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통도사에 육군 병원이 있었다(1)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20-06-25 08: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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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70년

통도사 대광명전에서 70년 된 낙서가 발견됐다

통도사가 대광명전에서 한국전쟁 때 부상병들이 남긴 낙서를 발견했다. 한국의 낙서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가장 오래된 그림 낙서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다. 울산 천전리 각석은 그림 낙서와 문자 낙서가 혼합된 것이다. 각석은 선사인과 신라인의 것, 심지어 근현대인의 것이 서로 혼재돼 있다. 이 국보급 문화재에 몇 년 전 여행하러 왔던 학생이 낙서해 큰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어디에나 여행을 가면 한국인은 낙서를 남기며 자기 삶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 대광명전의 낙서는 통도사에 육군병원이 있었다는 객관적 증거였다. 


통도사 육군병원 존재는 기록과 증거, 그리고 증언 삼박자가 이뤄져야 한다. 그동안 이 삼박자의 긴밀함과 연관성이 없었다. 자료의 빈곤과 부재 때문이었다. 2020년 통도사 개산 1375년과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이해 통도사가 호국사찰이었음이 밝혀진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 통도사 용화전 미륵존불 갱(更) 조성 연기문(1952)

부상병들 통도사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2019년 9월 26일 영축총림 통도사(주지 현문스님)에서 용화전 미륵불소조좌상의 복장유물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1952년 9월 작성된 ‘용화전 미륵존불 갱(更) 조성연기’를 발견했다. 구하스님이 붓글씨로 쓴 “불기 2974년경인 6월 25일 사변 후 국군상이병 3천여 명이 입사(入寺)하야 2979년 임진 4월 12일에 퇴거하였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주지는 최대붕스님이었다. 


제31육군정양병원은 1950년 12월 12일 충남 대전에서 창설하고 1.4 후퇴 때 부산으로 이동한 시설로 1958년 11월 15일 해체했다. 1951년 1월 25일 개소한 동래 정양원은 동래 온천 가까운 들판 한가운데 있는 천막촌이었다. 논 가운데 짙은 국방색 천막 20여 개가 빙 둘러쳐 만든 것이었다. 병원 본부도, 진료실도, 입원실도 모두 그 속에 있었다. 물론 의료진과 병사들 숙소도 천막이었다. 정양원은 상이군인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야전병원이나 정규 육군병원 같은 데서 치료·처치 받고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들을 일정 기간 휴양시켜 원대 복귀시키는 요양병원이었다. 치료가 끝났다고 당장 전장으로 보낼 수 없는 환자들을 수용할 필요가 생겨 급조된 시설이었다. 


1951년 3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은 동래 정양원을 방문해 상이군인을 위로하고 위문품으로 셔츠와 손수건을 나눠줬다. 당시 환자 수용 능력은 2000~4000명 수준이었다. 결국 환자가 많아져서 분원이 생겼는데 당시 환자를 수용할 공간으로 사찰이 가장 적임이었다. 부산의 범어사와 양산의 통도사에 분원이 생겼다. 


부산시 영주동 김창근(2006년, 81세) 씨는 1950년 9월 경북 ‘안강전투’에서 인민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다 총상을 입고 양산 통도사 인근의 병원까지 후송돼 치료를 받았다. 김정선 씨 부친은 6사단 19연대 소속으로 신령 전투지구에서 전투하다가 다리 부상을 입어 부산 토성 국민학교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상처 완치가 불가능해 부산 동래 온천 정양원, 금정산 정양원 범어사와 양산 통도사 정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경비 중대 근무 중 다시 입원한 후 부산 동래 31 육군병원으로부터 1952년 4월 17일부로 고령자로 의병 제대 했다. 


국방부는 지난 2월 14일 열린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에서 6.25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고(故) 박 모 소위를 전사(戰死)로 결정했다. 박 소위는 1950년 9월 영천 전투에 참전했다. 영천 전투 수행 중 흉부에 포탄 파편상을 입은 뒤 1951년 1월 27일 소집해제된 뒤, 양산 통도사에서 치료를 받다 1951년 4월 15일 사망했다. 이는 통도사가 육군병원이었다는 사실을 정부 당국이 공식적으로 최초로 인정한 것이다.


1952년 9월 작성된 ‘용화전 미륵존불 갱(更) 조성 연기’에 따르면, 1952년 4월까지 통도사에 상이군인을 위한 정양원(靜養院)이 있었고, 치료를 받은 환자가 3000여 명이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용화전의 연기문을 통해 당시 통도사가 육군병원 정양원의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지만 뚜렷한 구체적 증거가 없었다. 육군병원에도 당시의 사료가 없다. 그리고 통도사 역시 ‘연기문’ 말고는 없다.


한 장의 사진이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지만,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증거나 증언은 이미 존재했다. 답변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질문을 올바로 하지 않으면 정답은 제출되지 않는 법이다.
 

▲ 이승만 대통령, 통도사 상이군인에게 양말 증여, 동아일보 1951.10.24.

대광명전의 낙서, 통도사 육군병원의 객관적 증거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당시의 사료를 찾는다는 통도사 기획국장 성구 스님의 연락을 지난 3월에 받았다. 보광중학교 출신 양산시 하북면 마을 어르신을 만나 뵙고 인터뷰를 했다. 3월 20일(금) 보광중학교 졸업생을 인터뷰하던 중 “상이군인들이 낙서를 많이 해서 스님들이 속상해했다”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예전에 우연히 봤던 대광명전 낙서가 생각났다. 한참 코로나19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오후 4시 30분 통도사 대광명전은 적멸에 들고 있었다. 휴대폰 전등을 켜고 벽을 보다가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발견의 기쁨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흥분을 누르고 바라봤다. 


대광명전에 남겨진 낙서는 퇴원, 전우, 정전의 낱말과 군인 모자, 탱크, 트럭의 그림이었다. 통도사에 육군 병원이 있었다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증거다. 군인이 아니면 남길 수 없는 객관적 증거였다. 

 

▲ 70여 년 전의 낙서가 발견된 통도사 대광명전

단기 연도, 1951년 낙서

눈에 띄게 보인 낙서는 바로 단기 4284년, 즉 1951년을 나타낸 것이다. 못, 연필, 칼 등으로 새긴 3개의 낙서가 발견됐다. “4284년 5월 29일 도착하여 6월 12일 떠나간다"라는 못으로 새긴 내용이었다. 연필로 “단기 4284년 4월 29일 퇴원(退院) 상자(傷者) 출발(出發)”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나무 기둥에 칼로 “4284년 6월 10일 평양”을 새겼다. 낙서의 연대 기록은 조작이 아닌 당시의 것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였다. 또 낙동강 전투에 참전한 군인이 아닌 평양 출신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기 연도가 1951년 4월, 5월, 6월에 집중적으로 남아있음은 이 시기에 통도사에 상이군인들이 있었고, 퇴원이라는 단어는 병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1951년 10월 이승만 대통령이 제31 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에서 정양 중인 장병들에게 양말 1600족을 전달한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 단기 4284년 낙서

 


퇴원하며 남긴 낙서 시

대광명전의 낙서 시는 당시의 이곳이 병원이었음을 더 생생히 보여줬다. 퇴원하며 남긴 낙서 시는 3편이 있었다. “가노라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들아/ 정든 통도를 떠나랴고 하려마는/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갈 수밖에 더 있느냐.” 동료를 두고 떠나는 마음은 시뿐만 아니라 낙서에도 그대로 잘 나타나 있다.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는 가련다”, 또 큼직하게 “전우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와 “통도사에 이별한다” 등의 낙서를 남겼다. 


낙서 중에는 “停戰(정전)이 웬 말?”이란 구절이 있다. 1951년 7월 정전 반대 궐기대회가 서울, 부산 등지에서 일어났다. 당시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전쟁 상황이 아니라면 ‘정전’이란 단어는 사용할 수 없다. ‘전우’와 ‘정전’의 용어는 분명 군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 이별의 낙서 시


그림 낙서와 주소 낙서

문자 낙서 외에도 연필로 남긴 그림 낙서가 있었다. 아이 얼굴, 모자, 모자 쓴 얼굴, 그리고 건물 그림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군인이 있었다는 가장 결정적인 그림 낙서는 대광명전 북쪽 바깥 마지막 칸에서 발견했다, 바로 탱크와 트럭 그림이었다. 


일부 낙서에는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과 “사랑하는 오빠”, 이름 이창규(李昌奎), 진기준(陳基俊), 김정례(金貞禮), 김순동(金舜東) 등이 있지만, 상이군인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특히 바깥벽 낙서에는 “경주군 강동면 왕신리 김해 김병찬 임신(壬申, 1932년) 3월 초 8일 유람(遊覽) 차(此) 사(寺)”라는 오래된 낙서도 있었다.


혹시나 하여 다른 전각을 전부 둘러봤다. 현재 대광명전을 제외한 다른 전각은 내외 벽면을 전부 개보수해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영산전의 경우는 외벽의 낙서로 인한 훼손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 탱크와 트럭 그림


대광명전 낙서는 부처님의 선물

천만다행으로 대명광전은 7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벽면을 새로 보수하지 않았다. 대광명전 낙서는 한국전쟁 당시 제31 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정양원)이었음의 증거가 되기 위한 부처님의 선물이었다. 


혹시나 하여 다른 전각을 전부 둘러보았다. 당시 보광중학교 졸업생에 따르면 전각에 상이군인들이 낙서 등을 많이 해서 전각들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현재 대광명전을 제외한 다른 전각은 내외벽면을 전부 개보수하여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영산전의 경우는 외벽의 낙서로 인한 훼손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천만다행으로 대명광전이 7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벽면을 새로 보수하지 않은 것은 통도사가 한국전쟁 당시 제31 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정양원)이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부처님의 가피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실재 통도사 무풍한송 길의 이름바위 역시 근현대 역사의 방명록으로 우리 낙서 기록문화 유산의 보고다. 낙서도 충분한 역사문화 유산의 증거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문화재를 보수 공사할 때 낙서도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소중히 다뤄야 함을 아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호국사찰의 전통을 가진 통도사

한국불교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고 아끼는 호국애민(護國愛民)이라는 독특한 불교관을 지니고 있다. 그 한국불교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 바로 통도사다. 통도사의 창건주인 자장율사는 외적의 침입을 막고 나라의 부강을 기원하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자장율사의 바람은 불국토의 실현이고 그것은 호국애민의 실현이었다.


통도사의 법맥은 청허(淸虛) 휴정선사(休靜禪師)로부터 시작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흔이 넘은 고승인 휴정선사는 전국에 격문을 돌려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했다. 휴정선사가 바로 서산대사이고, 그 제자인 유정(惟政)이 바로 밀양 출신의 사명(四溟)대사다. 임진왜란의 전장에서 가장 빼어났던 의승군이었던 사명대사는 “나라와 백성을 등지고 세상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불자의 도리가 아니다”라며 스님들을 설득했다. 또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에 직접 들어가 포로를 데리고 귀환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스님은 통도사 금강계단의 사리를 보호하는 활동을 했고 그 기록이 통도사의 ‘세존비각’에 새겨 있다. 통도사 암자 중에 사명암이 있음은 통도사가 바로 호국사찰의 맥을 이어온 사찰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통도사 대부분 전각이 왜군에 의해 불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 통도사 용화전 소조미륵불좌상


일제강점기 통도사 스님들은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3일 오택언, 양대응, 김상문, 신화수 스님 등이 주축이 돼 동부 경남 최초로 통도사 신평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또 구하스님은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스님들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고단한 활동을 했다. 1941년 통도중학교의 김말복·조용명 스님, 배기철 교사는 항일 민족교육을 해 투옥 등 고초를 겪었다.


1952년 통도사 용화전 연기문을 볼 때, 당대의 율사였던 자운성우 스님과 월국정기 선사가 모연(募緣)했고, 한국전쟁 가운데 미륵불상을 조성했다는 사실만 봐도 군인과 국민들이 전쟁으로 입은 상처가 하루빨리 치유되고, 통도사 스님들이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모셔진 불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직후 1953년 통도사 극락암에 극락호국선원이 개설됐다. 호국(護國)이란 ‘국가주의’, ‘국가와 종교의 야합’이란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경봉스님은 “‘나’가 모여 우리가 되고 우리가 모이면 국가가 된다. 그렇게 가다 보면 우주에 이르지 않겠느냐. 경계 짓기 나름일 뿐”이라고 말했다. 


조계종 9대 종정을 지낸 월하스님은 199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위해 나눔의 집 건립 성금을 모은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도 몰래 1억5000만 원을 무주상 보시했다. 2002년 백련암 법당 신축 암막새에 원산스님은 “佛日增輝(불일증휘) 平和統一(평화통일)”를 새겼다. 성파스님은 2011년 남북통일과 국운 화합의 염원을 담은 16만 도자대장경을 서운암 도자장경각에 모셨다. 


탈속의 스님과 사찰도 때론 세속 국가의 위기 시절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통도사는 임진왜란의 승병,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 한국전쟁 때 육군병원 정양원, 그 후 스님들의 일련의 보시 활동 등으로 볼 때, 나라의 큰 사찰로 호국사찰의 역할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호국(護國)이란 구세불타(救世佛陀)의 성도(聖道)를 생활화함이다. 이는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으로 연결돼야 한다. 출가의 종교라 하여 세속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호국은 이제 통일로 이어져야 한다. 이처럼 통도사의 스님들은 호국, 평화, 통일의 염원을 갖고 활동했다. 


이병길 시인, 양산 보광중학교 교사, 울산민예총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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