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방식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19-04-17 1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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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전시를 보고나서

지난 토요일, 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전시 ‘오늘 그들 여기에’를 보았습니다. 울산박물관 기획전시실Ⅱ에서 4월 2일부터 5월 12일까지 열리는 전시입니다.


여성독립운동가의 모습을 어떻게 알고 초상화를 그렸을까? 참 묘하게도 그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일제의 ‘감시대상카드’였습니다.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한 요주의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기록해 둔 것이지요. 앞모습 한 장, 옆모습 한 장의 독립운동가 사진은 오늘날의 예술가를 통해 초상화로 재현되었습니다. 수많은 감시카드 중 눈에 띄는 같은 인물의 여러 장의 카드가 있습니다. 울산의 여성독립운동가로 1930년대 학생만세운동과 적색노조를 중심으로 항일에 앞장선 이순금(1912~?)은 전국의 남녀를 통틀어 8번째로 많은 감시대상카드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여기 봐! 폭탄을 던진 사람도 있어!” 초상화 아래에는 간단한 설명이 한 줄씩 적혀있습니다. ‘안경신, 임신한 몸으로 의열단, 평양경찰서·도청 폭탄 투척. 1888~미정/ 독립장(1962)’ “응, 여기 광복군도 있고, 여기 독립군도 있는 걸.”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도 있어.” 전시를 함께 본 남편과의 대화는 우리가 갖고 있었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미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유관순으로 대표되는 여학생의 모습이 있습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다 잡혀서 감옥에 가게 되고,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는 모습으로 재현됩니다. 이런 재현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용기와 희생, 그리고 우리 소녀들을 짓밟은 일제의 잔혹함을 이야기합니다.


조력자로서의 모습으로 재현되기도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이나 아들을 뒷바라지하고 가난함 속에서도 집안을 지켜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또는 세련된 양장을 입고 일본인이 드나드는 고급 요리집이나 상점을 운영하면서 독립군의 연락책이나 자금운반책 역할을 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군복을 입고 독립군 부대의 일원으로 훈련을 하고 있거나, 총을 메고 전투에 나가는 모습, 일제의 주요 인사나 건물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모습,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여성은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기 전시된 초상화 아래의 짤막한 설명 속에서 독립군, 광복군, 의열단, 폭탄, 전투, 임시정부 등의 단어를 이리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지난 주 기억과 기록 모임의 지면을 통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이 소개되었지요. 이후 모임에서 한국판의 제목과 표지는 영문판과 다르다는 점에 대해 논의가 있었습니다. 영문판 책의 제목은 ‘The Unwomanly Face of War’, 표지에는 두꺼운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여성 군인 2명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이들은 당당한 눈빛과 야무진 입매를 하고 정면을 응시합니다. 참전 여성들의 구술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전통적 가족제도 안에서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했던 전쟁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들은 후방에서 군대를 지원하는 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최전선으로 자원해서 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간호병, 위생병, 통신병, 물품보급병, 세탁부대 뿐만 아니라 외과의, 고사포 병사, 전투기 조종사, 빨치산 병사, 저격병, 항공기 정비사, 지하공작원, 기계선반원으로서 전쟁터 모든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구술을 통해 승리의 역사로만 서술되었던 전쟁은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하고 비극적인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출판된 표지는 나체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여성의 뒷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팔로 몸을 감싸고 잔뜩 웅크려 앉아서 뼈가 도드라져 보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성폭력, 가족을 잃은 슬픔 등이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익숙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위의 전시와 책의 사례처럼 여성사, 여성구술사 연구 및 출판물 등의 증가를 통해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 여성의 모습들이 공론의 장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어떤가요? 여전히 기존의 전통적인 권력구조,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틀 안에서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여성’을 ‘여성스러운’이라는 수식어 안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요?


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전시실 맞은편에서는 또 다른 전시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울산의 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전시입니다. 울산의 자랑스러운 인물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박상진, 최현배, 김창숙, 손후익, 서덕출, 고복수, 성세빈. 하지만 바로 앞 전시실에서 초상화를 보았던 이순금, 이효정에 대한 설명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손후익 선생을 소개하는 코너 옆에 집안의 독립운동을 조력했던 손응교의 삶에 대한 설명만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인물들은 사진을 볼 수 있는 반면 손응교는 쪽진 머리의 여성 실루엣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앞을 지나는 지긋한 나이의 시민 두 분이 안타까운 듯 말합니다. “아휴,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네.” 손응교의 독립운동 활동은 그저 파란만장한 며느리의 삶으로서 해석되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서며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요즘의 관심은 지나가는 ‘유행’으로 그치지 않을까 걱정을 하자, 남편은 ‘이제 시작’하는 단계가 아니겠냐며 변명 같은 위로를 합니다.


저녁 시간, 뉴스에서 또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취재가 나옵니다. 여성독립운동가와 같은 이름을 가진 현대의 여성들을 인터뷰한 것입니다. “거 봐, 이제 시작하는 단계잖아. 뉴스에 또 나오는 거 보면.” 하지만, 여성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지금의 방식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그들의 얼굴을 보았고 이름을 알았습니다. 다음 단계는 그들을 ‘여성’으로서 조명하지 않고 ‘독립운동가’로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학생, 소녀, 어머니, 며느리, 누이 등의 수식어는 이제 그만. 그보다 그들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어떤 독립운동을 펼쳤는지 서술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남성 독립운동가를 설명한 방식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울산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전시에 여성과 남성 독립운동가 모두 함께 소개되었으면 합니다.


전시를 둘러보고 박물관에서 받아 온 ‘3.1운동 100주년기념 울산항일운동 인물록’의 90여 명의 인물 중 여성은 단 한 명입니다. 이런 자료를 보고 “여성독립운동가는 왜 없지?” 제목을 “남성인물록이라고 해야 하나?” “울산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서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는 예민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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