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3

박기눙 소설가 / 기사승인 : 2019-06-26 11: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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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얼마 전에 끝난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는 ‘대수’라는 직책이 나온다. 왕의 오른팔을 뜻하며 손가락 모양을 본뜬 브로치를 가슴에 꽂고 다닌다. 대부분 대수는 왕의 최측근으로 권력과 오욕을 함께 누리는 인물이다. 드라마는 결국 대수였던 이의 판단으로 왕을 세우고 다시 새로운 왕의 대수가 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절대 권력자였던 대수가 내각처럼 보이는 몇몇 인물에게 다소 밀리는 장면이 이어졌다. 대수가 대중에 섞이는 그 장면에서 나는 왠지 의회 민주주의가 싹트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산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 했던가. 오대수는 영화 <올드 보이>의 주인공 이름이다. 그는 이름과 달리 영화 주인공 중에 꽤 성공한 캐릭터다. 알다시피 영화는 전혀 대수롭지 않은 상황, 평범하지 않은 인물로 가득하다. 영화의 끝부분, 결국 인생 전체를 수습하지 못하고 오대수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의 막바지, 대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은 요즘에도 가끔 생각나는 장면이다. 또한, 대수라는 이름은 영화 <올드 보이>를 꿰뚫는 열쇠 말처럼 보인다.


여기 또 한 명의 대수가 있다. 물 좀, 밥 좀, 술 좀 달라 외치다 소주나 한 잔, 두 잔, 석 잔 걸치는 하루아침을 노래한 가수,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은 뉴욕에 사는 대중 가수. 한대수다. 우연히 한대수 이야기를 찍은 음악 다큐멘터리를 봤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한대수는 영화 속 오대수 버금가는 인생을 살았다. 영화 속 대수는 자신의 작은(?) 일탈 행위로 인생을 저당 잡혔지만, 한대수는 시대의 역사와 맞물려 부서져 내린 아버지를 둔 까닭에 신산한 인생을 맛본 경우다. 앨범 <멀고먼 길>에 나오는 그의 구겨진 얼굴은 지금 봐도 낯설다.


한대수는 인생의 돌림길을 지난 어느 날, 옥산나와 결혼해서 딸 양호를 두었다. 서울 생활을 마감하고 뉴욕으로 돌아가 딸과 함께한 사진에서 대수는 행복한 얼굴이다. 그는 항상 웃는다. 껄껄 소리를 내며 웃는다. 얼굴부터 허리까지 움직이며 웃는다. 탁하지만 유쾌한 그의 웃음소리는 노래를 부를 때 목소리와 묘하게 닮아 인간적인 매력을 부추긴다. 또한, 인터뷰하는 도중 한대수가 잘 쓰는 말은 ‘양호하다’는 낱말이다. 좋다는 말 대신에 꼭 양호하다는 낱말을 뱉는다. 왜 그의 딸 이름이 ‘양호’인지 알 것 같다.


나는 입술에 관심이 많다. 두툼하고 아래로 축 처진 내 입술이 내 콤플렉스이기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저 입술을 다물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내가 화난 것처럼 여긴 적이 많다. 오해 아닌 오해를 씻느라 괜히 입가를 올리며 웃었던 적도 많다. 사진을 찍을 때 이를 드러내 웃는 것도 입술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그러다가 문득 왜 그래야 하는지 스스로 무색해지고 말았다. 이를 드러낸 내 모습이 타인처럼 낯설고 가식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부터 사진 찍을 때 이를 드러내지 않기로 굳게 작정했다.


한대수의 입술은 일자다. 얇고 가늘다. 그 입술로 뭐든 또박또박 자신의 관점을 말한다. 거침없지만 그 속에 많은 뜻이 담긴 말을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 입술 어귀까지 찰랑대는 그의 머리칼은 적당히 헝클어져 그의 자유로움을 표현한다. 또한, 주름이 생긴 그의 눈은 얼굴 뒤에, 얼굴 속에 감춰진 동그란 구 모양의 윤곽이 보인다. 눈가에서 시작한 동그라미는 눈자위 밑까지 이어져 안구의 크기를 짐작할 만큼 뚜렷하다. 가끔 안경을 쓰는데 동그란 안경이 더 동그랗게 보이기도 한다.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한 그의 모습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가 노래했듯이 무명 무실 무감한 님과 같은, 바람과 같은 인생을 지녀보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가끔 한 노래를 종일 들을 때가 있다. 예전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를 들었고 요즘에는 <바람과 나>를 그렇게 들었다. 가사를 적어 낮게 읊조리며 따라 부르기도 한다. 무명, 무실, 무감한 님을 노래한 대수의 마음을 알 듯 모를 듯 짐작하기도 한다. ‘무’로 시작하는 낱말의 깊음과 덧없음에 감동한다. 시를 읽으며 노랫말을 지었다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시의 위대함을, 인생을 파고드는 문학의 파장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끝, 끝없는 바람, 자유의 바람을 노래하는 그의 노래는 누군가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 들리는 벨소리가 되어 귓가에 맴돈다.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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