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보내는 가을의 길목에서···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19-08-28 11: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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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더위가 막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던 7월 중순 저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시간강사법’ 시행을 둘러싼 혼란스러움이 정리되고, 여름학기 강의도 끝난 때였습니다. 9월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보내길 바랐지요. 온전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뒹굴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고, 이제 그 시간이 끝나가는군요. 


이번 여름은 게으를 수 있는 자유를 즐기는 시간이었습니다. 몇 번의 회의에 참석하고, 나쁜 자세에서 오는 허리통증을 치료하기도 했으며, 오빠의 마지막 휴가(하나밖에 없는 형제인 오빠는 퇴직을 앞두고 있답니다) 일정에 맞춰 엄마와 오빠 가족과 맛난 거 먹으며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요. 그리고 남편과 딸이랑 공주와 부여, 익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백제의 도읍이 있었던 공주와 부여, 그리고 백제 무왕이 왕궁을 옮기려 했던 곳으로 알려진 익산 지역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여행 첫날, 길눈이 밝음을 자랑해 오던 남편이 순간의 방심으로 고속도로를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해, 살짝 짜증이 났지만, 온 힘(?)을 다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 송산리고분군 주변을 걸었습니다. 옛 무덤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했습니다. 무덤 내부를 재현한 전시관에서 1500여 년 전의 시간을 만날 수 있었지요. 주말이라 관람 시간을 1시간 연장한 탓에 포기할 뻔했던 공주박물관을 둘러볼 수도 있었지요. 공주박물관은 옛 건물을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 넘겨주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더군요. 그러고 보니 공주 방문이 얼마 만인지도 가물가물합니다. 20년이 넘었나!


공주 시내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동네 국밥집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부모님이 여관을 하던 건물을 일부 보수해 국밥집을 차렸답니다. 그곳에서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보석을 찾은 기분이랄까요?


다음 날 옛 공주박물관 앞에 있는 중동성당을 둘러보고 난 뒤, 백제의 웅진성이 있었던 공산성 성벽을 따라 걸으며 성안 주요 시설들을 답사했지요. 오후엔 비 내리는 마곡사를 둘러보았습니다. 셋째 날, 더운 날씨 탓에 방문객이 하나도 없는 사비시대 백제 왕릉인 능산리고분군을 둘러보고, 백제석탑으로 유명한 정림사지를 거쳐, 무왕이 조성한 왕실 연못인 궁남지를 산책하고 부여박물관으로 향했지요. 시원한 실내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답니다. 부소산성 아래 있던 부여박물관 역시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더군요. 부여박물관의 가장 큰 자랑은 역시 능산리고분 옆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용봉대향로입니다. 전시관 안쪽, 대향로만을 위한 별도의 전시공간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옅은 조명 속에 드러난 향로, 물을 관장하는 용은 연꽃으로 장식된 향로 몸통을 입에 물었네요. 연꽃잎 속에 새겨진 기이한 동물들, 신선의 세상을 구현한 산과 골짜기, 그 속에 깃든 신선, 새, 각양각색의 동물들이 새겨진 뚜껑, 뚜껑 위에 앉은 봉황. 


함께 대향로를 감상하던 관람객은 향로의 진위를 의심하더군요. 당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진품이 있을 거라며 휙 둘러보고 나가는군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요? 그와 내가 받은 감동의 양은 같을 수가 없을 겁니다. 몇 개의 전시관을 모두 보고 박물관을 나오기 전 다시 한번 대향로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대향로에 담긴 백제인들의 관념과 마음을 읽고 싶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여행 마지막 날엔, 오랜 시간의 복원 기간을 보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절터를 방문했습니다. 익산은 문화유산을 대하는 현재의 태도를 생각하게 하는 지역입니다. 발굴과 복원사업이 꾸준히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신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결혼 진위 여부를 의심케 하는 자료 발굴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던 미륵사지 석탑은 10여 년의 시간을 거쳐 새롭게 단장됐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멘트로 덧대어졌던 부분은 돌로 보완한 모습입니다. 이후에도 원형을 위한 논의는 계속될 것이며 시간이 지난 뒤 미륵사지 석탑은 또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궁리라는 지명에 걸맞는 왕궁유적이 발견된 왕궁리 절터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석탑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 옆엔 발굴 성과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어 좋았습니다. 2019년의 현재와 10년도 더 넘은 과거의 기억이 뒤섞이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짧은 여름 여행이 끝이 났습니다. 어떤 것은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 어떤 것은 변형된 모습으로, 그리고 또 다른 어떤 것은 새로운 기억으로 남을 모습으로 있습니다. 기억 속에는 장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했던 이들과의 시간도 있습니다. 2019년 나의 여름은 내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요? 이 여름이 게으를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한 시간으로 기억되길 또 간절히(?) 바랍니다. 게으름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필수조건이니까요.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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