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인과 사랑한 양산의 권순도 세계인을 환영하다(1)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06-26 10: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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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양산 35번 국도를 따라가다 상북면 대석리 대성마을을 거쳐 대석마을을 지나면 무지개 폭포로 유명한 홍룡사의 홍룡폭포를 갈 수 있다. 대석마을 입구에 붉은 글씨의 “세계인(世界人) 환영비(歡迎碑)”가 서 있다. 다른 측면에는 “명승(名勝) 홍룡폭포(虹龍瀑布)” 그리고 “설립인(設立人) 권순도(權順度)”가 새겨있다. 


권순도(1870~1934)는 왜 이곳에 “세계인 환영” 비를 세웠을까. 이야기는 19세기 말 부산 개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 문물에 눈이 어두웠던 조선은 부산항 개항과 더불어 1883년 11월 부산 해관(세관)이 설치됐고 3대 해관장으로 1885년 인천 부세관장으로 있었던 영국인 조나단 헌트(Jonathan H. Hunt, 재임기간 1888~1898)가 부임했다. 당시 해관은 수출입 관리, 관세 징수의 주 업무 외에 선박 입출항, 보세창고, 개항장 관리, 어장 인허가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해관장은 관세, 재정수입, 회계, 직원 실태, 관내 동향, 밀무역, 외국 선박, 재산 등 상황을 총 세무사에 보고했다.
 

▲ 권순도의 ‘세계인 환영’ 비석


개화 청년이 되고 싶었던 양산 서생 권순도

영국인 헌트의 조선 이름은 하문덕(何文德)이다. 헌트는 부인과 18세의 외동딸을 데리고 부산에 왔다. 하문덕은 약 10년에 걸쳐 근무했다. 부산항 개항 뒤 처음으로 물양장을 만들기 위해 부산해관 북안 일대의 매축 허가를 신청했다. 정부에 매축 공사비 1000량을 요구해 공사비 전액을 받은 하문덕은 용미산을 깎아 바다를 매립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외국인이 남의 나라 땅의 형질을 변경하는 데 매우 부정적이었다. 헌트 해관장은 청나라 이홍장과 함께 고종을 설득해 매립허가와 함께 공사비를 받아 해관부지를 조성했다. 당시 산을 깎아서 바다를 매립한 해관공사(海關工事)가 오늘날 부산항매립공사의 효시가 됐다. 헌트 해관장은 부산항 매립의 선구자였다.

 

▲ 용미산과 부산항(1885)

지금의 복병산(伏兵山)과 매립으로 없어진 영선산(현 부산 중부경찰서 부근) 사이에 있는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해관 관사에는 정원사 겸 서생(書生)이 필요했다. 때마침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이 양산 대석마을의 권순도였다. 영어를 배워 서구문물을 배우고 싶었던 개화 청년인 그는 아마 선교사로부터 배운 짧은 영어 실력을 앞세워 해관 관사에 취직한 듯하다. 성실한 권순도는 신발을 몸에 품고 세관장에게 내놓기도 했고 리즈 헌터에게는 말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등 가깝게 지냈다.

리즈 헌터와 국경과 인종을 넘는 사랑을 한 권순도

시간은 흘러 영어도 익숙해지면서 잘생기고 활달하고 지성적인 권순도는 리즈 헌터와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는 사랑을 했다. 어느 날 아내로부터 딸이 정원사에 의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세관장은 화가 잔뜩 나 권순도에게 권총을 겨누며 쏘아 죽이려고까지 했다. 위기를 느낀 권순도는 어둠을 틈타 이방인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리즈 헌터에게 남장을 한 다음 방갓을 쓰게 하고 양산 대석리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했다.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서양 여자를 권순도가 데려오니 대석 마을 사람들도 신기해했다. 하지만 해관장은 외교관의 특권을 내세워 동래감리서에 수색원을 내고 이들의 행방을 쫓아 권순도의 집까지 찾아왔다. 권순도의 집은 현재 대석마을 아랫각단에 있는 ‘홍룡로 117(대석리 288)’이다. 현재 그 집에 사는 할머니가 권주사가 살던 집이라 증언하고, 마을의 전병구(70세) 씨가 이를 확인해주었다. 아랫각단에 있는 권순도의 옛집은 310평이 넘고 하천 가까이 있으며 맞은편 산을 소유했단다. 한때 부산에 살던 후손이 찾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결국 권순도는 동래감리서 구치소에 갇히게 됐다. 그러나 세관장의 딸이 식음을 전폐하는 등 권순도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막지 못했다. 해관장 헌트는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다 실패하자 1898년 2월에 임신한 딸을 데리고 부산항을 떠나 홍콩으로 가버렸다. 홍콩으로 간 딸 리즈 헌트는 결국 아들을 낳았으며, 권순도에게 매번 아들의 소식과 생활비를 보내왔다. 권순도는 그 돈으로 중구 동광동 3가에 포목점인 ‘권순도 상회’를 차렸다. 영국제 기계 면직물인 양포(洋布)가 수입품으로 인기가 있을 때 그는 이것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훗날 세관장 관사는 또 미국 의료선교사 C.H.Erin(어을빈 魚乙彬, 1862~1935)과 간호사 양유식(1888~?)의 26살 차이 나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랑의 공간이 된다. 당시 부산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는 사랑의 공간이었다.
 

▲ 권순도와 리즈 헌터의 사랑의 공간이었던 부산해관장 관사


면암 최익현의 관을 붙잡고 울었던 권순도

권순도는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순부(順富), 호는 죽우(竹友). 별좌(別坐)의 관직을 역임했던 권경의(權敬義)의 후손이다. 음직(蔭職)으로 주사(主事) 승승훈랑(陞承訓郞)에 올라 문묘(文廟)의 직원(直員)을 역임했다. 그의 사상적 스승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이었다. 최익현은 나라가 망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유학의 의리론에 따라 개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입장에서 불의한 세력에 대한 무장투쟁 노선을 선택한 유학자다. 


부산 초량에서 1906년 7월 대마도로 유배 가는 최익현을 권순도는 처음 만나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몇 달 뒤 최익현은 1907년 1월 1일 단식 끝에 순국했다. 부산 초량에 최익현의 영구가 오자 부산 상무사에서 업무를 주관했다. 1월 6일 최익현의 영구를 실은 배가 초량항에 도착했을 때 구름이 끼고 가랑비가 내리던 날씨에서 쌍무지개가 동남쪽으로 걸쳐 뜬 날씨로 변했다. 


상무사는 모든 사원과 함께 사무를 철폐하고 망곡한 다음, 큰 글씨로 ‘면암최선생호상소(勉庵崔先生護喪所)’라 써서 문 위에 걸었다. 그리고 사원을 분정해 상구(喪具)를 준비했다. 그때 권순도는 상례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는가를 관장하며 책임을 지는 호상(護喪)을 맡았다. 상무사 사원 1천여 명이 큰 상여를 갖추고 큰 글씨로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비단에 써서 간대에 걸고 나와 영접했다. 초량 앞바다에서 관을 땅에 내리자, 권순도는 관을 붙들고 통곡하며 “이 배는 대한의 배요, 이 땅은 대한의 땅입니다”라고 했다. 부둣가에 남녀노소 수백 명이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상여 줄을 잡고 따라가는 자가 하도 많아서 5리를 잇대었다.

최익현을 기리며 대석마을에 의충단을 세우고

최익현의 영구가 부산에 도착하자 부산항민들은 집집마다 조문하는 기를 달고 일을 멈추었다. 부산항상회소에 빈소를 마련했는데 각지에서 많은 조문객으로 북적거렸다. 훗날 부산경찰서를 폭파한 박재혁의 친구 오택은 10살 때 주례에서 구포까지 만장을 들고 갔다. 동래부 기생들도 국문으로 만장을 지어 올렸고, 범어사 승려들도 불교식 제례를 지냈다. 

 

▲ 홍룡교 하천에 있는 의충단 바위


권순도는 최익현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람이다. 현재 홍룡사 입구 절경의 계곡 바위에 다음 글을 새겼다. “춘추대의(春秋大義)/ 면암(勉庵) 최선생(崔先生)/ 일월고충(日月高忠)”. 이 바위는 의충단(義忠檀)으로 권순도가 스승을 사모하며 추모한 곳이다. 그가 쓴 ‘의충단 제영(義忠壇題詠)’ 시가 남아있다.

선생의 대의는 우리 동국에서 천양되고 있나니
군자와 소인은 길이 같지 않음을 알겠도다
우뚝이 서 나라 위해 몸 바쳐 충절의 혼백을 지녔으니
화란의 조짐을 막으려 임금께 직언하는 충성이라네
사적은 역사에 남고 꽃다운 이름 자부에 올릴 만하니
하늘이 무지개를 보내 상서로운 기운이 붉기도 하도다
널 앞에서 곡한 후 돌아와 단을 또 세우니
누가 다시 나라를 걱정하며 년풍(年豊)을 기원하리오

 

▲ 홍룡사의 홍룡폭포는 무지개가 뜨기도 한다.

이병길 시인, 울산민예총 감사. 역사문화 질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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