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는 자의 발을 밝히는 석등(1)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08-28 11: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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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여름의 끝자락, 통도사 무풍한송길을 걷는다. 이 길은 늘 걸어도 지겹지 않다. 늘 푸른 소나무와 청류동천의 물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늘 걷는 사람은 이 길을 퇴근길, 해우길, 고행길, 순례길, 산책길, 운동길, 우정길, 등산길, 추억길, 사색길 등으로 여긴다. 몇 년 전에 길을 정비하면서 황토를 깔아 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다. 길 옆에는 법구경 등의 글귀를 세워 오가며 읽는 재미를 보탰다. 하천은 정비해 깔끔하지만, 옛 물길과 돌이 없어져 아쉽다.


무풍한송길에는 석등이 세워져 있다. 이 석등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이 당시 기생들의 이름이며 이 돈을 모아 구하스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는 석등을 관찰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지 않은 결과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도 질문을 통해 재확인해 답을 찾는 과정이 역사문화에는 필요하다. 특히 명망가들이 써준 답을 모범답안으로 알고 작성하면 오답이 돼 엉터리 역사가 돌아온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 서해담 스님이 시주한 석등


통도사 무풍한송길의 석등은 현재 일제강점기 13개와 2013년에 세운 석등 13개, 모두 26개가 세워져 있다. 오늘 살펴볼 석등은 일제강점기의 석등들이다. ‘영축산 통도사 사적비’에 따르면, 경봉스님이 석등을 ‘사문(寺門)에서 동구(洞口)까지 시설(施設)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경봉스님이 통도사 주지로 있었던 1935년 9월부터 1938년 9월 사이에 세워진 것이다. 그때는 구하스님이 1925년 이후 주지직에서 물러나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은 시기다.

석등은 통도사로 가는 이정표다

석등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졌다. 어두운 산길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다. 길 잃은 나그네에게 빛이란 바로 생명의 빛이다. 생명의 빛은 곧 진리의 빛이기도 하다. 칠흑 같은 삶 속에, 고통에 처해있는 중생을 바른 삶의 길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석등을 따라가면 부처님의 집이 있으며 그 집에서는 진리의 가르침이 중생을 기다리고 있다. 석등은 바로 중생을 인도하는 이정표다. 통도사의 석등은 어른 키보다 훨씬 큰 3.8m 높이 정도다. 과거에는 호롱불을 켰겠지만, 최근에 전기시설을 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이 석등은 야간 통행자를 위해 불을 밝히는 역할과 함께 통도사까지의 거리를 표시하는 기능을 겸했다. 불이 꺼진 석등은 디오게네스의 등불이다. 단순한 돌기둥 장식물이 아니다. 어둑어둑해지면 무풍한송 솔숲길에 석등의 불빛이 산책하는 사람 혹은 부처님에게로 가는 사람, 아니면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을 인도해준다. 한때 화재 등의 위험 때문에 불 밝히지 못했지만, 이제 전등을 켜두고 있다. 소경이 든 등불이 되고 있다.


석등은 밑에서부터 하대석, 중대석(간주석), 상대석으로 구성된 기단부와 가장 중요한 불을 모시는 화창을 가진 화사석, 그 위에 지붕돌인 옥개석이 있다. 그 옥개석 위에는 보배로운 구슬을 상징하는 보주가 있다. 땅에 닿은 지대석(地臺石)은 이중 구조로 돼 있다. 땅과 맞닿은 부분은 연꽃봉오리가 아직 피지 않은 오므린 형태로 다듬은 돌이다. 그 위 8각형의 면석인 안상(眼象)에는 학, 코끼리, 사슴, 용, 호랑이, 거북 등 일곱 동물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남은 한 면에는 통도사와의 거리 표시를 했다. 

 

▲ 김진여성 석등의 명칭


무풍교 입구 첫 번째 석등에 14정(町)으로 기록돼 있다. 1정(町)인 109m마다 석등을 세운 듯하다. 거리 표시로 보면 15개가 있어야 한다. 남아있는 석등을 보면 쌍으로 남은 석등이 원표, 2정, 3정, 14정인 것으로 보아 당시에 길 양옆에 전부 쌍으로 세웠다. 결국 30개의 석등 중에 17개 정도가 일제강점기 전후로 해서 사라진 듯하다. 아니면 길의 상황에 따라 쌍으로 혹은 하나가 세워졌을 수도 있다. 경봉스님의 일기장인 <삼소굴 일지>에는 석등 조성에 대한 내용이 없다.


14정(町)을 계산해보면 약 1.5Km다. 이는 무풍교에서 일주문까지의 거리다. 현재 석등은 무풍교에서 부도원까지 세워져 있다. 석등의 위치는 그동안 통도사 솔숲길 공사를 하면서 이동이 된 듯 이정표 순서가 맞지 않다. 현재 무풍교에서 부도원까지 남은 석등은 14정, 13정, 12정, 11정, 4정, 3정, 2정, 1정, 원표(元標)다. 10정에서 5정까지 총 6개의 석등이 현재 없다. 원표는 길의 기준점이다. 아마 1937년 삼성반월교를 세울 때 같이 만든 석등 2개가 원표가 아닐까 추측된다. 원표 석등은 그래서 통도사 일주문 근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청류동 정자 근처에 있다. 


지대석 위 하대석에는 보통의 석등과 마찬가지로 연꽃 모양을 새겨두었다. 연꽃이 땅을 향해 있기에 복련(覆蓮)이라 한다. 마치 땅의 흙탕물에 묻지 않고 연꽃봉우리를 피우고 연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 이 꽃을 피움은 바로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욕망을 버리기 위해 초기 불교에서는 팔정도(八正道)의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석등의 기둥돌인 간주석이 팔각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를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바르게 보라(정견 正見). 바르게 생각하라(정사 正思). 바르게 말하라(정어 正語). 바르게 행동하라(정업 正業). 바르게 생업을 유지하라(정명 正命). 바르게 수행하라(정정진 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져라(정념 正念). 마음을 바로잡아라(정정 正定). 바르게 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비뚤어지고 굽어있는 것을 바르게 펴기 위해서는 참으로 큰 노력이 필요하다.

석등을 시주한 해담치익 스님

석등의 간주석 한 면에는 시주자의 이름 또는 단체를, 또 다른 면에는 봉헌(奉獻)이라 새겨놓았다. 본사 스님들의 계모임인 갑계에서 3개, 스님 개인이 1개, 그리고 일반 신도들이 9개를 시주했다. 그들의 보시가 있었기에 어둠이 두렵지 않다. 


불사(佛事)한 갑계는 무자갑계, 임오갑계, 환성종계다. 하지만 12정 석등의 시주자인 본사 서증곡(徐曾谷)은 해담치익(海曇致益, 1862-1942) 스님이다. 그는 울주군 언양 출신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승려로 19세에 통도사에서 승려가 됐으며 용문사의 해주에게서 경전을 배웠다. 그 후 고운사에서 경허선사의 제자인 수월(水月) 관음(音觀)의 법을 이어받았다. 1912년 한국최초의 사지(寺誌)인 <통도사 사적>을 발간했으며, 1915년 통도사 보상암에 율원을 개원했고, 1916년 통도사 안양암에 선원을 개설해 조실로 주석했다. 1929년 선교 양종 7교정의 한 사람으로 추대됐으며, 통도사에서 입적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증곡집(曾谷集)>이 있다. 해담스님은 율사(律師)로 근현대 통도사 율맥의 시작이었다. 스님은 계율을 엄수(嚴守)하고 보살계 법회의 전계사(傳戒師)로 활동해 여러 곳의 계단에서 3천여 명에게 계를 주었다. 특히 덕숭총림 제1대 방장 혜암(慧庵, 1885∼1985)스님은 1911년에 구족계(具足戒)를, 경봉스님은 1912년 4월에 비구계와 보살계를, 구산선사는 1939년 4월 비구계 받는 등 많은 선지식들도 해담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경봉스님에 의해 1927년에 시작된 통도사 화엄산림법회에 경봉 스님, 보우 스님과 함께 법사로 활동했다.


해담스님에게는 듣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몇 가지 있다. 스님의 걸림 없는 대중법문은 통도사 서향각(西香閣)에 주석할 때 나한에게 언설변재(言說辯才)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서향각에서 기도하던 중 눈썹이 흰 나한으로부터 꿀물을 한 그릇 얻어 마신 현몽을 했는데 그때부터 법문을 자유자재로 하게 됐다고 한다. 스님은 특히 화엄경을 공부하는 화엄대법회를 40여 회나 열었는데 그때마다 대중이 몰려들었고 이적도 일어났다. 영축산에 산불이 난 것처럼 방광이 보이는가 하면, 자장암 법회장에 몸이 노란 금개구리가 나타나기도 했다. 또 1899년 홍월초 스님이 주관한 운문사 화엄법회를 봉행할 때, 질병 치유를 위해 백일기도를 하던 당시 동궁(東宮 후일에 순종)의 병이 80여 일만에 꿈속에 나타난 어떤 스님의 금침을 맞고 치유되는 일이 있었다. 통도사 부도원에 ‘남산종 해담율사의 비’가 있다.

 

▲ 서해담 스님 진영(통도사 영각)

 

<증곡집>에 이런 시가 있다. “誡口(계구) 입조심/ 좋은 말도 한두 번, 길면 병이 되거늘/ 하물며 나쁜 말을 여러 번씩 함이랴./ 만약에 좋지 않은 남의 말을 들었다면/ 내 입에 옮기지 말고 다물고 말을 말라.”

석등을 시주한 부산의 사회운동가 권인수

11정 석등의 부산 권인수(權仁壽)는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기업인이자 사회운동가다. 1920년대 부산에서 조선인 청년운동에 적극 참여해, 1925년 8월부터 서부청년회 회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부산청년연맹의 출범에 관여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의 친구 최천택과 함께 집행위원이 됐다. 당시 청년회 운동은 반일적인 요소가 강해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권인수는 1926년 부산삼산병원 습격 사건으로 검속됐다가 안희제, 문상우, 어대성, 김국태 등의 석방운동으로 풀려났다.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부산학교평의원으로 활동하고, 1932년 부산부 대신정의 영명학원 교장을 맡아 학교를 운영했다. 또 1930년대에는 부산부협의회 의원으로 조선인을 위한 권익옹호 활동을 해 전차요금 균일제를 주장했고, 학교 옆에 일본인 기생 권번을 설치하려고 하자 조선인 교육 차별이라는 점을 내세워 조선인 의원들과 함께 대응하기도 했다. 또 빈민구제를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 빈민의 묘지와 화장장 사용료 면제 등 다양한 정책을 제안했다. 그는 대동주조장을 창립한 이래 부산서부양조주식회사를 만들고 해방 후에도 계속 양조업에 종사. 해방 후에 부산상공회의소 부회두(副會頭), 1954년 경상남도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활동했다.

 

▲ 지역민의 이익을 옹호한 권인수(매일신문, 1940.4.13.)

 


이병길 시인, 울산민예총 고문, 역사문화 질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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