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8-23 11:20:11
  • -
  • +
  • 인쇄
중국 8대 고도를 가다

학자에서 정치가로 전향한 사람

세계적 베스트셀러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거 스노우는 저우언라이(주은래)를 가리켜 “학자에서 정치가로 전향한 사람”이라는 평을 남겼다. 그가 1936년 섬서성 보안에서 만난 저우언라이의 모습은 “몸이 가냘프고 중국인으로서는 유별나게 검은 수염이 많은 젊은 장교”의 모습이었다. “냉정하고 논리적이며 경험주의적 인물”이란 인상을 남겼다.


저우언라이는 강소성 회안(소주의 북쪽)에서 ‘파산한 관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 텐진으로 이사 와 남개중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중학교를 졸업한 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어를 배우는 동안 동경의 와세다대학과 교토대학에서 청강생으로 공부한다. 18개월간 일본 유학생활에 접어들 무렵, 돈이 없었던 그는 1919년 텐진 ‘난카이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다.


그해 중국 최초의 학생운동인 5.4운동이 텐진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텐진지역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저우언라이는 체포돼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한다. 출옥한 뒤 베이징으로 가 유명한 공산주의 이론가인 이대교를 만났고 그의 권유로 1920년 유럽 유학을 떠난다. 그는 프랑스, 런던, 독일에서 3년을 보냈다. 저우언라이는 프랑스 체류 기간 중 공산당에 가입했고, 독일에 정착한 뒤로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길을 걷게 된다. 

 

▲ 텐진 난카이대학에 있는 저우언라이 동상


1924년 중국 광주로 돌아온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장개석)가 교장으로 있는 황포군관학교의 정치부 부주임이 됐다. 1926년이 되자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긴장이 점차 증폭되면서 다른 공산당원들은 모두 황포군관학교에서 쫓겨났지만 저우언라이만은 특별히 장제스의 명령으로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며 남아있게 된다. 1926년 장제스의 북벌이 진행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조직해 국민군의 상해 점령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저우언라이의 지도로 60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가했고, 이중 무장을 갖춘 5000명의 노동자들로 혁명군이 창설됐다. 혁명군은 경찰서와 무기고, 군벌 수비대를 차례로 점령해 상해에 ‘시민정부’가 수립된다.


그러나 노동자 민병대의 환영을 받으며 상해에 무혈입성한 장제스의 국민군은 1927년 4월 12일 반혁명을 일으키고,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시민정부는 해체된다. ‘상해대학살’의 희생자는 모두 5000명이었으며, 상해봉기 때 저우언라이에 협력했던 지도부 수십 명도 모두 체포돼 처형된다. 다행히 저우언라이는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남창으로 가 8월에 남창봉기를 일으켰으나 이 봉기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연이어 일으킨 ‘광동꼬뮨’의 실패로 그는 1931년까지 지하 활동을 벌이다가 이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봉쇄망을 뚫고 ‘강서와 복건성 소비에트’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홍군 총사령관 주덕을 만나게 되고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후에 그는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됐다. 이때부터 홍군과 국민군의 수년에 걸친 투쟁이 계속됐고 드디어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2만5000리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에드가 스노우가 저우언라이를 만났을 때 홍군은 대장정을 마치고 무사히 섬서성 보안에 안착했다. 에드가 스노우는 당시 30대였던 저우언라이의 몸에는 매력이 넘치고 있었으며, 항상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고 세련된 매너를 지니고 있었다고 썼다. 1949년 신중국 건설 이후 외교관으로 활발히 활동하게 만든 다양한 특색이 이미 이때부터 발휘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혁명기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산당의 스파이 조직과 비밀 지하활동을 이끌었던 영도자였다. 그는 밖에 나갈 때 노인, 부녀자, 외국인 선교사 등으로 자유자재로 변장했다. 특히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후, 장제스 통치 구역인 서안과 우한, 중경을 무대로 종횡무진 암약한다. 

 


저우언라이는 이 시기에 국민당 군대의 고위 인사들을 친중공 인사로 개조시켰고, 정보요원들을 곳곳에 심어 공산당의 비선조직을 넓혀 나갔다. 대표적인 예로 당대 최고의 권위 있는 역사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곽말약을 친중공 인사로 변신시킨 것이다. 곽말약의 영향으로 중도 성향의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친중공 인사로 변모하게 된다.


저우언라이는 1938년 10월 우한이 일본군에 함락돼 국민당 정부가 사천성 중경으로 옮겨가자 활동 무대를 중경으로 옮겨 3년간 비밀공작을 수행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중국을 잃은 뒤 “군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정보에서 져 본토를 잃었다”고 탄식한 바 있다.
 

▲ 인민총리 주은래

‘수어지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두 사람의 관계는 흔히 물과 고기의 관계인 ‘수어지교’의 사이로 일컫는다. 마오는 주도적인 주연이고, 저우언라이는 주연급 조연으로 호흡이 척척 맞았다. 마오는 전체적인 통찰력으로 큰 방향을 잡아 이끌었고, 저우는 마오의 방향과 생각을 주도면밀하게 구체화하고 집행하는 역할을 했다.
마오와 저우는 1924년 광주에서 처음 만나 1976년 죽을 때까지 52년의 세월을 함께해온 동지였다. 저우는 신중국 건국 후 마오 주석의 유일한 총리로 26년 동안 마오를 보필했다. 저우는 50년 동안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로 일해 오면서 당의 간부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당 밖의 민주인사나 지식인들과 폭넓은 교류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실하고 겸손하며 너그럽고 후덕하게 대해 인심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이런 처신은 사람들을 단합시켜 공동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됐다. 또한 청년시절 일본, 프랑스, 독일 등 해외를 견문한 다양한 식견을 살려 신중국 건국 후에는 외교 전문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신중국 건국 이후 사회개조 과정에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로 귀결되는 마오의 급진 좌파노선, ‘돌격주의’와 저우 등 경제개발 실무계획 진영을 주축으로 한 점진적 개혁 그룹의 ‘반돌격주의’ 간에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마오는 중국의 강철 생산량과 주요 공업 생산품 생산량에서 영국을 추월하고 15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생각으로 대약진운동을 발동한다.


1958년 1월 12일 광서성 난닝회의에서 저우는 “생산관계를 개혁해 약진적 발전을 시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사회주의 혁명과 경제건설을 방관하고 위축시켰다. 우경 보수주의 사상이다”라는 자아비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반돌격 보고를 제기한 주요 책임자로서 군중의 생산 고조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생산적인 정책을 펴지 못했다. 그리고 더 적게, 더 느리게, 더 나쁘게, 더 낭비적인 정책을 폈다.” 저우는 이후에도 체면불고하고 매번 처절한 심경으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우언라이가 우려했던 폐해들이 곳곳에서 속수무책으로 드러났다. 생산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인민경제는 파탄에 직면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기근까지 덮쳐 1959년부터 1961년 사이 3년 동안 최소 4500만 명이 굶어 죽는 처참한 비극을 불러왔다. 결국 국정운영의 책임을 지고 마오쩌둥은 2선으로 물러앉게 된다. 루산 2차 회의 결과였는데, 이때도 저우언라이는 “나는 총리다. 중앙, 국무원이 결정한 일은 내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면서 대재앙을 맞게 된 결과에 대해 스스로 자아비판과 2선 후퇴를 용단한 마오쩌둥의 권위와 위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저우는 마오가 멀리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는 지도자라는 사실을 인정했고, 자신은 마오의 충실한 집행자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임으로써 한때 위기를 겪기도 했던 두 사람은 1976년 같은 해, 세상을 뜰 때까지 우호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중국을 이끌어 갔다.
 


금기의 기억, 문화대혁명

‘천하대란 천하대치’, ‘세상이 한바탕 큰 난리를 겪어야만 큰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억은 금기의 기억이다. 1967년부터 마오쩌둥이 죽은 해, 1976년까지 10년 동안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암흑기로 기록된다. 모든 대학과 공장은 폐쇄됐고 중국의 모든 생산활동은 정지됐다. 중국공산당의 주요 간부와 당관료,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 문화예술계 인사, 중소상공인들은 모두 농촌과 광산으로 ‘하방’됐다. 문하대혁명 기간 중에 대략 300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었고 반신불수가 돼야 했다.


1958년~1961년까지 전개된 대약진운동기, 3년에 걸친 기근으로 무려 4500만 명의 굶어 죽은 시신이 대륙을 뒤덮는다. 미국의 강철 생산량을 따라 잡는다고 9000만 명의 농민을 동원해 집 뜰에 용광로를 만들고 연료용 나무와 철광석을 찾아 전국토를 헤집고 다녀야 했다. 중국의 모든 산림자원은 훼손되거나 고갈됐다. 미국의 우월한 기계제 대공장에 대항해 원시적인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맞서려 한 것 자체가 해프닝이었다. 

 

 


한동안 마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토굴 속에 웅거한 늙은 인디언 추장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이때부터 마오의 리더십은 급격히 폭압적 통치 스타일로 줄달음치게 된다. 1968년 3차 ‘루산회의’로 알려진 ‘중국공산당 8기8중전회의’를 거치면서 자신의 잘못된 노선과 정책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경화 노선으로 규정하고 반우파투쟁을 전개한다. 어느날 토굴 속에서 쩌렁쩌렁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는 순식간에 ‘중원 18만리’에 울려 퍼져 나갔다.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를 통해 마침내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출발은 ‘수정자본주의 타도’에 있었다. 중공업 중심의 전통적 공산주의 경제발전 이론에 대해 경공업을 우선해서 발전시키고 점진적으로 중공업을 발전시키자는 비판은 이제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었다. 치열한 노선투쟁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동반했다. 그 정점에 린바오(임표)가 있었다. 린바오는 문화대혁명의 충실한 수행자였으며 마오쩌둥 우상화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마오의 주요 저작과 연설문을 발췌한 <마오 주석 어록>은 그의 작품이다. 린바오는 중국혁명 과정에서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23세에 지휘관이 됐고 25세에 장군이 됐던 입지전적 인물이다. 모멸찬 야심가였던 그는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데 성공해 마침내 1969년 마오쩌둥의 유일한 후계자로 지명받는다. 그의 지위는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었다.


그러나 린바오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주석을 노리는 그에게 마오의 견제가 시작되자 린바오는 마오 암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암살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결국 그는 소련 망명을 시도하는데, 자신과 아내, 아들과 함께 탄 비행기는 몽골의 한 평원에서 추락해 모두 죽는다. 


문화대혁명 시기 린바오와 대척점에 선 영웅이 있었다. 펑더화이(팽덕회).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를 처음 만나 40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마오는 한때 그를 가리켜 ‘나의 유일한 대장군’이라고 극찬했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을 반대했지만, 끝내는 ‘항미원조’ 총사령관으로 참전해서 우리와는 악연을 맺은 인물이다. 펑더화이는 천안문 광장에 운집한 300만 명의 홍위병 앞에서 갖은 폭행과 모욕, 조리돌림을 당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8년 동안, 유리창에 종이를 발라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감호소에 감금돼 있다가 암에 걸린 채 죽고 만다. 


마오쩌둥이 2선으로 후퇴하자 이를 승계해 중공의 주석이 된 사람은 류샤오치(유소기)다. 그 역시 ‘대장정’ 시기 연안에 당도하기까지 3000리에 걸쳐 130겹의 일본군 포위망을 뚫었던 불굴의 혁명가였다. 대약진운동 기간 3년 재해로 4500만 명의 인민이 죽어나가자 우유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가 3년간 유일하게 섭취한 음식은 고작 계란이었는데 그것도 하루에 1개만 먹었다.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나는 평생을 프롤레타리아로 살았고 너희들에게 물려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유언장은 유명한 일화다. 류사오치 역시 홍위병들에게 둘러싸여 갖은 폭행과 조리돌림, 인간적 수모를 겪어야 했고 약 한 첩 써보지 못한 채 죽어야 했다. 뛰어난 이론가였던 그는 ‘공산당원의 수양’이라는 격조 있는 글을 후세에 남겼다.


이러한 혼돈의 동란 시대에 저우언라이는 린바오와 ‘4인방’ 등의 독랄한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저우는 갖은 안간힘과 지모를 짜내며 공격받는 혁명원로들을 은밀히 보호하거나 빼돌려 피신처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탁월한 능력과 재능을 갖추었지만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로 낙인찍힌 덩샤오핑(등소평)을 보호하는 것과 복권시키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덩샤오핑 역시 저우를 ‘따꺼’로 모시며 평생 공경하고 존경했다.

유일한 유산 5000위안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그는 10년을 한결같이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씩 일을 했고 파김치가 돼 집에 돌아왔다. 눈자위는 푹 꺼지고 몸은 날로 수척해 갔다. 방광암을 앓던 그는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도 없었고 사망 시 그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5000위안이 전부였다.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85만 원이다. 당시 외신 보도에 따르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었고 도처에서 사람들이 흐느껴 울었다.” “열차에 탄 군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90세의 나이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중국의 영원한 인민군 총사령관’ 주덕은 노구를 이끌고 빈소를 찾아와 “언라이” “언라이”를 부르짖으며 오열했다. 그리고 인민해방군 총사령관답게 떨리는 오른손을 얼굴 가까이 들어 올려 그의 혁명 맹우 저우언라이에게 엄숙하고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


젊은 날, 이곳 텐진 난카이대학 시절 저우언라이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그때 저우언라이는 단벌의 검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옷을 세탁하는 날이면 그 다음날 입고 가기 위해 커다란 부채로 마를 때까지 부채질을 했다. 옷이 마를 때쯤이면 저우언라이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이후, 26년 동안 총리이자 외교 업무를 전담했던 저우는 외국 사절들과 저녁 만찬이 있는 날이면 사전에 슬쩍 주방에 들려 국수를 한 그릇 훌훌 말아먹고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나갔다고 한다. 배가 고프면, 먹는데 신경이 쓰여 상대방이 하는 말과 표정 하나도 놓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가 26년간 중국의 총리로 재직하면서 남긴 ‘살아 생전 꼭 지켜야 할 9가지 가훈’을 여기에 소개한다. 1. 후배가 사적인 일로 총리실을 찾게 하면 안 된다. 2. 손님은 모두 국무원 초대소에서 공식적으로 만난다. 3. 식당에서는 다른 사람과 같이 줄을 서야 한다. 4. 극장에 갈 때 초대권을 사용하면 안 된다. 5. 사람을 초청하거나 선물을 받으면 안 된다. 6. 개인의 일은 스스로 처리한다. 7. 생활을 검소하게 하라. 8. 어떤 일에도 총리직을 이용하면 안 된다. 9. 공사를 구분하고 특권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갈공명과 함께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저우언라이는 이곳 텐진의 난카이대학 출신이다. 당연히 텐진 시민들에게 난카이대학은 대단한 자부심일 텐데 희한하게도 사람들이 대학의 위치를 몰랐다. 길을 가는 시민 뿐 아니라 공안, 심지어 택시기사조차도 “모른다”고 승차를 거부했다. 무려 2시간을 이리저리 옮겨 다닌 끝에 겨우 찾아 갈 수 있었고, 한 학생을 만나 대화를 통해 모든 의문을 한방에 해소할 수 있었다. “난카이대학은 텐진시 여러 곳에 나뉘어져 있다. 저우언라이 동상이 있는 곳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텐진시가 얼마나 큰 도시인가를 알게 됐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서구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침략 당했던, 텐진에서 50km 떨어진 ‘탕구 대고포대’를 다녀오고 나서부터다. 탕구는 현재 텐진시에 속한 곳인데, 전철로 1시간, 버스 30분, 도보로 30분, 대략 2시간 거리였다. 마치 서울에서 인천까지의 거리가 모두 텐진시였다. 저우언라이 기념관은 수상공원 옆에 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박종범 자유여행가

오늘의 울산 이슈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