히려 말할 것도 없고, 몸을 닦고 일을 행하는 것 역시 가볍게 보고 업신여기고 게으른 것이 많으니, 이런 일이 많음으로써 방에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나루터를 묻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어찌 두렵고 민망할 일이 아니겠는가?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면 반드시 배워서 통달하나니, 대개 가르치지 않아도 착하게 되는 것은 상지(上智)요, 가르친 뒤에 착하게 되는 것은 중지(中智)요, 가르쳐도 착하게 되지 않는 것은 하우(下愚)니라. 사람의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같지 아니하고 성범(聖凡)이 비록 다르나, 작심(作心)하여 쉬지 않으면 어리석음이 가히 지혜롭게 되고 범인(凡人)이 성인(聖人)으로 될 수 있으니, 모름지기 명심수덕(明心修德)에 힘써서, 늙은 사람의 말이라도 버리지 말고 더욱 함양하는 마음을 힘쓰도록 하라.


이 통유문은 세 사람의 이름으로 나갔으나 내용을 살펴보면. 해월이 교도들에게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해월이 자신이 쓴 통유문을 세 사람의 이름으로 교인들에게 내보낸 것은 해월이 후계 구도를 정립했음을 교인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통유문에서는 특히 마음을 밝히고 덕을 닦으라는 명심수덕(明心修德)을 강조해 동학혁명 이후 교단 통합과 발전을 위해 신앙을 확립하고자 하는 해월의 의중을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 손병희 생가와 기념관. 손병희의 출생지인 청주시 북이면 금암리에 위치해 있다.

손병희의 동학 입도 동기

삼암 가운데에서 손병희는 최종적으로 해월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아 동학의 3대 교조가 되었다.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음) 충북 청주군 북이면(北二面) 대주리(大舟里, 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아버지 손두흥(孫斗興)과 어머니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어릴 때 이름은 응구(應九)였다. 해월로부터 의암(義菴)의 도호(道號)를 받았으며 일본으로 외유할 때에는 공주갑부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썼다. 딸 셋을 두었는데 첫째 사위는 3.1운동 민족대표인 이종훈(李鍾勳)의 장남 이관영(李觀泳), 둘째 사위는 정광조(鄭廣朝), 셋째 사위는 어린이운동을 전개한 소파 방정환(方定煥)이다. 손병희는 어려서 서자로 차별을 받으면서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찍부터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왔으며, 호방한 기질과 의리도 남달리 뛰어나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결혼 후 집안의 시사(時祀)에 서자라고 조상의 묘에 인사를 올리지 못하게 하자 분통을 터트리며 곡괭이로 조상의 묘를 파 뼈 하나를 추려 따로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며 부조리한 신분제를 혁파하려 했다. 또 친구들과 인근의 초정약수를 찾았다가 양반들이 약수 입구에서 자리를 깔고 서민들이 약수를 먹지 못하게 하자 양반들을 두들겨 패는 의협심을 보인 일은 유명하다. 


먼저 동학에 입도했던 조카 손천민이 동학을 잘 하면 삼재(三災)와 팔난(八難)을 면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학을 권했다. 손병희는 “그런 도(道)라면 조카나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 “나는 이 세상이 확 뒤바뀔 것을 바라는 사람이다. 썩어빠진 세상에 혼자 재난을 피해 편안하게 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동학 입도를 거부했다. 그후 청주접주 서우순이 다시 손병희를 찾아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하는 도라고 입도를 권하자 그렇다면 사나이로서 해볼 만하다고 입도했다. 그때가 1882년 10월 5일이었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3년간 매일 주문을 3만 독을 외우면서 자신의 지난 과오를 참회하고 동학도인으로 거듭났다. 3년의 공부를 마치고 해월을 만나 인정받고 공주 가섭사에서 49일 수련을 하면서 해월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부터 손병희는 동학의 주요 인물로 자리 잡았다. 이후 1892~3년의 교조신원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광화문복합상소에서는 9명의 상소인으로 참여했고, 보은 교조신원운동에서는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로 시위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 일본 외유 시기의 손병희. 왼쪽부터 조희연, 권동진, 오세창, 손병희다. 손병희는 일본에서 외유 중 망명하고 있던 개화파를 만나 교류했고 이들을 대부분 천도교도로 만들었다.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중앙총부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권동진과 오세창은 손병희의 권유로 3.1운동의 민족대표가 됐다.

동학혁명의 통령으로 전봉준과 합류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후 호남의 동학농민군과 의견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9월의 총기포 시 해월로부터 호서동학군의 통령(統領)으로 임명돼 참가했다. 충북 옥천군 청산면 문암리에 집결한 동학군을 지휘하며 논산 소토에서 전봉준(全琫準)이 지휘하는 호남동학군과 합류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치른 이인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태인까지 전봉준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하자 후일을 도모하며 전봉준과 헤어졌다. 전봉준과 헤어진 이후 임실로 내려와 해월과 함께 관군과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강원도로 탈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해월로부터 의암(義菴)의 도호를 받고 3인 집단지도체제를 이끌어나갔다. 3암 중 가장 나이가 적었지만, 도량이 넓고 의협심이 강해 해월로부터 “그대의 절의(節義)는 천하(天下)에 미칠 자(者)가 없다”는 칭찬을 받았다. 


1897년 12월 24일 해월은 3암을 불러 “너희들 가운데 주장이 필요하니 의암으로 주장을 삼는다”고 했다. 이로써 의암은 동학의 종통을 이어받아 3세 교조가 됐다. 교조가 된 뒤 동학교단의 내분을 통합하고 풍기에서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설법식(設法式)을 거행해 지도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학 재건에 노력했다. 그렇지만 교단에 대한 탄압과 자신에 대한 체포령이 수그러들지 않자 세계 대세를 살피고 동학교단 재건 구상을 위해 미국 시찰을 계획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미국행이 여의치 않자 일본에서 약 4년간 외유했다. 일본에서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을 쓰며 오사카, 교토(京都), 나라(奈郞), 고베(神戶), 도쿄(東京) 등지를 다니며 망명해 있던 개화파인 박영효(朴泳孝),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조희연(趙羲淵), 이진호(李軫鎬) 등과 교류했다. 의친왕과도 교류해 동학에 입교시켰다. 


손병희는 일본에 있으면서도 교세 확장에 노력했다. 또 2차에 걸쳐 교인 자제를 선발해 일본 교토와 도쿄로 불러들여 새로운 근대학문을 배우게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게 해 개화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진보회는 대동회(大同會), 중립회(中立會)를 거쳐 1904년 8월 31일 대대적으로 흑의단발(黑衣斷髮)의 개화운동을 전개했으나 동학혁명을 일으킨 동학도라는 것이 알려져 조정으로부터 탄압받았다. 특히 태천(泰川)의 고치강, 황주, 함흥 등지에서 많은 동학교인과 회원들이 참살당했다. 개화혁신운동을 주동하던 이용구가 송병준의 매수로 일진회를 만들어 친일 활동을 전개하자 이용구를 단죄하고 교단의 명칭을 1905년 12월 1일 천도교(天道敎)로 바꾸었다. 이듬해인 1906년 귀국해 서울의 다동(茶洞)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고 근대적 종교의 틀을 갖추었다. 

 

▲ 서울 송현동에 건립한 천도교중앙총부 건물. 손병희는 귀국 이후 다동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했다가 이곳 송현동에 근대식 건물을 지어 천도교중앙총부를 옮겼다.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어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시설을 들여와 천도교중앙총부 내에 박문사(博文社) 인쇄소를 설치했으며, 다시 보문관(普文舘)으로 재설립하고 홍병기(洪秉箕)를 사장에 임명했다. 이어 국내 최초의 대판형 신문인 기관지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해 계몽운동과 함께 일진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광무학교와 각 신문사에 후원금을 기부했다. 귀국 후 천도교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는 한편 아끼는 제자였던 이용구를 설득했으나 이용구가 듣지 않고 천도교인을 포섭해 친일활동을 하며 손병희를 중상모략하자 1906년 9월 17일 이용구와 그 추종세력 100여 명을 출교시켜 친일 종단이 아님을 밝혔다. 


당시 이용구가 천도교의 재정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출교당할 때 천도교의 재정을 가지고 가서 교단은 재정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손병희는 1907년 4월 성미제(誠米制)를 실시했다. 성미제는 1911년 4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이중과세’라고 해 금지당하자 무기명 성미제로 변경해 재정난을 타개했다. 이 성미제로 모은 자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됐다.


손병희는 일본 외유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인지하고 귀국 후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아 먼저 여러 학교에 후원했다. 당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해 문창학교(文昌學校), 보창학교(普昌學校), 양영학교(養英學校), 창동학교(昌東學校), 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 광명소학교(光明小學校), 석촌동소학교(石村洞小學校) 등 경영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에 일정액의 후원금을 매월 지원했다. 나중에는 당시 최대의 사립학교였던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를 인수해 경영했다. 이밖에도 지방에는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 현 대륜고등학교), 일신보통학교(日新普通學校), 청주 종학학교(宗學學校) 등 7~8개 학교를 후원하거나 설립했다.

 

▲ 의친왕 이강. 일본에서 손병희와 교류했고 천도교에 입교했다. 그의 민족의식은 손병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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