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에세이, 묵묵

김명숙 사회적기업 나비문고 대표 / 기사승인 : 2019-06-13 10:56:27
  • -
  • +
  • 인쇄
서평

침묵과 빈자리에서 만난 배움의 기록

 

복잡한 서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서울에서 살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배움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 ‘수유+너머’를 자세히 알았을 때입니다. 요즈음은 좀 달라지고 있지만 20년 전쯤 주변에는 공부하는 모임이 거의 없었습니다. 혼자 책을 틈틈이 읽으며 지내던 시절이었는데 한겨레신문을 통해 ‘수유+너머’를 알고 그 모임 성원들이 발행하는 책을 읽으며 그 공동체에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서울로 갈 수는 없었고 그 공동체에서 나온 책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고미숙 씨가 쓴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고 감탄하며 그와 같은 공동체를 꿈꿨습니다. 울산여성문화공간을 설립할 때 이 책을 함께 읽고 그와 같은 자발적인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 스승을 만났습니다. ‘수유+너머’의 중심이었던 고미숙, 고병권, 이진경. 세 분 중 가장 인연이 깊은 선생님이 <묵묵>의 저자 고병권입니다. 니체를 읽다 포기한 나를 니체의 세계로 안내해준 분이고 맑스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할 때 맑스 책을 펴내기 시작한 선생님입니다.


<묵묵> 이 책은 저자가 2008년부터 10년간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철학수업을 진행하면서 경향신문, 노들바람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 2018년 12월에 펴낸 것입니다. 3년 전쯤 울산에서 진행된 니체 강의 시작 전에 저자는 목소리에 대해 말했습니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철학수업을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자꾸 목소리가 커져 목소리가 이상해졌다고, 듣기 불편해도 이해해달라고. 이때 깜짝 놀랐습니다. “(중증)장애인들에게 철학수업을 어찌 하나? 읽기, 듣기, 말하기가 어려운 분들인데...” 많이 어렵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


이 책 속에 그 수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첫 수업에서 포기를 생각할 정도로), 그 어려운 수업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하면서 저자가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달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저자는 야학의 지식인 교사의 입장에서 시작해 장애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힘을 키우며 깊어졌습니다.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희망 없는 인문학’이라는 장에 많이 끌렸습니다. 그 중 “말의 한계, 특히 ‘옳은 말’의 한계에 대하여”라는 글이 참으로 감동이었습니다. 그 장을 읽으며 니체가 말한 “오류도 소중하다”는 인식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읽은 정혜신이 책 <당신이 옳다>에서 말한 옳은 말의 폭력성도 떠올랐습니다. 저자는 “옳은 말은 옳지 않은 말들, 실없는 말들, 우스꽝스러운 말들과 우정 어린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희망,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수유+너머’의 참담한 해체를 경험합니다. 그 후 절망 속을 방황하며 함께한 장애인공동체 생활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지난 몇 년의 경험으로 깨달은 것은 희망 때문에 하는 일이 절망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먼 데를 보다가 정작 가까운 곳이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이 그런 것과 같다.”


이 책에는 지금까지 저자가 쓴 그 어떤 책에서도 만날 수 없는 사람 고병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니체의 주장을 빌어 자주 말했던 “앎과 삶의 일치”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는 철학자 고병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긴 고난을 경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아름다운 글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말이 아닌 앎과 삶이 일치하는 진심이 담긴, 그래서 반짝이는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천히 걷다 보면 길이 조금 보이고, 보이는 만큼 걸어가 보면 또 그만큼이 열린다.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김명숙 사회적기업 나비문고 대표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명숙 사회적기업 나비문고 대표

오늘의 울산 이슈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