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속에서 더 작은 그늘을 들여다보면

김루 시인 / 기사승인 : 2020-07-15 10: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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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세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신비를 지니고 있다. 그 신비가 때로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위협하기도 하고 은택을 베풀기도 한다. 마치 얼굴 없는 신처럼 사람을 사로잡고, 인격을 빼앗기도 하는 향유가 가끔은 위협의 존재가 된다면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내일에 대한 불안이 고개를 내밀 때 향유했던 시간은 날카로운 검이 돼 자신을 찌르기도 한다. 비를 통해 나는 은밀해진다. 처마의 빗방울로 매달려 침묵하거나 흐르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어떤 말로도 어떤 따뜻한 차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날이다. 평소 존경해 왔던 한 사람이 한 줌 재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었기에 안타까움은 배가 된다. 실망과 배신감도 배가 된다는 사실을 그는 먼저 직감했을까.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무책임하다고 소리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죄가 있으면 죄를 받고 사죄할 일이 있으면 사죄해야 마땅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용기를 낼 수 없어 스스로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을 내린 것이 아닐까. 늦은 시간 내가 TV를 보며 웃고 있을 때 아이들과 통화하며 이런저런 안부로 속상해할 때 어둠 속에서 그는 선택해서는 안 될 길을 선택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이 사회가 무섭다. 정의란 무엇인가. 한때 열광했던 문장이 비에 젖는다. 허무한 마음이 달래지지 않는다. 향유 속에 누리는 자유는 한계가 있다는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이 뼈저리게 와 닿는다. 사람을 눈 멀게 하고 귀 멀게 하는 권력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오래전 내 의사와 상관없이 상사로부터 받고 싶지 않은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이상한 사진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좋은 글귀를 보내거나 가벼운 안부를 묻곤 했다. 내가 답을 하고 안 하고는 상관없었다. 자기감정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이상한 사진이 날아온 것이다. 사진을 볼수록 화가 났다. 평소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런 사진을 보내는 것인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는 분명 성희롱이었다. 이게 성희롱이 아니라면 뭐가 성희롱이란 말인가. 화가 나 옆에 있는 선배에게 의논했다. 그런데 선배는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도 왔어? 나한테도 왔어.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의사 표시야. 네가 이해해.” 선배의 말에 난 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게 이해해야 할 문제인가. 그 이후로 나와 선배는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고 나는 모든 모임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어떤 게 옳고 그른 것인지 혼란스럽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가 이해고 어디까지가 정의란 말인가. 왜 우린 늘 약자에게 강하고 강한 사람 앞에서는 약해야 하는가. 앞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린 계속 이해만 해야 하는가. 그가 훌륭한 업적을 세웠으므로? 아니다.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스스로 선택한 형벌을 우린 욕되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조용히 그를 보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가 원한 것은 결코 시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우린 자주 잃어버린다. 부끄러움이 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 믿었던 사람들이 이젠 부끄러움을 잊은 사람들이 되었다. 검은 우산을 받치고 즐비하게 운구행렬을 따르는 사람들. 호주머니에 숨겨둔 부끄러움을 뒤져 손에 쥐어 주고 싶다. 우리가 왜 촛불을 그때 들었어야 했는지. 


김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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