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한 동네를 기록하다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19-04-24 11: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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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벚꽃은 졌지만, 온 산과 들은 여전히 꽃 천지입니다. 연달래와 겹벚꽃, 유채와 냉이꽃, 모란꽃, 애기똥풀, 민들레 등 그 종류와 수를 셀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무는 앞다투어 연둣빛 잎들을 뿜어내어 온 산이 옷을 입은 듯 몽글몽글합니다. 초록의 색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런 좋은 봄날, 저는 미뤄둔 숙제를 하러 울주군 두서면 차리로 갑니다. 차리는 고헌산 동쪽 자락에 자리 잡은 동네입니다.


물론 숙제는 숙제일 뿐, 숙제가 즐거울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숙제의 부담감을 걷어 내는 것이 오늘의 첫 과제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옛말을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고, 맹물도 챙기고, 사과와 토마토도 챙깁니다. 지도와 정리된 차리의 지명 자료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언양읍에서 경주 방향으로 가다 구량리 신당 삼거리에서 구량천을 따라 차리 방향으로 갑니다. 두서면 보건소를 지나니, 저 멀리 오래된 은행나무도 보입니다. 구량리와 차리가 나뉘어지는 구량천 주변은 봄꽃들로 단장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울주군 두서면 차리 골목보


독티말리골, 배낭골, 약수탕골, 마치나무들, 보리미들, 앞들, 뒷들, 가는등, 당미기버덩, 가닥보, 골목보···, 오늘 제가 차리에서 만나야 하는 곳들입니다. 무사히 그들과 만나기를 바라며 숙제를 시작합니다.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았기에 골은 골짜기이자 주민들이 집을 짓고 살았던 삶터였지요. 그러나 지금은 숲이 우거져 접근이 어렵거나, 아니면 농장이나 주택지로 개발이 돼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곳이 많습니다.


독티말리골 아래에서 미술을 전공한 젊은 부부가 농장을 운영하고 있네요. 농장 입구 아담한 주택과 마당은 솜씨 있는 주인을 만나 예쁘게 단장되었습니다. 주택 주변 여기저기에서 주인 부부의 그림 솜씨를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딸아이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그들의 일상이 변함없기를 바랍니다. 결혼 후 이곳에 왔다는, 제겐 더 이상 친절할 수 없는 농장 주인에겐 옛부터 불려오던 동네 곳곳의 이름이 여전히 낯선가 봅니다. 그래서 경로당에 들러 마을 어르신에게 도움을 얻습니다. 역시 그곳에 정답이 있습니다.


차리의 옛 모습은 어땠을까요? 구량천 옆으로 난 마을 길을 따라 골짜기마다 새로운 주택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수해로 홈도골에 있던 폭포는 사라져버렸고, 주민들이 매년 6월 15일이면 마을 제사를 지내던 ‘농지나무’도 재해를 피해갈 수 없었답니다. 마치나무들이 자라던 들이 논으로 경지정리가 되면서 마치나무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나 예전의 쓰임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있습니다. 골목보는 주택과 시설물들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논밭에 물을 대어주지 않습니다. 얼마 전 숙제를 시작하던 첫날, 동네를 흐르는 개천에서 보를 찾아 헤맸었지요. 보라고는 4대강의 보밖에 몰랐던 까닭이지요. 많은 논란과 문제점을 낳았던 4대강의 보가 강의 물길을 막았다면, 농촌 동네에 있는 보는 농사짓는 땅으로 물길을 여는 것이더군요. 보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벌써 시원합니다.

 

▲ 울주군 두서면 차리 뒷들못


상차리 앞에 있는 들은 ‘앞들’이라는 이름을 가졌군요. 앞들 뒤쪽에 있는 들은 당연히 ‘뒷들’입니다. 뒷들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뒷들못이 제공하는 물을 뒷들보를 통해 받아 먹고 자랍니다. 마을 어귀에 마실 나와 앉은 어르신의 친절한 미소는 산과 들, 개천, 나무와 풀, 꽃과 어우러져 차리마을이라는 작은 우주를 만들어냅니다.


중차리 마을에서 인보로 넘어가는 고개인 당미기 고개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마치나무가 있던 들판을 둘러봅니다. 보리미버덩(버덩: 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과 오매산을 끝으로 오늘 일정을 마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가 기록하는 차리는 내일이면 또 다른 모습이겠지요. 어떤 것은 사라질 것이며, 어떤 것은 사용가치를 달리한 채 남겠지요.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 가게 될까요?


원영미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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