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움직이면 세계가 움직일 것이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6-14 11: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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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만주족 황제에게서 절을 받은 주원장

난징에 있는 명나라 황제의 유일한 능은 자금산에 있는 주원장이 묻힌 효릉이다. 1381년 건축이 시작돼 1393년에 완공됐다. 1398년 주원장은 71세의 나이로 죽어 이곳에 마황후와 함께 합장됐다. 효릉 입구에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자 훗날 명나라 제3대 황제로 등극한 영락제가 세운 거대한 ‘대명효릉신공성덕비’가 서 있고 이 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성곽이 나온다. 이 비문은 영락제가 직접 쓴 글을 새겨 넣은 것으로 주원장의 일생이 담겨있다.

 

▲ 주원장이 마황후와 함께 묻힌 난징 효릉 입구에 서 있는 거대한 ‘대명효릉신공성덕비’


능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구불구불한 신도가 이어져 있다. 사자, 낙타, 코끼리, 말과 상상의 동물 석상들이 각각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신도를 지키고 있다. 명 효릉의 신도는 특이하게도 곧게 뻗은 길이 아니고 구불구불 휘어져 있어 꼭 북두칠성을 형상화해 놓은 느낌이다.


신도가 끝나고 첫 번째 정원 비전에는 ‘치륭당송’이라는 청나라 강희제가 세운 비석이 있다. ‘치륭당송’이란 ‘명 태조 주원장이 세운 업적이 당 태종 이세민과 송 태조 조광윤보다 더 뛰어나다’는 의미로 주원장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강희제는 <홍루몽>의 작가 조설근의 조부인 조연에게 명해 치륭당송을 쓰도록 했다고 한다. 이 비석 양옆에는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의 글귀가 새겨 있다.

 

▲ 효릉 비전에는 청나라 강희제가 명 태조 주원장의 업적이 당 태종 이세민과 송 태조 조광윤보다 더 뛰어나다는 의미의 ‘치륭당송’이라는 글귀를 새긴 비석이 있다.


어떻게 만주 여진족 출신의 황제가 자신들의 직계 조상도 아닌 정통 한족의 황제를 칭송하는 비문을 새기게 되었을까. 강희제가 주원장을 이토록 떠받든 이유는 무엇일까. 소수의 만주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족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청 왕조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나서 가장 먼저 실시한 이벤트는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에 쳐들어오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명나라를 배반한 이자성을 무찌름으로써 마치 청나라가 명나라를 계승한 것처럼 명분을 만들었다.


이처럼 강희제는 주원장을 배척하기보다 끌어안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계산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강희제는 강남지역을 여섯 차례에 걸쳐 순행했는데 그중 다섯 번이나 효릉을 참배했다고 한다. 게다가 올 때마다 신하의 예를 갖춰 ‘삼궤구고두’, 세 번 무릎을 꿇어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어 모두 아홉 차례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 마황후의 위패가 모셔진 향전에 있는 주원장의 초상화.


주원장에 대한 참배의 정치는 한족 출신들의 경우 더욱 극진했다. 만주족을 악마로 규정하고 보이는 족족 살상했던 태평천국의 홍수전도 난징을 점령하고 나서 맨 처음 한 일은 효릉을 찾아와 주원장을 참배한 것이었다. 그는 주원장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되찾겠다”는 굳은 맹세를 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쑨원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격으로 이곳에 와서 주원장의 영령 앞에 청나라가 무너졌음을 고했다.


비전을 지나 두 번째 문으로 들어서자 주원장과 그의 부인 마황후의 위패가 모셔진 향전이 나온다. 향전에는 주원장의 초상화를 모셔 놓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근엄하고 온화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매부리코에 주걱턱, 위로 치켜뜬 부리부리한 눈매는 매섭고 괴이한 모습이다. 게다가 얼굴에 난 크고 작은 반점들은 아마도 천연두 자국이었을 것이다. 추남으로 알려진 주원장의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린 초상화임을 알 수 있다.


명 효릉 가장 끝에 있는 명루는 거대한 성채 같다. 명루 안 영혼탑 뒤에는 직경 350m의 거대한 담장이 둘러쳐 있고 그 안이 주원장의 묘실이다. ‘차산명태조묘’, 능이라는 호칭이 무색할 정도로 거대한 산을 옮겨 놓았다. 아직 한 번도 도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1368년, 주원장은 이곳 난징에서 제위에 올라 명나라의 건국을 선포한다.


주원장은 안휘성 봉양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목동 생활로 생계를 유지했다. 17세 되던 해에 기근으로 부모를 잃게 되자 그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됐다. 그러나 황각사에도 식량이 떨어지자 그는 탁발승이 되어 3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가 백련교가 반란을 일으켜 이에 호응한 곽자흥이 호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주원장은 이때 곽자흥의 군대에 참가한다. 1352년의 일로 주원장의 나이 25세였다. 처음 주원장이 곽자흥의 수하가 되었을 때의 일화다. 첩자로 오인돼 포박된 일이 있었는데 그의 외모가 너무 험악하게 생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곽자흥은 포박당한 주원장의 관상을 보고 범상치 않은 상이라고 생각했고, 포박을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10명의 병사를 거느리는 책임자로 등용한다. 주원장은 곽자흥 밑에서 차츰 두각을 나타내며 눈부신 전공을 세워 중용된다.


주원장의 본래 이름은 주중팔이었다. 곽자홍의 휘하로 들어갈 때 주원장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주’는 주살의 주를 의미하고 ‘원’은 원나라를 의미하며, 장은 인재를 의미한다. 주원장은 그의 이름처럼 원나라를 멸망시킬 보기 드문 인재였다.


주원장은 강남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우는데 곽자흥이 병사하자 그의 뒤를 잇게 된다. 당시 원나라에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한족 반란군 무리 중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한왕을 지칭한 ‘진우량’과 오왕 ‘장사성’ 정도였다.


‘장사성’은 태주 출신으로 대운하에서 소금을 밀매해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강북의 요충지 고우를 함락하고 1353년 나라를 세웠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장사성의 반란을 홍건군의 반란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장사성이 점령한 지역이 대운하의 동맥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소금의 전매는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소금의 50%를 장사성이 점유한 지역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게다가 화북 지방의 식량도 대운하를 통해 강남으로부터 수송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1356년 장사성은 소주를 점령하고 이곳을 수도로 삼게 된다. 1358년 장사상은 항주를 공략해 마침내 항주마저 그의 손에 넣는다. 장사성의 소주 점령과 주원장의 난징 점령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다.


한왕 ‘진우량’은 현의 하급 관리였다가 1360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한나라를 세운다. 그의 세력권은 주원장의 세력권과 접하고 있어 두 세력은 대립하게 된다. 진우량은 소주의 장사성과 동맹을 맺고 주원장을 협공한다. 훗날 명나라 건국 공신이 되는 참모 유기가 주원장에게 계책을 진언했다. “동쪽의 장사성에게 구애받지 말고 오로지 서쪽만을 공격하십시요.” 향락에 빠진 장사성이 진우량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것이 유기의 판단이었다.


1361년, 주원장은 친히 병선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진우량과 싸워 마침내 강주에서 이들을 격파한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가장 큰 해전으로 기록되는 ‘파양호 전투’다. 이 전투에 동원된 진우량의 병력은 60만 명이었고 수십 리에 뻗친 전선과 깃발, 창검은 산을 뒤덮을 정도였다.


1364년 마침내 주원장은 오왕으로 등극한다. 장사성이 오왕을 칭한 것은 4개월 전이었다. 두 세력은 공존할 수 없었다. 마침내 1365년 주원장은 장사성 공격 명령을 내리고 20만 병력을 출동시킨다. 소주는 포위된 후 10개월을 버텼으나 1367년 9월에 마침내 함락된다.


소주를 함락한 직후 주원장은 북벌군을 편성한다. 1368년 주원장은 난징에서 황제의 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명, 연호를 홍무로 정했다. 명나라 북벌군이 북상하자 ‘혜성이 나타나고, 큰 지진이 일어났으며,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는’ 등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해졌다. 마침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가 죽자 황태자는 겨우 수십기의 기병만을 이끌고 북방 몽골 초원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원왕조의 몽골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몽골의 초원으로 되돌아갔을 뿐이었다. 중국 왕조로서 원나라는 1368년에 완전히 멸망했고 명나라가 뒤를 잇게 됐다. 북방으로 도망친 원나라의 황태자는 막북 지방에 북원을 세우고 북원은 그 후 200년 동안 존속된다.

천하는 천하 사람들의 천하다

1890년대부터 중국에서는 구식 농민 봉기인 태평천국 운동과도 다르고 캉유웨이의 유신변법과도 구별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 운동의 목표는 세상을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성격은 ‘혁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일본은 중국 초기 혁명운동의 근거지였고 이 혁명운동의 중심에 선 사람들은 해외 유학파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이 유학파 젊은이들 중에서도 훗날 중화민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광동성 출신의 쑨원이 있었다. 쑨원은 ‘죽음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았던 혁명가’로 살았다. 중국인이 쑨원의 묘역 중산릉을 찾는 것은 마치 아랍인들이 메카를 방문하는 것 같은 순례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쑨원은 중국의 두 정치세력, 공산당과 대만의 국민당 모두에게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 쑨원이 묻힌 중산릉 입구에서


쑨원은 1866년 홍수전과 같은 고향인 광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59세의 나이로 뻬이징에서 숨을 거뒀다. 쑨원은 난징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지위를 사임하고 이듬해 이곳에 들른 쑨원은 사방을 둘러본 뒤 훗날 자신이 죽으면 이곳에 안장해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난징은 임시정부가 수립됐던 곳이고 자신이 임시총통을 지낸 곳이다. 그래서 난징에 묻히면 혁명의 정신이 이어질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중산릉은 쑨원 서거 1주기가 되는 1926년 착공돼 1929년에 완공됐다. 그의 바람대로 1929년 6월 1일 쑨원은 이곳 난징에 묻힌다.


1920년 4월 7일 광주에서 열린 비상회의에서 쑨원은 비상 대총통으로 선출됐다. 이어 1921년 10월 북벌 계획이 국회를 통과하자 이를 총괄 지휘할 대본영을 계림에 설치하고 북벌군이 강서 방면으로 진출한다. 이 틈을 이용해 광서 군벌 진형명이 쑨원을 배신하고 총통부를 공격하자 쑨원은 평상복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겨우 빠져나온다. 그 후 쑨원은 군함 영풍함에서 무려 55일 동안 버티며 진형명 군벌에 맞선 항전을 진두지휘한다. 비록 이 싸움에서는 졌지만 그의 혁명 정신은 중국 국민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쑨원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총 10회에 걸쳐 봉기를 일으켰으나 이 중 아홉 번 실패했고 단 한 번 성공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서구 경제 시스템을 접해봤던 쑨원은 그가 창립하고 발전시킨 혁명단체들을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했다.


쑨원에게 있어서 혁명에 뜻을 둔 그날부터 혁명자금을 조달하는 일은 줄곧 그를 괴롭혔다. 혁명단체 회원들은 입회할 때 1인당 은 5위안을 냈고 다시 별도의 기부금도 더 내야 했다. 한꺼번에 많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 채권인 ‘은회’를 발행했다. 은회의 한 주당 가격은 10위안이었는데 혁명이 성공한 다음 투자자들에게 100위안의 원리금을 되돌려 준다는 약속을 했다. “당신은 장래의 중국 정부와 거래를 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쑨원은 뛰어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을 협력자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거듭된 혁명 공작이 실패하고 그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게 되자 그는 길을 가다가도 채권자들에게 빚쟁이처럼 시달릴 때도 있었고 ‘손대포(허풍쟁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거듭된 혁명의 실패를 겪고 나서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혁명 정신에 투철한 직할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때 쑨원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일본과 러시아의 군사학교를 나온 군인이었다. 그는 군벌이 중국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쑨원에게 충성을 맹세한 몇 안 되는 군인이었다. 쑨원도 장제스를 신임했다.


1924년 6월 16일 꽝저우에서 황포 군관학교가 개교하자 장제스는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쑨원이 생전에 장제스를 믿었기에 장제스는 쑨원이 죽은 뒤 자신이 쑨원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자부했다. 장제스가 난징에 거대한 중산릉을 세운 것은 자신이 쑨원의 후계자임을 그의 정적들에게 알리기 위한 선언이었다.


쑨원의 묘역은 323m의 높이에 폭이 70m인 거대한 돌계단의 꼭대기에 안치돼 있다. 중산릉은 패방, 묘도, 능문, 비정, 제당, 묘실로 이어지는데 가는 길이 조금씩 높아진다. 중산릉의 전체 모양은 ‘종’처럼 생겼는데 이는 세상을 일깨우는 ‘경세종’을 의미한다.

 

▲ 능문을 지나면 비정이 나온다. 비정 안 9m 높이의 커다란 비석에는 ‘중국국민당이 총리 쑨선생을 이곳에 안장하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중산릉이 시작되는 패방에 새겨진 ‘박애’라는 금박으로 쓰인 글귀는 쑨원의 일생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초입에는 흰색 대리석 기둥과 푸른 기와가 얹힌 아치가 있다. 흰색과 푸른색의 대비는 푸른 바탕에 흰 태양이 있는 국민당의 국기를 상징한다. 400m 묘도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능문 위쪽에 적힌 글자 ‘천하위공’은 “천하는 모든 이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능문을 지나 비정이 나오고 비정 안의 9m 높이의 커다란 비석에는 ‘중국국민당이 총리 쑨선생을 이곳에 안장하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비정을 지나 제당까지는 돌계단이다. 돌계단 수는 339개로 국민당 의원 수를 나타낸 것이고, 패방부터 제당까지 총 392개의 돌계단은 당시 중국 인구 3억9200만 명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당이 나온다. 제당 입구 문 위에는 쑨원이 주창한 ‘삼민주의’를 상징하는 ‘민족·민권·민생’이 적혀 있다. 제당에는 대략 5m 높이의 백옥으로 만든 쑨원이 앉아 있는 좌상이 있고, 제당 뒤편 묘실에는 쑨원이 누워있다. 묘실은 원형이다. 이 와상 아래 쑨원의 관이 안치돼 있다. 특이한 점은 제당에 있는 앉아 있는 쑨원의 복장이 마고자 차림인 데 반해 묘실에 있는 누워있는 쑨원의 복장은 중산복이라는 점이다. 이는 국민당 좌파와 우파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한다. 좌파는 중산복을 주장했고 우파는 전통 복장을 주장하다가 결국에는 합의를 보지 못해 쑨원의 옷차림이 제각각이 되었다.


중산복은 쑨원이 최초로 고안한 복장이었다. 그는 1912년 1월 1일, 임시총통 취임식 날 중산복을 입고 나왔다. 그 후 중산복은 동아시아권에 대유행을 일으켰고 대학생들의 교복이자 혁명가들의 복장이 되었다. 중국의 역대 정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북한의 고위 관료들이 이 복장을 입은 모습을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다. 묘실의 벽면에는 ‘민족국가 건설 원칙 개요’의 전문이 새겨 있다.

 

▲ 중산릉 돌계단을 오르면 제당이 나온다. 제당 입구 문 위에는 쑨원이 주창한 ‘삼민주의’를 상징하는 ‘민족·민권·민생’이 적혀 있다. 제당에는 대략 5m 높이의 백옥으로 만든 쑨원 좌상이 있다.


주원장과 쑨원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고 외세의 부당한 지배를 벗어나고자 노력했으며 한족 중흥을 외쳤다. 주원장은 일찌감치 혁명에 성공해 한족 중심의 왕조를 수립했지만, 쑨원의 승리는 불완전했고 부분적 승리에 그치고 말았다. 이 둘의 정치노선은 확연히 달랐다. 주원장은 봉건 왕조체제를 지향해 전제군주로서 군림했지만 쑨원의 이상은 민주공화정이었다.


분명한 것은 주원장이 이룩한 업적은 시대의 한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쑨원이 품었던 숭고한 이상은 시대를 뛰어넘었다. 쑨원 사상의 오른쪽은 장제스로 계승돼 오늘날 대만 정부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왼쪽 날개는 중국 공산당에게로 이어져 오늘날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다.


쑨원 정신의 핵심은 그가 세운 유명한 ‘삼민주의’와 ‘연소용공’', ‘국공합작’으로 볼 수 있다. 소련과 결합하고 공산당과 합작하며, 노동자·농민을 원조해 제국주의 세력 및 군벌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이는 당시 소련이 표방하는 사상이 중국 국민혁명의 이상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내부적으로는 군벌을 일소해 갈기갈기 찢긴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쑨원이 공산주의를 지지하거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불가능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어찌 됐든 쑨원의 유해가 안치된 그의 묘역은 현재 중국 공산당과 대만정부 모두로부터 성역이 되어 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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