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자본가, 민족 독립에 불을 지피다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04-17 11: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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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19세기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온 시대는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특히 구한말 열강의 침입, 일제의 침탈과 망국에 조선의 자본가들은 저항의 행적을 하였다. 부산, 울산, 양산 삼산지역의 조선 자본가들은 민중계몽과 독립군자금 지원 등 독립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구명학교 설립자 장우석 통도사를 방문하다

통도사 이름바위 끝자락, 김홍도와 김홍조 바위를 지나면 비가 오면 뚜렷하게 글자가 드러나는 바위가 있다. 1920년 9월 7일에 학가당(學稼堂) 장우석(張禹錫, 1871~1924)이 36년 만에 다시 통도사에 와 부모와 같이 온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며 쓴 칠언절구 시다.

靈山依舊護僊居(영산의구호선거)
영축산은 옛날과 같이 신선 사는 곳 보호하고
赤葉黃花邀客車(적엽황화요객거)
붉은 단풍과 노란 국화는 나그네의 수레를 맞이하네.
三十六年重到日(삼십육년중도일)
삼십육년의 세월에 다시 이곳에 도착한 날
循環因果復何如(순환인과부하여)
돌고 도는 인과(因果)는 다시 어떠한가?


장우석은 구포 화명동 물상객주이다. 그는 구포 화명천 백포들판 둑을 보수하여 주민들을 홍수로부터 보호했다. 1930년 지주와 소작인들이 세운 공적비가 현재 부산 화명성당 맞은편 놀이터에 있다.


구포는 1904년까지는 양산군에, 1905년부터 동래부로, 그러다 1910년부터 부산에 속했다. 부산과 경상도 내륙의 물류 중심지였던 구포는 대일 수출용 곡류와 내륙 판매용 소금의 집결지로 성장했다. 경상도 돈은 다 구포에 모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장우석은 친구 아들인 윤상은(1887~1984)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45명이 참가해 모은 2450원(당시 쌀 한 가마니 4원)의 기금으로 1907년 사립구명학교(현 구포초교)를 설립했다. 초대교장은 장우석, 학감은 윤상은이었다. 윤상은의 형인 명은은 3대, 동생 영은은 5대 교장을 하였고, 백산 안희제(1885~1943)도 1910년 교장을 했다. 윤상은의 조카로 훗날 상해 임정 재무차장이 된 윤현진은 1회, 그리고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김철수는 3회 졸업생이었다. 이들은 양산 상북면 출신이었다.


윤상은의 아버지는 사천현감과 동래부사를 지닌 윤홍석이고, 장인은 부산 경무관이자 근대 철도의 개척자 그리고 개성학교(구 부산상고, 현 개성고)의 설립자인 박기종이다. 조카는 임정 초대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 사돈은 울산의 선각자 김홍조, 장남인 윤인구는 부산대학교 초대총장으로 구명학교 4회 졸업생이다.


1910년 전후로 다음에 살펴볼 조선의 자본가들은 실력 양성을 위한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의령의 안희제는 의신학교(1907), 창남학교(1908), 발해보통학교(1936)를 설립했고 양산의 윤현진은 의춘의숙(1907)을, 울산의 김홍조는 동면사립개운학교(1909)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을, 또 송태관은 병영사립일신학교 2대 교장을, 이종화는 병영사립보통학교를 설립(1916)하고 교장을 했다. 울산의 송태관과 김홍조, 김좌성 등은 1911년 공립울산보통학교 학무위원에 임명되고, 송태관은 부산학교 평의원(1920)에 선출됐다. 1912년 양산의 전석준, 윤현태, 배영복 등은 양산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이 되었고 엄주원(50원), 엄우영(30원), 윤현태(12원), 배영복(12원), 전석준(10원) 등은 1912년 6월 학교 비품비를 기부해 목배 1조를 받았다.

 

▲ 장우석과 통도사 이름바위, 화명동 기념비-물상객주인 그는 교육, 금융사업을 통해 지역 선각자로서 활동했다.


부산, 양산, 울산 삼산지역 조선 자본가, 은행을 설립하다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되고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메가타 다네타로(1853~1926)가 탁지부 고문으로 내한해 일제는 본격적으로 재정 및 경제적 합방에 착수했다. 일본은행으로부터 자금 빌리는 것이 어려워진 조선의 지주와 상인들은 은행 설립과 경영의 길을 모색했다. 당시 민족 경제는 일제의 침탈로 질식 상태에 빠질 지경이었다.


구명학교 발기인인 윤상은, 장우석, 전석준, 윤명은 등은 대부업과 예금을 취급하기 위해 1909년 1월 구포저축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부산 최초의 민족 금융기관으로 일본 자본의 침투로부터 조선 경제를 지키려 한 것이다. 자본금 2만5000엔, 총 주식수 500주, 총 주주수는 67명이었다. 구포 21명, 양산 8명, 김해 9명, 초량 5명 순이었다. 당시 최대 주주는 울산의 송태관과 양산의 윤현태로 30주였고, 부산 구포의 장우석이 28주였다. 삼산지역의 조선자본가들이 중심이었다.


윤상은의 조카인 윤현태(1889~1964)는 누구 못지않은 큰 집을 짓고 양산에서 구포까지 매일 마부를 보내 장을 봐서 식사할 정도로 거부였다. 양산에서 한학을 배우고, 동경에서 1년간 일어를 공부했다. 1914년경부터 양산에서 대금업을 하고, 1916년 12월 이래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 백산무역(주), 일금상회, 의춘상행(의춘신탁), 경남인쇄(주) 등에 관계했다. 1917년 매일신보 부산지국장을 하고 박영효, 김홍조, 윤상은 등과 함께 삼업(蔘業)회사를 설립하려 했고, 1920년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는 키 5척 3촌 정도, 둥근 얼굴에 하얀 피부. 눈이 크고 코가 낮고, 농후한 배일사상을 품고 조선독립운동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구포저축주식회사의 초대 취제역 사장은 윤상은, 감사는 장우석과 강신호, 지배인은 신영조였다. 1911년부터 회사는 장우석, 윤상은, 전석준이 중심이 되어 운영했다.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경봉스님의 선시 주련을 쓴 회산 박기돈이 구포저축주식회사의 주주였다. 그는 대구에서 목재소, 출판사 등 신 상공업을 벌이며 경제인으로 활동했고 국채보상운동, 대한협회 등 애국계몽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교육, 체육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50세 이후 사회 활동에서 떠나 서예에 몰두해, 경제인에서 서예가로 변신했다.


구포저축주식회사는 1912년 구포은행으로 전환했다. 자본금 50만 원의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은행이었다. 울산의 송태관과 김홍조, 양산의 전석준과 엄주원, 윤현태, 부산의 장우석과 윤상은, 이규직이 주요 주주로 참가한다. 이때 일본인 자본가 16명도 참여한다. 경제 구심점은 구포에서 점차 부산으로 중심이 바뀌고 일본인이 구포은행 경영에 참여했다. 1915년 경남은행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점을 부산 초량에 둔다. 1917년 윤상은은 낙동강 맥도를 개간한 자본으로 최대주주가 됐다. 경남은행 전무로 복귀해 실질적 경영을 했다.


1918년 최연구(사천), 전석준(양산), 손영돈(밀양), 김홍조(울산) 등 경남 지주들이 설립한 주일은행을 경남은행이 흡수한다. 당시 총독부 내무국장과 윤상은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것이 현실이다. 경남은행은 자본금 100만 원의 거대은행으로 발전했다. 경남은행의 주주들은 부산에 설립된 회사의 경영자들이었고, 회사 경영 운영자금을 공급받기 쉬웠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잘못 알려진 송태관은 4296주를 가진 최대주주인로 부산신탄(주), 송태정미소, 조선주조(주)를, 양산의 지주인 윤현태와 전석준은 경남인쇄(주)와 일금상회를, 울산의 선각자인 김홍조는 부산피혁공장, 조선요업(주), 부산해조(주), 삼산자동차회사를 경영했다.


그런데 삼산지역의 자본가들이 운영한 경남은행은 1919년 3.1운동 이후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경기침체와 더불어 조선인 상인이 몰락하고 있었다. 경남은행은 조선의 자본가들에게 특별한 편의를 제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했지만, 또 상해 임정의 독립자금 송금 창구 역할을 했다. 조선 자본가들도 겉과 속이 이중적이었다.


윤현태는 1919년 3월 중 안희제와 함께 동생인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윤현진에게 수 만엔을 주어 조선독립운동비로 상해 임시정부에 제공하게 한 혐의가 있었다. 일본 경찰의 내사가 진행되고 조카 윤현진이 상해 임정 재무차장이 된 사실이 알려져 윤상은은 은행의 모든 직을 사임하고 1920년 일본으로 장녀와 함께 유학길에 오른다. 그 후 은행은 윤상은, 송태관이 은행장을 하다가 결국 1928년 대구은행과 통합해 경상합동은행이 된다. 조선의 민족은행이 사라진 것은 조선 자본가의 성장기반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실제로 조선인 기업은 거의 없어진다.

 

▲ 삼해 임정 재무차장 윤현진의 사망을 일제는 임시정부의 폐망이라고 논평하며 대서특필했다. 당시 무덤은 형 윤현태가 상해 정안사에 세웠다.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조선의 자본가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의 자본가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양산의 윤현진과 울산의 김홍조는 상해 임정의 의정원에 참석한다. 윤상은과 안희제는 경주 교촌의 최준 집에서 한 달간 머물며 독립운동 세부 계획을 수립한다. 그 결과 백산상회(1914)를 발전시켜 발기인 최준, 안희제, 윤현태가 중심이 돼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 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만든다. 당시 영남 대지주 자본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부산에서 제일 큰 회사였다. 우리나라 특산물, 명주, 면포, 강포(마직물), 인삼 등을 해외에 수출하는 회사였다. 사장은 최준(경주), 취체역은 윤현태(양산), 안희제(부산, 의령), 지배인은 최준, 감사역은 전석준(양산)이었다. 1919년 6월 주주명단을 보면 최준과 안희제, 윤현태가 2000주이고, 그다음으로 울산군 하상면의 이종화가 1500주이다.


최준(1884~1970)은 일찍이 의병장 허위의 제자인 울산의 박상진(1884~1921)의 대한광복회 재무부장과 조선국권회복단 경주 대표 역을 맡아 독립군 자금줄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사촌 처남 매부 사이였고, 안희제와 박상진은 양정의숙 동창이다.


백산무역(주)의 국내 및 국외 지점 및 연락사무소는 영업활동지역의 확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과 독립운동 자금 전달을 담당했고 그 중심에 백산 안희제(1885~1943)가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실 때도 항상 일본 기생을 곁에 앉혔고 일본 옷을 입고 다니는 등 자신의 신분을 감추며 임정 첩보 36호의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백산회사는 점차 자본이 잠식됐다. ‘물품 대금을 떼였다’, ‘수출품이 비적에게 약탈당했다’, ‘거래에서 손해를 봤다’는 등의 구실을 붙여 독립군자금을 위장해 지원했기 때문이다. 상해 임정 재무차장인 윤현진은 미국 선교사를 통해 고향의 사재와 백산상회 자금 30만 원을 가져가 초창기 임정의 재정 문제를 해결했다. 결국 백산무역(주)은 1926년 부도가 났고, 개인보증을 선 최준은 조선식산은행에 압류를 당했는데 당시 금액으로 30만 원이었다. 임정 운영 자금 60%를 모금한 안희제의 활동은 실상 백산무역(주)과 최준 때문에 가능했다. 초기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자금줄 역할을 담당한 백산무역(주)의 설립이 올해 100주년이 된다.  

 

▲ 최준, 안희제, 윤상은은 삼산지역의 자본가들을 엮어 독립운동에 기여하도록 했다. 자본의 이익은 민족독립운동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들은 잘 드러나지 않은 독립군이었다. 사진4: 울산의 조선 자본가 김홍조와 송태관, 김홍조는 선각자로 친일우익 성향의 단체에도 가입했지만 경남신문 창간, 임시정부 의정원, 태평양회의 청원서 서명,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 군자금 지원 등 항일운동의 흔적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이란 오해를 받는 송태관은 사업과 금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육영사업에 기여했고 백산 안희제와 인연을 맺고 있다. 아들 송석하는 그의 부를 통해 조선 민속을 연구했다.


삼일운동 이후 민중계몽에 앞장선 삼산의 자본가들

3.1운동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교육보급, 인재양성, 민중계몽이 급선무임을 조선의 자본가들은 깨닫는다. 1919년 11월에 청년세대에게 민족독립과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독립운동 인재양성을 위해 조선의 자본가들은 ‘기미육영회’를 만든다. 부르주아 문화운동 조직으로 삼산지역 자본가들의 실력양성운동이었다. 회원 회비는 매년 100원으로 매년 10명씩 해외 유학생을 선발했다. 간사는 안희제, 윤현태, 평의원은 전석준, 윤상은, 송태관 등이었다. 대부분 백산상회와 경남은행 관계자가 많았다. 하지만 1920년의 경제공황으로 1921년 이후 육영사업은 어려워졌다. 선발된 유학생은 김동리의 형인 불교철학자 김범부(김정설), 초대 사회부장관을 한 전진한, 의열단으로 활동했고 경남도지사를 역임한 문시환, 대종교인으로 초대 문교부장관을 한 안호상,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복역한 이극로,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한 신성모 등이 있다.


민족 자본가들은 1919년 12월 ‘예월회’를 조직했다. 회원으로 양산의 김철수(부산상사, 고려상회 지배인), 전석준(무역상, 일금상회), 윤현태(백산무역주식회사 중역, 일금상회 주임), 울산의 송태관(경남은행장, 삼산자동차 중역), 부산의 김병규(동래은행 지배인), 김종범(조선주조 중역), 문영빈(백산회사 감사, 동성상회 중역), 장우석(구포은행) 그리고 경주의 최준과 최순 등이 있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에 따라 교육제도의 개편이 논의됐다. 예월회는 조선 교육에 관한 건의서를 1921년 5월 제출했는데 발기인은 송태관, 안희제, 전석준, 송진우, 현상윤 등이었다. 또 산업개선 청원 운동을 전개했다. 1921년 6월 ‘일선동화 및 차별교육 정책 철폐, 식량?원료?노동력 공급기지화, 상품 판매 시장화’ 등 식민정책 폐기를 요구했다.


1921년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고, 현 개성고)를 서면으로 옮길 때, 울산의 송태관은 2만4450원, 김홍조는 1500원, 김홍조 사돈인 양산의 김교환은 300원, 부산의 정재원과 이규화, 오인규 등은 100원을 각각 기부했다.

 

▲ 울산의 조선 자본가 김홍조와 송태관, 김홍조는 선각자로 친일우익 성향의 단체에도 가입했지만 경남신문 창간, 임시정부 의정원, 태평양회의 청원서 서명,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 군자금 지원 등 항일운동의 흔적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이란 오해를 받는 송태관은 사업과 금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육영사업에 기여했고 백산 안희제와 인연을 맺고 있다. 아들 송석하는 그의 부를 통해 조선 민속을 연구했다.


조선 자본가에 일방적인 친일의 멍에를 씌워서는 안 된다

1920년 초반 윤현진(1921), 김홍조(1922), 장우석(1924)의 사망과 윤병준(동래), 송태관(울산), 최준(경주), 안희제(의령), 김좌성(울산), 전석준(양산) 등이 회사 몰락과 동시에 주주로서의 활동을 멈춘다. 이로써 민족 자본가들과 독립운동 자금의 창구로서 경남은행의 역할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1920년 후반부터 점차 조선인 기업은 사라지고 일본인 기업이 조선을 지배했다. 삼산지역의 조선 자본가들은 더 이상 경제활동이 어려워지게 된다. 안희제는 만주로, 송태관은 충남 서산으로, 윤상은 형제들은 활동을 잠시 멈춘다.


삼산지역의 조선 자본가들은 1910년 전후로 일본 자본과 맞서기 위해 조선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금융업을 키워 조선 자본가의 사업 자금을 조달함과 아울러 독립군자금 창구 역할을 했다.


3.1운동 이후 민족 자본가들은 다양한 문화운동을 통해 실력양성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민족자본 형성을 위한 민족산업 육성운동, 근대 교육을 위한 학교설립운동, 교육?산업개선 청원 운동, 나아가 청년운동을 통한 대중계몽단체 조직 운동 등으로 확산되어갔다. 조선의 자본가들은 자본가답게 일제 정부와 친밀하게 기업을 운영하기도 하고, 반일 독립군자금 모금 지원 활동도 병행했다.


일제강점기에 기업과 육영활동으로 친일은 했을지라도, 반민족적 행위를 하지 않은 조선의 자본가들도 있었다. 조선의 자본가들이 모두 반민족적 친일행위를 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병길 울산민예총 감사. 보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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