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약수(上善若水)

김상천 시인 / 기사승인 : 2020-07-23 1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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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만리
▲ 금강산 옥류담

 

언젠가 다도(茶道)의 경지를 묻는 사람에게 “물을 다룰 줄 아면 차를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인(茶人)이 물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차 공부의 끝이 물인 셈이다. 일찍이 노자(老子)는 도(道)의 세계를 물에서 찾았고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로 그의 도를 설명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선의 표본임을 말하는 것이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과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 모든 것을 받아주는 포용력,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 바위를 뚫는 인내와 폭포처럼 투신하는 용기 그리고 유유히 흘러서 바다를 이루는 대의를 보여준다. 가장 쉬운 물처럼 사는 것이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 절로 그러하지 못하고 인위적인 틀 속에 갇혀서 신음하는 것이 현대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체의 70%가 물이니 물만 잘 먹어도 건강하다는 말은 타당한 것이다. 


물이 이 시대에 주는 교훈은 ‘상생’(相生)이 아닌가 싶다. 다투지 않고 서로를 이롭게 하는 상생의 이치를 물은 보여주는데 ‘차와 물의 관계’다. 물은 차를 이롭게 하고 차는 물을 귀하게 하는 것이다. 초의선사(草衣禪師)는 차가 물의 정신이요(茶者水之神) 물은 차의 몸(水者茶之體)이며, 차호(茶壺)는 차와 물의 안택(壺者茶水之安宅)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중정(中正)을 잃지 않으면 스스로 건(健)과 영(靈)을 얻는다는 것이다. 초의는 다도(茶道)를 신체건영(身體健靈)을 함께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다인(茶人) 좋은 물을 얻어야 하고 그 물을 잘 다뤄야 한다.


많은 다인(茶人)들이 차(茶)만 소중히 여기고 차에만 관심을 기울이므로 차의 몸과 같은 물을 등한시하게 된다.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가면 스스로 진리를 나타내고 편안함을 드러내는데 물은 살아있는 만물의 근본이요 기초다. 그러므로 이를 잊거나 무시하는 순간 상생의 세계는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33종의 물을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진수(眞水)는 여덟 가지 덕을 지녔는데 가볍고(輕) 맑고(淸) 시원하고(冷) 부드럽고(軟) 아름답고(美) 냄새가 나지 않으며 비위에 맞고 먹어서 탈이 없는 것이라 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물을 설명하고 있지만 내가 차를 끓이는 데 최고로 치는 물은 깊은 산속에 돌 틈을 타고 흐르는 물이다. 오랜 경험의 산물이라 하겠다. 등산을 할 때면 반드시 그 산이 품고 있는 좋은 물을 떠 온다. 그리고 그 물과 차가 어우러지는 상생(相生)의 묘한 맞과 기운을 느끼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그리했으니 이제는 어느 산의 물인지 조금 구별이 간다. 다행이 북한을 몇 번 다녀 올 기회가 있어 대동강 물과 금강산 물 그리고 백두산 물로 끓인 차를 먹어 봤으니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초의선사(草衣禪師)도 물은 산상(山上)의 것이 제일이고 강물은 그 다음이며 우물물이 최하위라 하며 차는 깨끗해야 하고 물은 싱그러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산상수(山上水)가 어디에 있으며 그런 강물이 어디 있으랴. 초의(草衣)가 도반(道伴)들과 찻자리에서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않으며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은 반야(般若)의 세계를 물과 차를 들어 설명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손바닥 양면인 평등한 불이(不二)의 사상을 찻자리에서 보여줬을 거라 생각이 된다. 


찻자리에 앉으면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며 차와 물의 상생을 본다. 그러나 아무리 차와 물이 좋아도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니 결국은 사람이다. 차와 물을 대하는 사람의 생각과 자세가 바뀌지 않으면 초의(草衣)의 동다송(東茶頌)은 그냥 흘러간 노래일 뿐이다. 


김상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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